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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는 거야. 네가 아직도 날 탐내는 것부터가 우스운 일 아냐?”







엘리제는 그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달려드는 꼴이라니. 발정 난 ■■■ 같아.”



“더 해봐. 네가 날 경멸할수록 난 기분이 좋아지거든.”







행위를 암시하듯 그가 뭉근히 허리를 돌렸다.







“느껴져? 지금 싸기 직전인데.”







어찌나 질질 흘려댔는지 바지를 적신 쿠퍼액이 엘리제의 실내용 드레스까지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아, 좀…!”







신경질적으로 발길질을 해봤자 소용없었다. 중심을 잃어 제 몸만 기우뚱 기울었을 뿐이다.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한 그녀를 그가 재빨리 낚아채 침대 위에 올렸다. 손목을 휘감고서 내리누르는 꼬리 때문에 엘리제는 버둥거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알아서 누워 주니 좋은데?”







입맛을 다시며 그가 그녀 위에 냉큼 올라탔다. 얇은 옷감 너머 그의 것이 다리 사이에 꾸욱 눌렸다. 그녀의 종아리로 손을 내린 그게 드레스 끝자락을 쥐고 들어 올렸다.







“비켜! 나중에 실컷 하면 되잖아!”



“이놈 옆에서 할 수 있는 기횐데 굳이 미룰 필요 있나?”



“어차피 여기에 있지도 않아! 해봤자 볼 수도 없다고!”



“알아. 나도.”







그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그냥 너 좋으라고 하는 거야. 이놈 얼굴 보면서 섹스하면 아주 짜릿하지 않겠어?”



“이 변태 ■■!”



“칭찬해 줘서 고마워.”







그의 얇고 붉은 입술이 가까워지는 걸 보고 엘리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만 욕설을 퍼붓고 싶은데 그래 봤자 변태 놈 흥만 돋우는 꼴이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얌전히 있다가 키스하려 들 때 콱, 그의 입술을 물어뜯으리라 마음먹었다.







아랫입술이 너덜너덜 잘려 나가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지 두고 볼 것이다.







“…….”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의 입술이 제게 닿질 않았다. 게다가 양쪽 손목을 옭아맸던 꼬리 힘도 느슨해지는 게 아닌가.







슬그머니 눈을 뜬 엘리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블레이크가 렉스의 뒤편에 서서 그의 목을 팔로 휘감아 조르고 있었다. 렉스가 컥컥거리며 그의 팔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제만 바라볼 뿐이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나온 말이 고작 그런 거였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세계가 멈춰 버린 지금, 카인마저 잠들어 그저 등장인물 중 하나가 되어 버린 블레이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게다가 렉스는 누가 뭐래도 악마다. 인간이 어떻게 악마를 순수한 힘만으로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아내를 지키는 건 남편의 의무입니다.”







기어코 악마를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친 블레이크가 엘리제를 부축하여 일으켜 주었다.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돈해 주고 머리칼을 매만져 주는 손길이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젠 이런 삿된 것마저 부인을 탐내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군요.”







침을 질질 흘리며 한동안 켁켁대던 렉스가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저 미친놈이.”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렉스에게 다가간 블레이크가 그의 가슴팍을 발로 콱 짓눌렀다.







“틀린 말은 아닌데, 너 따위 것에게 듣기엔 기분이 좀 나쁘군.”



“그래? 그거 참 잘 됐는걸. 이제 네 여자가 내 소유가 되는 걸 보게 될 테니 말이야.”







그리 말한 렉스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뭘 하는 거지? 마법이라도 쓰려는 건가?”







정확히는 뻗으려다 제지당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손을 뻗는 행위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었다.







“마법 따위완 달라. 엘리제와 나의 관계를 증명하는 계약서지.”



“계약서?”







블레이크는 미간을 찡그리며 파라락 펼쳐진 기다란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자, 엘리제. 이제 계약을 이행해야 할 시간이야.”







두루마리에서 튀어나온 둥그런 고리가 빙글빙글 돌며 엘리제에게로 향했다. 불길함을 느낀 블레이크가 쳐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잡히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그를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녀의 목에 닿는 순간이었다.







쩌정!







수십만 개의 파편이 된 그것이 허공에 흩어졌다.







“무슨…!”







깜짝 놀란 렉스가 눈을 부릅떴다. 산산이 부서진 건 고리만이 아니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두루마리까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대체 왜…! 어째서…!”







왁왁 내지르는 소리에 대답한 건 엘리제도, 블레이크도 아니었다.







“나와 먼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지.”







무뚝뚝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침대 위를 향했다.







“그녀는 나의 계약자야. 그렇지, 엘리제?”







침대에 앉아 저를 바라보는 카를리아즈의 모습에 엘리제는 여러 번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그는 마치 잠깐 졸다 깨어난 사람 같았다. 얼핏 보면 그 정도로 태연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 가득 차오른 벅찬 감정을 그녀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속내와 달리 흘러나온 말은 타박에 가까웠다.







“게으름뱅이. 잠이랑 원수라도 졌어요?”



“엘리제. 형체가 없는 것과는 원수가 될 수 없다.”







엘리제는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어련하시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랬으면 애초에 계약이 성사될 리가….”







망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렉스에게 카를리아즈가 덤덤히 설명해 주었다.







“발효되기 전이었으니까. 이 계약이 효력을 얻으려면 세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를 충족하는 순간 모든 계약에 우선하게 되지.”



“설마….”







렉스는 신의 사랑을 받는 이만이 작성 가능한 금빛 계약서를 떠올렸다. 하늘의 언어로 완성되어 계약 당사자는 물론 누구도 읽을 수 없는. 그래서 신에 대한 오롯한 믿음만으로 체결되는 절대적인 계약.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의심 많고 까칠한 엘리제가 금빛 계약서에 서명하다니. 그 정도로 저 빌어먹을 놈에게 의지하고 신뢰하였던가 싶어 기가 막혔다.







“할 수 없지.”







바드득 이를 갈며 그는 저를 짓밟고 선 블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카인 리베르토를 구하려던 엘리제의 수고가 소용없게 됐군. 그러면 난 원래 내 계약자의 영혼만 회수해 가겠다.”



“아니. 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어. 내기에서마저 패했으니까.”



“뭐? 그럴 리 없어!”







그는 황급히 또 하나의 계약서를 불러왔다. 그리고 계약서 최하단에 적힌 문구를 보고야 말았다.







『내기가 끝났습니다. 승자 카인 리베르토에게 내기의 보상을 지급하세요. 기간 내 이행하지 않을 시 강제 집행됩니다. (남은 기간: 7일)』







“어떻게… 이런….”







믿을 수가 없었다. 평생 그 누구도 사랑한 적 없던 엘리제가 카인 리베르토를 사랑하여 영원히 그와 함께하길 맹세했다니. 개소리가 따로 없었다.







“뭐야? 내기의 조건이 뭐였는데? 나도 좀 보자.”







궁금한 듯 엘리제가 기웃댔다. 그 모습을 보자 렉스는 더욱 억울하고 화가 났다.







“안 가르쳐 줄 거야!”



“졌으면 졌나 보다 해야지 왜 성질이야.”







완전히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이 순간에도 저리 입술을 비죽대는 엘리제가 탐이 나 미칠 것 같았다.







“더러운 윗세계! 개 같은 카인 리베르토!”







온갖 욕설을 퍼부었으나 끝끝내 모든 일의 원흉인 엘리제 욕만은 할 수 없었다. 그녀를 욕하느니 차라리 저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는 게 나았다.







“이봐. 볼일 끝났으면 남의 성에서 행패 부리지 말고 어서 사라져.”







블레이크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비켜 줘야 가지.”







억울하고 분했지만 지금 그는 내기에 진 패자에 불과했다. 선심 쓰듯 블레이크가 옆으로 비켜나 주었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 렉스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지하세계로 통하는 새까만 홀이 바닥 한편에 나타났다.







발을 들이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엘리제를 돌아보았다. 이 순간에도 그녀는 너무 예뻤다. 모든 게 그의 이상형에 부합했다. 이기적이고 못돼서 더욱 매력적인 영혼까지.







렉스는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또 보러 올게, 엘리제.”



“안 와도 돼. 잘 가, 렉스.”







엘리제는 빙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미적대는 렉스가 답답했는지 새까만 홀이 스스륵 움직여 날름 그를 집어삼켰다. 그러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엘리제의 얼굴에서 지어 낸 미소가 사라졌다.







끝났다.







한 가지 생각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던가. 눈물 없인 회상할 수 없는 마음고생, 몸 고생이었다. 이 모든 게 허사가 될까 봐 최근 얼마간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카인의 영혼을 지하세계에 데려가야 할까 봐 초조하고 불안했었다.







그러나 이젠 모두 끝났다. 믿을 수 없게도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그린 듯한 미소 대신 괴상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아아…. 정말….”







침대에 털썩 걸터앉아서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늘 강한 척하고 여유로운 척했지만 사실 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얕보이지 않기 위해 잔뜩 몸을 부풀렸을 뿐이다.







그래도 무사히 끝났으니 되었다. 이것으로 제 모든 발악이 무용치 않게 된 것이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가련하게 어깨를 떠는 그녀를 보며 블레이크와 카를리아즈는 안절부절못했다.







곁에 앉은 블레이크가 살며시 엘리제의 어깨를 감쌌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잘 해결된 것 아닙니까.”







제게 기대게 하곤 도닥여 주었다.







“클랜튼 경도 깨어났으니, 앞으론 좋은 일만 생길 겁니다.”



“그래, 엘리제. 다시는 네가 위험에 빠지는 일 없을 거야.”







카를리아즈도 열심히 그녀를 달래 주려 노력했다.







“고마워요, 두 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그녀가 웅얼댔다.







어느새 어깨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숨소리 또한 평온해지자 블레이크와 카를리아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늘 함께야.”







카를리아즈의 말에 블레이크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건 남편인 내가 할 말이지.”



“어쨌든 함께 있는 건 함께 있는 거지.”



“한참을 자고 일어나더니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좀 떨어지지 그래.”







아직 카인의 영혼이 잠든 걸 모르는 카를리아즈는 블레이크와 한참이나 티격태격하였다.







그들의 말소리를 엘리제는 멍한 정신으로 들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몸이 노곤노곤했다. 제대로 자지 못해 쌓였던 피로감이 한 번에 몰려왔다.







‘잘까….’







엘리제는 길게 하품을 했다. 새벽녘에 멈추어 버린 시간이 다시금 흐를 때까진 어차피 할 일도 없었다.







카를리아즈는 그녀의 계약자가 되었으니 어디로도 갈 리 없고 카인과도 언제까지나 함께 있기로 약속했다. 어떻게 카를리아즈가 돌아올 수 있었는지, 세 가지 조건이란 건 뭐였는지, 블레이크는 어떻게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지 등 궁금한 게 정말 많았으나 조급할 것 없었다. 앞으로도 알아갈 시간은 충분하니까.







엘리제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스르르 내리고 블레이크의 품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그의 어깨는 단단하지만 안정감 있어, 기대어 자기 딱 좋았다.







“…엘리제?”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블레이크와 카를리아즈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희열에 떨었을 뿐, 어차피 운 적 없어 말끔한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자는… 겁니까?”



“설마 그냥, 이대로…?”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내일이 시작될 것이다.







실컷 자고, 온갖 맛있는 걸 먹고, 돈 많은 백수처럼 사치하며 놀 것이다. 생전에 못다 한 몫까지. 이제는 초조해하며 시간에 쫓길 필요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 필립에게 약속받은 것도 있겠다, 꽤 마음에 든 이 세계에 오래오래 머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다음 목표가 생기지 않을까.







그때까진 임무고 뭐고, 수고한 저 자신을 위한 긴긴 휴가의 시작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