金民瑞....
"..김민...서??..."
'..!!!!!...'
참..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신 [서희]어머니의 이름이 내가 알던 까마득한 [민서]누나의 이름과도 같다니..
누군가를 닮은 [서희]의 하얀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아냐...핫...하하.. 김민서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데... 많은데....."
물잔을 건네던.. [서희]의 가늘고 길다란 아름다운 손..
어딘가 낯이 익어.. 자꾸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서희]의 뒷태..
접객실 입구에서 교회 사람들로 보이는 한무리의 일행을 맞이하는 [서희]가
눈에 들어왔다.
묶은 머리.. 길다란 목.. 하얀얼굴.. 촌스럽도록 찐한 눈썹.. 두꺼운 쌍거풀..
순간 머리속이 온통 무섭도록 쌔하얀~ 괴성으로 가득차 버렸다.
접객실 안쪽 분향소의 영정사진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려 하자 잽싸게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냐....절대로...아니야...하하...그렇치..민서누나가 싸이에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서희]어머니의 영정사진을 안본게 다행이다.
아니.. 뭐 봐봤자 [민서]누나는 분명히 아닐테니...
순간 정신을 차리니 장례식장 건물앞 벤취에 앉아 담배를 연거푸 태우고 있다.
[서희]의 얼굴이 떠오른다.
[민서]누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서희]의 짙은 눈썹과 쌍거풀이 찐한 커다란 눈망울과.. 웃을 때만 보이는 송곳니쪽 덧니..
길다란 팔다리..
"아...아냐~... 아니....그래..코는 안닮았어..민서누나는 낮은데.. 서..서희코는 오똑
하잖아........내.... 코처럼..... 내코...처럼......."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마구마구 흘러 내리고 있다.
지금 이상황에서 뭐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서희]어머니의 영정사진부터 확인을 해야 겠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아니면 다행인데.. 만약.. 진짜 [민서]누나가 맞다면???...
순간..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면.. 그 후폭풍은 지금 저곳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아..!!.... 이..... 씨바...!!......"
계속 눈물을 훔쳐드는데.. 이제 막 도착한 어느 교회의 봉고차에서 열댓명의 사람들이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에휴... 김집사님.. 어떡해....에휴...."
"쯧쯧... 사십도 안된 나이에.. 여지껏 신랑도 없이.. 혼자 살면서.. 너무 안됐어.."
"목사님이 지금 안에 와계시다니까.. 빨리 서둘자고요.."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향한다.
"아.... 아니야... 이거는.... 이..이거는....."
나의 발걸음이 분주하기만 하고.. 이윽고 다다른 곳은 이 건물 지하의 어두컴컴한
영안실입구 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구닥다리 쇼파에 빙 둘러 앉아 고스톱판을 벌이던 염사들
세명이 깜짝놀란 표정으로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아저씨.. 뭐에요???..."
"저.... 오늘새벽.. 들어오신 분... 김민서요..."
"네...."
"저좀.. 볼 수 있어요???..."
"네????... 가족이에요??..."
"얼굴좀 확인하고 싶은데..."
"안돼요!!.. 이안에 들어온 이상.. 염할 때 빼고는 아무에게도 못보여드립니다.."
".............."
다급하게 지갑을 꺼내들어 있는 돈을 끄집어 내었다.
"안쨈募歐?!..이사람이..큰일날라고!!!!... 빨리 나가요!!!..."
"아저씨들!!!!...진짜.. 꼭 좀.. 부탁드립니다..!!!..."
순간 염사 두명이 나를 잡아 끌어 내려 하고.. 이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미친듯 사정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큰일나요!!... 빨리 나갑시다... 네???..."
"제발이요!!!... 이거 놔욧!!!!!!..... 선생님!!!... 아저씨!!!!.. 제발이요.."
"빨리 나가요!!!!... 이사람이!!!..어어???... 어이... 경찰불러!!!..."
"제발... 선생님들!!!....흑흑흑!!!.... 제발 얼굴만 확인만 할께요..!!!..."
"신원 확인하고 싶으면 그건 가르쳐 드릴께요......"
"네???....."
앉아 있던 염사 하나가 흥분을 가라앉힌 나를 보며 서류 하나를 파일안에서 끄집어 낸다.
"730528에 21*****... 본적이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월천리에 **-*번지...."
"........민서누....나......!!!!!!........"
"가족분들에게 말씀하시고.. 발인전 염할 때.. 마지막으로 보내드리세요..."
".....아!!!...이..이런!!!!....큭!!........."
허탈하게 계단을 따라 오른다.
다리에 힘이 없는지... 한발 한발.. 오르기가 버거운 듯.. 핸드레일을 붙잡은 채..
멈춰섰다..
깜깜한 오피스텔..
어느덧.. 신비스러운 밤하늘의 검은빛이 통창안 내 비좁은 공간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어제의 충격으로 침대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하루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낮에 잠깐 들렸던 [현주]가 사다 놓고 간 약봉지가 머리맡에 보인다.
이젠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한다.
그리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민서]누나를 마지막으로 봐야 하니까...
접객들이 몇몇 모여앉은 썰렁한 장례식장의 한켠.. 분향소로 향한다.
[서희]가 친구들과 앉아있다 나를 발견하고 토끼눈을 뜨며 놀란 표정으로 성큼 다가온다.
"...음.. 어제 어머니 못 뵈었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 인사는 드려야 할 꺼 같아서..."
"...........네에..."
영정사진 앞에 섰다.
아름다운 [김민서]가 그곳에서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순간.. 그 소름끼칠 아름다움이 내 머리끝까지 돋아 올랐고.. 나도 모르게 소리없이 눈물이
주르르륵 흘러내렸다.
이곳에 오기전.. 절대 눈물은 안 흘릴꺼라 굳게 다짐을 해버렸건만..
'김민서...너였냐????...이런게 너랑 나랑 행복해 지는 거였니??? 그랬냐고 이 바보야..'
의연하게 떨리는 이를 꽉 감으며 절을 했다.
내 얼굴에 온통 흘러내리는 눈물 콧물에.. 옆에 선 [서희]가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듯 하다.
"흐음... 서희야..미안해... 선생님이 갑자기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흑흑... 아니요..."
내가 너무 눈물을 많이 흘려서인지.. 내 옆을 지키던 [서희]가 따라 울던 눈물을
훔치며 모기만한 대답을 끄집어 내었다.
[서희]와 함께.. 분향소 벽에 마주 앉았다.
어느정도 안정을 취하니.. 이제는 [서희]의 얼굴이 또렷하게 내 두눈에 들어온다.
"......서희......"
"......네에?...."
"그이름..어머니께서 지어준 이름이니??..."
"네에...."
민서.희준.
서희....
이 아름다운 천사의 이름을 [민서]누나가 그렇게 지어주었나 보다.
그렇다면... 내 추측이 맞다면..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민서]누나의
딸은.. 내 딸이다.
[서희]의 나이와 나와 [민서]누나가 사랑을 나눴던 때를 추측하니.. 대충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민서]누나는 내가 대학1학년때..신안 작은어머니댁에서 뛰쳐나와 애를 혼자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해.. 12월.. 군대가기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초췌한 모습일 때.. 이미 갓난아이였던 [서희]를
혼자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천사 [서희]가 내 딸이었다니..
이렇게 대견하게도 자라 주었구나.. 애비도 없이..
[민서]누나의 아픈 일생처럼.. 아빠 혼자 여지껏 살았을 [서희]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나의 천사 앞에서.. 더이상 약한 모습 따위는 보일 수가 없다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내가 그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전부니까..
그리고 이 천사를 앞으로 엄마처럼 살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어머니가 굉장히 미인이셨네.. 서희가 엄마를 많이 닮았구나..."
".........."
"어머니는... 뭐 하셨던 분이셨니??..."
".....미용실 하셨어요..."
"그랬구나... 진작 알았으면.. 하하.. 머리좀 깎으러 갈껄..."
".......네에..."
"내일.. 어머니 발인날이지..."
"네...."
"어디로.. 모실꺼지??...."
"엄마가.. 평소 말씀하신곳이 있어서요... 저한테 당부한 곳으로..."
내가 너 아빠다..!!.. 라고 말하기에는 지금은 시점이 분명히 아니다.
지금 내 앞의 천사가 스스로 내가 자신의 아빠라고 생각되어질 만큼.. 내책임을
다한다면.. 내가 먼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차츰 분위기가 안정되고.. 오고 가는 대화가 많아지자.. [서희]가 슬쩍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근데.....이상하네??..."
"응???....왜???.."
"....호호..그냥.. 두분이 서로 미인이다.. 미남이다.. 막 칭찬 하셔서요.."
"응???.....그게..무슨???..."
".... 사실.. 제가.. 그전에 선생님 강의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병원에서 엄마한테 보여드렸는데요..."
"..!!!!!......."
"..죄송이요.. 너무 피곤해서..병원가서 다시 공부하려구.. 핸펀으로.. 중요한 강의부분.."
"..아냐아냐.....계속.. 계속 얘기해봐... 그랬더니..!!..."
"그냥.. 엄마가 선생님 이름 물어보시고.. 말씀드렸더니.. 한참을 우시면서..
너무 미남이라고..너무 잘생겼다고...."
".............."
또다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흘러내렸다.
하지만.. 의연하게 맘을 다잡고 양복소매로 급하게 눈물을 훔쳐내어 버렸다.
"핫....하하... 정말..그러셨어???... 어머니께서.. 하하.. 사람볼 줄 아시네..."
"...흐음.......호호........"
"그러셨구나..."
".....엄마가요..그래서.. 선생님 사진 계속 찍어달라고 하셔서.. 딱.. 자기 스타일
이라면서요..."
".....하하..."
"그래서... 사진 많이많이 찍어서 보여드렸어요..."
"하하... 나중에.. 내가 저세상에 가면 꼭 어머니께 초상권료 받아내야 되겠는데??..."
"....호호....흐음....."
"..........."
"마지막으로.. 선생님 얼굴 보시면서.. 흑흑...웃으면서..가셨어요... 편안하게...흑흑.."
"..........."
"흑흑흑흑..."
[서희]를 껴안아주었다.
[민서]누나와 나의 금기된 근친의 사랑이 낳은 씁쓸한 결과라기에는 너무나 이쁘고 아름답게
자라버린 내 딸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흐릿한 눈앞을 훔쳐내었다.
'..흑...김민서.. 너.. 나중에 초상권료 안 내놓기만 해봐.....'
접객실 앞..
한무리의 검은 양복을 입은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남자들의 형체가 보였다.
그 일행중에 눈에 익은 남자가 있었다.
'....혹...시?????....'
나와 함께 [민서]누나의 영정사진옆에 앉아 있던 [서희]역시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보더니 흠칫 놀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 남자가 성큼성큼 분향소쪽으로 다가와.. 영정 사진앞에 무릅을 풀썩~ 꿇으며..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들고 있었다.
[민서]누나의 동생인 [재준]이였다.
짧은 머리에 아주 건장한 체구.. 살이 얼마나 붙었는지.. 얼핏 봐서는 모를뻔 했다.
[재준]이와 함께 왔던 다른 거구의 남자들은 접객실 입구앞에 왠 수많은 화원들을
잔뜩이나 가져다 놓느라 분주해 보였다.
[재준]이가 고개를 돌려 젖은 눈으로 [서희]를 매섭게 쏘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이.. 썅...!!!!..."
"........"
[서희]가 잔뜩 불만어린 표정으로 [재준]이의 눈빛을 무시한 채 벌떡 일어나더니
분향소 밖으로 빠른걸음으로 나가 버린다.
[재준]이 녀석은 아직 나를 못알아 보고 있는 듯 멍한 내 표정을 무시한 채
뛰쳐나간 [서희]를 뒤?으려는지 젖은 얼굴을 훔치며 벌떡 일어나
분향소 밖 [서희]를 ?으려 나가려는 찰라였다.
왜 그랬을까??..
이대로 두었다가는 왠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분노한 [재준]이가
[서희]를 그냥 둘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다짜고짜.. [재준]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재준]이 녀석이 그대로 멈춰선 채.. 뒤도 안 돌아보며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나즈막히 깔아 뱉았다.
"셋 셀동안.. 이 개~발 안치우면.. 뒤져블게 쳐맞고 여서 상치룰거시여... 하나.. 둘.."
"재준아......"
[재준]이 녀석이 흠칫 놀랜 표정으로 뒤돌아 보더니 내얼굴을 유심히.. 바라다보더니
금새.. 쌉싸름한 화색이 돌기 시작이다.
"...혹...혹시... 희준이 성님..??..."
"그래... 나다..."
"음마...성님이..!!.... 어쩐일로..!!!...."
"...짜식.. 진짜.. 오랜만이구나....."
접객실의 테이블..
[재준]이 녀석과 소주잔을 주고 받으며 마주보고 앉아있다.
"성님.. 담배 하나 피울라요..."
"....그래..."
"날이 날이니 만큼.. 이해해 주쇼~..."
"...그냥..피워.... 뭘 그런걸 물어봐.."
"뻑.. 후우~....근디.. 성님은 여그 어떻게 알고??..."
"..아.... 서희가 우리 학원 수강생이야.. 내가 학원 강사고......"
"음마??... 그라요????....헛... 하하..."
"...서희의 돌아가신 엄마 이름이.. 민서누나이름이랑 같아서..설마하고 와봤는데...."
"그랬소??..성님 많이 놀랐겠소.... 뻑~ 후우...."
".......그랬지... 뭐..."
이제 나이가 서른넷인 [재준]이 녀석..
아직 장가는 안갔고 무슨 토목사업쪽으로 일을 한다고는 말하지만 함께 온 일행들이나 이녀석의 행동거지를
봤을때 영화나 텔레비젼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조직폭력배 같아 보였다.
거의 20년 만에 만나 반가워야 할 사촌동생이었지만.. 숙연한 자리에서 그저 그동안
살아 온 얘깃거리를 안주삼아 조용히 소주잔만 주고 받고 있을 뿐이었다.
[민서]누나에게 혼이나서 징징짜며.. 또래의 [현준]이와 나와 함께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던.. 그 순박한 [재준]이의 모습은 난데간데 없고.. 무슨 조폭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낯선 [재준]이의 모습에 그저 여간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재준]이 녀석을 통해 [민서]누나가 그동안 나와 헤어진 후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게 되었다.
"훗~..그 씨벌.. 나중가서는 말이여라.. 서울의 어느 대학생놈의 시퀴한테 미쳐불더니..
집까정 뛰쳐나가불고..그 충격으로 어매가 몸저 눕더니만 결국.. 돌가가불고... 니미..."
"....작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
"....그전에는 말이여라.. 큰집에 행사있었을 때 그려도 김가네 새끼들이라고..
나랑 민서누는 함평으로 보냈는디.. 누우가 신안에서 뛰쳐나간 후로는 아예 김가네
근처에 얼씬도 못혀게 했지라.. 그러다보니께.. 어매 돌아가불고.. 연락도 못혔지라..
하필.. 나도 핵교에 쳐박혀 있어서... 벌써 10년도 더됐지라이...."
"...........그..그랬구나...."
작은 어머니께서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니..
뜻밖의 소식에 충격스럽게만 하다.
[재준]이 녀석이 쇠주잔을 집어삼키듯 잔술을 입속에 털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성태성님께서 핵교에 오래동안 가있고.. 누우 아퍼불고 혀서.. 내가 몇번 다녀갔긴
혔소..... 근데.. 저.. 여시같은 년이 지 삼촌 알기를 개~좃으로 알고.. 뭔일 나면
겁나불게 연락혀야 헌다고 누누이 신신당부를 혔건만......"
'....성태???.....'
순간 낯선 왠 남자의 이름이 [재준]이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씨부럴...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디... 나가 누우한테 죄가 많어라...??..."
"....성태형??.. 그사람은 누구..??.."
"아.. 우리 큰형님인디.. 매형이나 마찬가지요.. 저 지랄같은 년 애비지라..."
'...!!!!.......'
"그..그래???..."
순간..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서희]가 [성태]라는 놈의 딸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벌써 한참 전 야그요.. 우리 큰형님이 배부른 누우 많이 챙겨주고..가게도 봐주고 하다가
저 여시같은 년 태어나불고..뭐..훗..나중가서는 뭐...그렇게 됐지라이.."
"아.... 하하.... 그랬구나... 서희한테.. 아..아버지가 있었구나..."
"저년이 그런야그는 안허요???...."
".......... 하하.. 그냥 들어본적이 없어서..."
"훗... 뭐.. 혼인신고는 안혔지만.. 그 머시냐.. 쭈욱~ 크흐으... 사실혼 관계요....."
"..............그랬구나..."
"나가.. 그전에 성님한테 말한적 있는것 같은디.. 함평 큰집에서... 목포 성국이 성님
네 큰형님이 있었다고..."
".........그래??...."
"나가 다리를 놔부렀는디..누우가 싫다고 혀서..큰형님이 사실 누우를 많이 ?아다녔지라.."
"...벌컥~.....크하아....."
"훗... 우리성님.. 핵교에서 을매나 슬퍼할찌..에효~.. 자.. 한잔 받으쇼~..."
"........."
[재준]이 녀석의 핸드폰이 울어대고 있다.
[띠리리리...]
"응.... 나여.... 하여간 상중이니께.. 나가 조만간에 인사드린다 전하고
정중하게 모셔라이??"
[탁!!...]
[띠리리리...]
"응.... 말혀.... 느그들.. 정신못차리냐...하여간에 이~색히들.. 한시간 안에 서류챙겨
사무실에 갔다놔... 씨벌놈아 상중인거 몰렀냐?...그려~이 잡녀르 색히야~!!....끊어!!.."
[탁!!...]
"에이.... 써글눔덜..... 쭈욱...크하아....우걱우걱우걱..."
그동안 내가 모르고 있었던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내가 그동안 내 입장에서만
[민서]누나에 대해 여지껏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내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나역시 여자가 있었으니.. [민서]누나 역시 남자가 없었겠냐만은 이런 험한 세계의
남자와 함께 하면서 그 얼마나 모질고 힘든 삶의 여정을 보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조용히 가슴이 아파왔다.
밖으로 뛰쳐나갔던 [서희]가 잔뜩 어두운 표정으로 접객실입구로 들어오더니..
[재준]이 녀석과 겸상하고 있는 나를 조심스럽게 흘깃 살피며 분향소 안으로 들어갔다.
[서희]를 보자.. 다시금 마음이 아파왔다.
어쩌면 내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쉽게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재준]이 녀석에게 입을 열었다.
".....그럼.. 서희... 성태형인가 그분.. 딸.. 맞는거지??..."
"...그라지라?..."
"..........흐음..."
"...훗..와요??.. 누우가 큰성님이랑 도장콱~찍어불지 않고 살아서 아닌가 했소???
핫..하하... 그럼 우리 누우가 무신 성모 마리아요?? 그냥 애가 태어나불게??....."
머리속이 혼란스럽다.
자꾸.. [서희]가 내딸인듯.. 느껴지고.. [재준]이의 모든 말이 다 거짓말이기를
바랄 뿐이다.
알다가도 모를 세상사..
어쩌면 내가 지금 이순간도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단호한 어조로 [재준]이에게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는데 재준아.. 서희에게 우리가 친인척 지간이었다는 말.. 하지 말아줘라.."
"와요?????...."
"...그냥.. 아직 내가 서희한테 니네엄마가 사촌누나라고 말 하지 않았던것도 있었고......"
"그려요....훗~ 사실 남이나 마찬가진데.... 뭐.. 알겄소.."
[재준]이는 나의 뜬금없는 부탁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왠지 기분나쁘다는 표정을 슬쩍 지어보였다.
[띠리리~]
"응..나여...몇번을 말혀야 알아처묵겄냐. 시뀌야!!!..상중인거 몰라 이색히야??..
니가 알아서 챙기라고..이 씨벌보지야~!!!..."
[탁!!!...]
"에이..씨벌.. 호로색히덜...."
[띠리리~]
"네.형님.... 아닙니다.형님...내일입니다.형님.....아닙니다.형님...알겄습니다.형님..."
모든게 내뜻대로 되지 않고.. 언제나 최악의 길로만 걸어온 내 인생이었으니까..
어쩌면.. 누나는 나를 만나기전부터.. [성태]라는 인간을 만나왔고.. 그 남자에게 채워지지
못했던 그 무언가를 채우기위해.. 나를 만났을 지도 모르는 거였다.
정말 그랬을까???
새삼.. 오래전.. 누나를 만나러 목포로 갔을 때.. 하당의 갓바위공원에서 나에게
냉대를 했던 [민서]누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린 [민서]누나였지만.. 누나와 나와의 어떤 결실이었다고 생각하고
[서희]를 슬픈 누나가 나에게 남긴 희망이자.. 또다른 목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이제는 깊은 허탈감마저 밀려왔다.
"그럼.. 나는 이만 일어나서 오신다는 손님들 챙겨야 허니께.. 성님은 더 드시다 가쇼.."
"아.....그래...재준아..."
[재준]이가 일어나 핸드폰을 귀에다 댄 채 접객실쪽으로 향한다.
접객실입구쪽..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순간 긴장하며 도열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분향소안 [서희]를 바라보았고 [서희]는 나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무언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서희]에게 다가가자 [서희]가 천천히 일어났다.
영정사진속 [민서]누나의 얼굴이 나와 [서희]의 가운데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듯 하다.
"선생님.. 갈께..."
"............"
"어머니.. 잘 모시고.. 나중에 보자.. 알았지??.."
"..........."
대답없는 [서희]와 [민서]누나를 남겨두고 뒤를 돌아서려 하자 [서희]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선생님!!..."
".....응??.."
"...물어볼께..있어서요.."
"..응..말해........"
"저....저희 삼촌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 응.. 그냥.. 뭐.. 이런저런..."
"......저 있잖아요... 그냥이요... 저..."
"....말해..괜찮으니까..."
"..그냥... 두분이서 나눈얘기... 아무한테도 얘기 안해주시면..해서요..."
"...왜??......"
".....그..그냥이요..."
"혹시...니네 아빠가..아빠가 교도소에 있다는게 챙피해서??..."
"....!!......."
"...엄연히 살아계신 아빠인데...그게 그렇게 챙피했으면 차라리 외국에 가계신다고
하면 되는걸 가지고.. 뭐?? 낳기전에 돌아가셨다고??....."
[현주]와 나의 사이를 모르는 [서희]는 휘경여고 학적기록사항에 적힌 내용을
내가 얘기하자 무척이나 당혹스러워 하는듯 해 보였다.
순간 [아차~!!]하며 내가 실수했다는 생각에 서둘러 말을 돌리고 [서희]와의 대화를
서둘러 마감을 지어버렸다.
"아무리 챙피해도 그렇지..!! 흐음..!!.. 하여간.. 알았다... 알았어...."
"............."
여지껏 나도 모르게 격앙된 어조의 말투를.. [서희]에게 내뱉고 있었나보다.
[서희]가 동그란 두눈으로 나를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민서]누나와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얘깃거리만
잔뜩 들어서인지.. 허탈감과 왠지 모를 상실감에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훗... 서희는.. 그냥.. 김민서의 딸이었군......'
[띠리리리~... 띠리리리~]
벨소리가 울리는 휴대폰 액정화면에 [현주]의 이름이 적혀있다.
차에 시동을 켜고.. 무겁게 악셀을 밟았다.
마치 어제와 오늘.. 잠깐동안 꿈을 꾼듯 하다.
모든게 꿈이었으면..했지만.. 그저 씁쓰름한 내 인생의 현실일 뿐이다.
[김민서]는 그렇게 나에게 떠나가 버렸다.
'허무하고.. 바보스럽구나..'
[띠리리리...띠리리리...띠리리리...띠리리리...]
몽롱한 꿈속 사색을 느끼며 운전을 하는데 자꾸 귀찮게 울어대는 핸드폰을
차창밖으로 집어던져버리고만 싶을 뿐이다.
[띠리리리...띠리리리...]
"여부세요..."
[너 어디야??...]
"그냥.. 밖에 잠깐..."
[머야???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않고..나.. 아까부터 니네집에 와있었단 말이야..]
"나 집에 일찍 못가......"
[....뭐????....]
"미안해.. 나중에 가서 얘기할께.."
[..............]
"현주야??....."
[.............]
"............."
[.............]
휴대폰 너머로 [현주]의 울먹임이 또 들려왔다.
지겹다.. 그리고 이런 [현주]의 답답한 마음은 언제나 나를 지치게 만든다.
다음날..
잠에서 눈을 뜨니.. 왠 모텔안이다.
숙취로 인한 어지러움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어제 얼마나 술을 퍼마셨는지.. 머리가 무거울 뿐이다.
흐릿한 기억으로 포장마차에서 미친놈처럼 술을 퍼 마시다가
그만.. 택시를 잡아타기전 삐끼에 걸려들어..유흥업소를 가게 되었는지.. 룸싸롱안에서 업소아가씨와
미친듯 노래부르며 놀던 기억과.. 이곳에서.. [먼저갈께..옵빠~]라는 그 아가씨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으휴....... 씨이~발..... 이런 실수를...!!...."
서둘러 옷가지를 챙겨입고 모텔방문을 나섰다.
지난 모든걸 한꺼번에 다 털어버리기 위해서 술을 택했고.. 진짜 원없이 마셔본것
같았지만..나에게 돌아온건.. [현주]에 대한 미안함과.. 자켓안 구깃한 카드전표뿐이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
[김민서]는 저세상으로 가버렸고...
[김서희]는 내 딸이 아니었고......
며칠후
서해안 고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시원스레 서해대교위를 달리고 있다.
추석전 이맘때쯔음.. 올해도 어김없이 큰집으로 벌초를 가야 한다는 어머니의
전화연락을 받았고 예년처럼 추석때 내려갈껀데 왜 가야 하냐며 짜증섞인 말투를
수화기 너머로 내뱉기도 했다.
습관적으로......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월천리.. 내가 태어난 곳
그리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그리고 고모들이 태어나셨고 큰아버지가
큰어머니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큰집이다.
네살즈음 용접 기술자인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가기전까지
살았다는 곳.
어릴적부터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추석과 설날 그리고 할아버지의 제삿날..
일년에 두세번씩 그렇게 이곳을 찾았었다.
길다란 산자락 아래로 넓은 저수지와 소나무숲이 어우러져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
그리고 나즈막한 야산아래에는 큰집앞 연못과 엉클린 머리칼을 길게 드리운
수양버드나무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떠오르는 얼굴...
김민서..
[민서]..
너무 보고싶다.
'젠장할...결국 이렇게 또 보게 되는거였군.......'
무척이나 아름다운 두눈..
웃을때 유별나게 커다란 덧니와 보조개가 귀여웠던 여자..
그리고 너무나 비쩍 말랐던 몸매..
검고 길다란 생머리..
나보다 두살터울의 [민서]누나는 내가 아주 어릴적 갓난아기때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우리 작은아버지의 큰딸이었다.
운전을 하며 담배를 입에 하나 문다.
어쩌면 지금의 이 벌초가 나에게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연하게 맘을 다잡고 힘차게 악셀을 밟아 어릴적 누나와의 추억들이 녹아스며든
그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큰아버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몇해 후 돌아가셨고.. 큰어머니는 홀로 지내기 힘들 정도로
많이 편찮으셔서 이미 큰집의 큰형이 큰 병원이 있는 광주의 집으로 모셔갔다.
내후년쯤.. 가족납골당을 만들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조상님들을 한곳에 모신다는
계획은 있긴 한데.. 선뜻 나서는 사람은 아직 없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휴대폰의 액정을 보니 [현주]다.
"여보세요.."
[뭐냐? 너??...]
"나?? 김희준이다...."
[지금 장난해??.. 너 어디야??..]
"전라남도 함평군..손불면.."
[월천리..에 벌초하러 간다고??......]
"하하..이번주 아니면 안될꺼 같아서...."
[이번주 약속 펑크내면 죽는다 그랬지??..]
"하여간 운전중이니까.. 끊어.. 이따 도착하면 전화할께.."
[됐어..!!.. 전화도 하지마??...]
내 친구.. 어느덧 조심스레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내애인.. [최현주]
정말 징글징글한 여자이다.
노처녀로 늙어가는게 뭐가 그리도 좋다고 시집도 안가고 여지껏 나를 괴롭히고 있는건지..
나란 인간은 어쩔수 없다해도.. [현주]는 나만 바라보다 지금의 저 지경이 되어 있다는게
너무 불쌍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도 나를 바라보는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사는 역시.. 내맘대로.. 내뜻대로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이미 노처녀의 습성이 몸에 배어 버려.. 지금의 상황을 그냥 즐기며 혼자 사는게
편해서 저러는걸지.. 또 누가 알겠는가..
따지고보면 [현주]는 [민서]누나와 나의 잘못된 사랑의 희생양을 스스로 자처한
멍청한 녀석이다.
그리고 참 웃긴 녀석이다.
이번 벌초만 끝내고 올라가면 꼭 [현주]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결혼을 하고만 싶다.
'그래.. 최현주.. 너랑 나랑은 잘살수 있을꺼야.. 우리 행복하자..'
어느덧 큰집에 도착했다.
큰집의 남아도는 텃밭을 세작하는 이웃 농가에서 그나마 관리를 해주어서 그런지
주인없는 큰집은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담배를 하나 물고.. 고추 밭고랑을 뛰어 넘어 소나무 언덕으로 향한다.
참.. 간만에 이곳에 오르니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저멀리 보이는 우거진 갈대숲과 드넓은 저수지위로 가을의 금빛햇살이 반짝거린다.
[민서]누나와 나와의 사랑을 지켜봤던 소나무..
그리고.. 그 아래 시든 국화한다발...
[서희]가 이곳에 왔었던게 분명하다.
'결국..예감대로 여기였군...그래~김민서.. 너는 나를 사랑했었던게 맞아...
내가 너를 사랑했듯이...'
이곳에 오기전 [재준]이 녀석에게 전해들은 얘기도 있고 해서
긴가민가.. 무척이나 심란했었는데.. 왠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꼭..
지금은 널 만나러 가고 싶어도.. 눈에 밟히는 녀석이 있어서 못간다.. 이해해줘라..'
수줍게 우리를 바라보던 야심한 초승달 아래의 이 언덕위에서 [김민서]와 함께
뜨겁게 타올랐던 섹스..
그리고 너무나 철없었지만 아름다웠던 사랑의 추억들..
씁쓰름한 기분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게으른 민준이형은 분명히 또 이번 벌초에 안올것 같은데.....'
그때였다.
"선생님..??..."
"......!!!...."
뒤를 돌아다보니.. [서희]가 놀란 두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전 이곳에 수목장을 하러 다녀갔을 녀석이 아직까지 여기에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지만.. 내가 여기에 왔다는걸 이녀석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순간.. 난감하기만
했다.
"...선생님...여기.. 어쩐일로..??..."
"아니..!!.... 너야 말로.. 여긴 왜??...."
[서희]와 함께 소나무 언덕 아래에 앉아 머나먼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가 평소 말한 곳이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묻어 드렸어요.."
"....그랬구나..."
"호호... 흐음... 엄마랑 선생님이랑.. 같은 동네 사셨어요??..."
"하하... 뭐.. 나는 여기서 태어나기만 했지.. 사실 서울에서만 자라서..
니네 어머니 전혀 몰랐지.. 아마.. 니네 어머니도 나를 전혀 모르실꺼야.."
"..........."
"근데.. 너 왜 안올라가고.. 여지껏 여기에 있었냐??.."
"어차피.. 이번주까지 학교 안가도 되는데요.. 그냥.. 혼자 올라가 있기도 그렇고 해서요.."
"그럼.. 저 밑에 집에서 계속 혼자 잔거였어???..."
"그저께까지는 삼촌이랑 같이 있었는데... 어제부터는 혼자있었어요.."
"하하..그랬구나..너가 자던..니네 엄마 큰집..그집에서 예초기랑 낫좀 얻으려 했었는데
잘됐네....."
[서희]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어제 [현주]를 통해 전해들은 얘기로는 우악스럽게 생긴 [서희]네 삼촌이 학교로 들이닥쳐
[서희]를 목포쪽으로 전학을 시키겠다며 서류절차를 밟아갔다는 것이다.
[서희]는 아마 그런문제로 이곳에 혼자 남아 있는게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해서 큰집을 혼자 지켰던 [서희]의 의아스러운 눈빛을 피해 농기구가 쌓여있는
창고안을 뒤적거려 예초기와 갈퀴, 낫 등을 챙겼다.
장비를 챙겨 산으로 오르려 하자 [서희]가 괜찮다고 해도 자꾸 돕겠다며 따라 나선다.
뒷산 중턱까지 올라야 하는 길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데.. 심심해서 그런다는데
궂이 말릴 필요까지는 없어 보여 함께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수풀을 해집고 바위위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서희]가 난감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여 손을 뻗어 [서희]를 잡아 올려주었다.
이동네 야산들은 높이가 낮은데반해 인적이 드물어 산길이 전혀 없다.
[서희]는 엄마의 상을 치루느라 생고생을 했을텐데 비교적 활발한 표정이다.
내가 오기전까지 무척 외롭고 심심했나 보다.
덮수룩한 잡초가 수북히 덮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조상님묘-1 이 눈앞에 나타났다.
[부따따따~ 부르릉~!!!!]
"서희야!!... 돌튀니까.. 절루 가..!!.."
"네에??... 안들려요..."
"돌튀니까..!!.. 절루 가라고..!!..."
"네!!!...."
예초기의 커팅날이 힘차게 돌아가며 잡초들을 순식간에 베어내기 시작이다.
[서희]는 멀찌감치에 서서 갈퀴를 든 채.. 내쪽을 바라보고 있다.
언젠가는 나와 자기네 엄마 사이가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부따따따~....]
뒷산쪽의 묘소들의 벌초가 끝나고 하산을 하고난 후 큰집 창고안에서 장비를 챙기고 있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이시간에는 언제나.. 그냥 갈까.. 내일갈까.. 망설였지만
오늘은 그냥 서둘러 올라가야만 할 것만 같았다.
[서희]와 단둘이 있는 왠지모를 불편함도 있고 지금쯤 잔뜩 뿔이난 [현주]를 달래주고
하려면 어쩔수 없어 보인다.
"저.. 선생님.. 제가요.. 저녁 금방 차릴께요.."
".... 그냥 올라가면서 휴게소 들려서 때울께.."
"...오늘 올라가시려구요??...."
"...그럼..가야지..."
"오늘 주무시고 내일 올라가시면 안되여?? 선생님??..."
"............."
[서희]가 무척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간 내가 여지껏 보아왔던 [서희]의 표정들 중에 가장 슬픈 천사의 모습이 느껴졌다.
'아.. 진짜.. 왜 이럴까...'
[민서]누나의 딸이니까..
[민서]누나를 닮은 얼굴 때문에 여지껏.. 저런 모습을 보며 주체하지 못하고 빠져들었지만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은 그런류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시무룩한 [서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왜??.. 수학문제 안풀리는거라도 있어??...."
"네에~!!!..."
[서희]의 표정이 금새 밝아졌다.
하얀 얼굴에 보조개가 금새 생기면서 어금니쪽 덧니가 보일듯 말듯한 환한 미소가
내앞에 펼쳐졌다.
땅거미가 짙게 깔리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밤하늘에 깜깜한 어둠이 번져간다.
[서희]는 혼자 주방쪽에서 분주히 저녁준비에 한창이다.
안방벽에 기대어앉아 tv를 켜둔채 [현주]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다.
[--아직도 화났냐?]
[아니??내가왜??]
[내일 올라가서 우리 현주 맛있는거 사줄께~ 화풀어]
[됐거든요??너나실컷사드시죵]
[됐으면 시집이나 가라고 했지?]
[니가아주매를버는구나???올라오기만해봐??]
"큭큭큭......"
어느덧 저녁준비가 끝났는지 주방쪽에서 [서희]가 조심스럽게 밥상을 들고 높은 문턱을
오르려 하자 벌떡 일어나 [서희]의 두손에 쥐어든 밥상을 받아주었다.
"어이쿠... 조심조심.. 선생님이 들께.."
"호호..괜찮은데..."
큰집의 안방에서 시골밥상앞에 [서희]와 나란히 마주앉았다.
김치찌게와 밥,김치와 김,계란후라이,고추장과 상추가 놓여진 조촐한 밥상이었다.
"이야~ 서희 다컷네에??... 진수성찬이야~..."
"호호.. 아니요.. 반찬이 별로 없어서요..쫌..민망한데여.."
"우와.. 김치찌게.. 니가 끓인거냐??.. 쩝~!!.. 와!!.. 맛있다.."
"........"
나의 오버칭찬에 [서희]가 무척이나 얼굴이 빨개진다.
뽀얀 얼굴에 그동안 묶어올렸던 머리가 길게 풀려진 [서희]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며 밥을 먹고 있다.
[서희]의 얼굴에는 더이상 [민서]누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읽혀지지 않는다.
그저 약간의 피곤함과 학원선생과의 우연한 만남에 대한 호기심어린 눈빛이 느껴진다.
[서희]입장에서도 투병생활중인 [민서]누나를 삼년이 넘게 병간호를
하면서 그동안 나름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는 그런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슬픔과 그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라는것도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탐탁치않게 여기는 삼촌을 따라 목포로 전학을 가야한다는 현실에
[서희]는 그리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음주부터.. 학원 공부도 열심히 다시 시작하는거 알지??...."
"...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학원은.. 다니지 않으려구??.."
"... 저.. 사실.."
"...사실.. 왜??.... 괜찮으니까.. 말해봐..."
"....흐음.. 그냥... 학교공부만 하려구여..."
[서희]는 목포로 전학을 가야한다는 얘길 하기가 싫은 모양이다.
조폭두목같은 [재준]이 녀석외에 돌볼 사람도 가족도 없는 [서희]의 앞날이
슬슬 걱정이 되었다.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 슬며시 입을 열었다.
"이런얘기해서.. 쫌.. 미안한데... 아버지.. 언제 출소하는지.. 아니?..."
".............."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쥐어든 쇠젓가락 한쌍이 밥알을 깨작깨작거리던 도톰하고
불그스름한 [서희]의 입술에 물린채 멈춰서자.. 온세상이 쥐죽은 듯 멈춰버렸다.
괜한걸 물어봤구나 라는 생각에 지금 이순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스러움이 밀려왔다.
"..하하... 미안.. 괜히.. 내가.. 쓸데없는 걸.. 또 물어봤네..."
"..그인간 우리아빠 아니에요.."
"....???...."
"그인간.. 엄마 때리고.. 나도 때리고.. 나랑 엄마가 이사가서 살면..
어떻게 알았는지 또 찾아와서 우리 괴롭히고.. 완전 짐승이었어요.."
순간.. [민서]누나의 얼굴이 확 스쳐지나면서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린 딸을 혼자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이제는 제법 가라앉았던 [민서]누나의 바다가 다시 내 가슴속에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무기력한 폐인처럼 지냈던 그 긴~ 인생의 공백기 동안 [민서]누나는 [서희]를
이렇게나 곱게 키우면서 억척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 그랬구나.."
"그리고 엄마가 말했어요.. 그인간은 제 친아빠 아니라구요.."
[서희]의 짧고 단호한 어조에 순간 굵직한 무언가가 가슴속 웅덩이에 풍덩~빠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