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하고도 냉혹한 경고였다.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던 이들도 이제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패배를 모르는 프로이젠의 군주, 블레이크 프로이젠이었다.
글로리아 성에 걸린 깃발도, 평야를 덮은 군대의 깃발도 프로이젠의 것이었다. 병력의 열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절그렁, 철컹. 가장 가까이에 있던 누군가를 시작으로 병장기를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글로리아를 점령한 대공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을 가로질렀다. 성문을 활짝 열어젖힌 클로드가 환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시나리오 속 주무대는 아닐지라도 몇 줄에 걸쳐 서술될 내전의 종막이었다.
엄호하듯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용이 조금 더 높이 떠올라 내성을 향해 날았다.
“어떻게 됐어요?”
기절 직전의 엘리제를 안고 테라스로 뛰어내린 메리가 사라에게 물었다. 실시간으로 변해 가는 화면 속 그래프를 주시하던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기는 넘겼어.”
“아아, 다행이다. 엘리제 님! 우리가 해냈어요!”
“…그래. 알았으니 나 좀 내려 주렴.”
“앗! 네…!”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침대 위에 풀썩 누운 엘리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죽다 살아났단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가까스로 의식을 잃지 않고 버틴 것은 순전히 강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일의 결말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기절할 수 없었다.
잠시간 시체처럼 누워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킨 엘리제가 힘없이 반지를 두드렸다.
『시나리오 완성률: 90퍼센트(수정 중) / 세계의 균열: 78퍼센트』
세계가 온전하다면 발도 들이지 못할 정도의 고위급 악마와 싸우고 있을 카를리아즈가 몹시도 걱정됐다. 그를 믿지만, 마음속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새끼손가락의 꽃반지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대로 시나리오가 끝나면 자신은 어찌 될지 모른다. 카인과 함께 지하세계에 떨어지게 되면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 혹은 작별 인사 정도는 해두었어야 했나. 후회되었다.
지켜보는 와중에도 균열도는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작스레 60퍼센트까지 훅 떨어졌다.
“오오! 요원님이 이겼나 봐요!”
“방금 주인공 커플이 황제를 죽였어요!”
“꼴좋다, 악마 놈!”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내기가 어찌 되든 당장엔 블레이크도 무사했고 시나리오도 얼렁뚱땅 잘 마무리될 것 같았다. 아마도 잠깐 잠들었다 깨어나면 카를리아즈 역시 곁에 돌아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고했다고 마지막으로 안아 줘야지.’
조사관들의 즐거운 환호 소리를 들으며 엘리제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황제궁이 있던 자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고대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팔 한 짝을 주워 들었다.
“빌어먹을. 사사건건 훼방이야.”
세계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회를 놓쳤을 뿐 아니라 본체에 심각할 정도의 해를 입고 말았다. 최소 몇백 년은 꼼짝 못 할 걸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규칙을 어긴 대가다.”
카를리아즈는 덤덤히 대꾸했다.
“무슨 놈의 규칙!”
“모르겠다면 네 뒤의 집행관께 여쭤 보도록.”
집행관이란 말에 화들짝 놀란 악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단정한 슈트 차림에 두꺼운 책을 든 남자가 지척에 서 있었다. 반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너덜너덜하게 찢긴 날개로는 세계를 빠져나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집행관이 아무렇게나 내던진 둥그런 고리가 악마의 목에 휘감겼다.
“컥…!”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범법 행위가 기록된 고발장이 접수되었으므로 연행한다.”
갖은 저주와 욕설을 퍼부으며 목을 부여잡고 버둥대던 악마는 기어코 집행관의 두꺼운 책에 몇 대 얻어맞곤 시커먼 홀로 빨려 들어갔다. 이 세계에서 완전히 추방된 것이다.
구겨진 책을 갈무리한 집행관이 홀로 남은 카를리아즈에게 다가왔다.
“어휴,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그냥 잡아 두기만 할 것이지 왜 굳이 네가 나서선.”
카를리아즈의 몰골은 악마 못지않았다. 날개도 여러 쌍 찢겨 사라졌고, 성한 곳이 없었다.
“화가 나서요.”
“뭐?”
집행관은 잘못 들은 줄 알고 눈을 끔뻑였다.
“복수…라고 하던가요. 갚아 주고 싶었어요. 어떻게든.”
한참 동안 그를 쳐다보던 집행관이 시선을 돌려 폐허가 된 사방을 훑어보았다. 황제의 심장을 찌른 주인공 커플.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잠든 듯 쓰러져 있는 루카스 클랜튼의 육체. 그 외엔 특별할 게 없었다.
자그마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길 바랐으나 무용했다.
“그래. 자세한 얘긴 가서 하자. 더는 여기 머물 수 없어.”
균열이 매워져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건 메피스토펠레스뿐만이 아니었다.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본래의 모습으로 강림한 카를리아즈 역시 여기서 나가야만 했다.
집행관이 그의 손을 잡았다. 당연히 재깍 따라나설 줄 알았던 카를리아즈가 질질 발을 끌었다.
“응? 왜 그러니?”
“…….”
카를리아즈를 돌아본 집행관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졌다.
“…칼?”
그에게서 절대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500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보고 가르쳐 온 만큼 몹시도 당혹스러웠다.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었다.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던 집행관이 윗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일단 가자. 응?”
가만히 서 있는 카를리아즈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겨우 정해진 시간 내에 환상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고 돌아선 집행관은 멈칫 굳어 버렸다.
문조차 사라진 눈부신 백색의 공간에 우두커니 서서 바닥만 바라보던 카를리아즈가 너덜너덜한 옷소매로 눈가를 가렸다.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눈물을 훔치고 또 훔치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엘리제…. 엘리제….”
“얘…. 얘야….”
카를리아즈의 복귀를 기다리던 집행관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고 온 윗세계가 떠들썩해질 때까지 그 누구도 그의 눈물을 멎게 하지 못했다.
***
마왕에게 혼을 판 황제를 처단한 2황자가 황위에 오르며 제국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에릭은 딜런 클랜튼을 키세프 섬에 유배하고 이번 일에 공을 세운 루카스 클랜튼에게 후작위를 계승토록 했다. 폐태자 렉스 러셀은 마력의 근원을 금제당한 채 구금되었고, 슈만 크롬벨과 글로리아 후작을 위시한 황제파 귀족들은 작위를 몰수당했다.
중간지대 조사관들 역시 시나리오를 온전히 마무리 짓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을 꼼꼼히 채워 넣고 두 주인공이 제자리를 찾도록 암암리에 도왔다.
시에나는 본인의 소원대로 라우디아 백작가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황후궁의 시녀로 일하게 된 것이다. 나름 적성에 맞는지 얼굴이 환하게 폈다.
어쨌든 로맨스가 완전히 배제된 탓에 ‘기획의도’ 달성률은 50퍼센트에 그쳤다. 그나마 권선징악이 완벽히 실현돼 다행이었다. 카를리아즈의 의도대로 지하세계 측에 모든 책임이 전가됐으므로 중간지대 조사관들은 마냥 희희낙락했다.
그런 중에 웃지 못하는 건 엘리제 하나였다.
지하세계의 밑바닥을 구르며 안 그래도 약해졌던 카인의 영혼이 악마의 진명을 내뱉은 대가로 큰 타격을 입어 깊은 잠에 빠지고 만 것이다. 엘리제가 의식을 회복했을 땐 생전의 그녀도, 함께하기로 한 약속도 모두 잊은 블레이크만이 존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제를 처단한 날부터 의식불명 상태였던 루카스 역시 여태 깨어나지 못했다.
엘리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타락한 연인>이 끝나 가는 걸 지켜보았다. 시나리오 완성률이 100퍼센트에 도달하는 날, 악마가 그녀를 찾아올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