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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그러다가 폭우가 내렸고 몇 분 뒤엔 쨍하니 맑아졌다. 갑작스레 어둠이 찾아오고 우박이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금 날이 개며 해가 떠올랐다.







그게 고작 몇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대륙 전역이 멸망의 징조에 휩싸였다.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조차 두려움에 떠는 마당에, 전장의 한복판에 선 이들은 오죽할까. 도를 넘어선 두려움이 살육의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피아의 구별 없이 아무렇게나 칼을 내질렀다. 어느 순간엔 반짝 정신이 들기도 하였으나 살기 위해선 다시 또 타인을 해쳐야 했다.







“미치겠네. 아직이에요?”







키보드를 두들기며 사라가 물었다.







“네, 아직입니다.”







밖을 내다보는 피터 역시 극도로 초조한 표정이었다. 간신히 80퍼센트로 막고는 있었지만, 슬슬 한계였다. 뭔가 극적인 반전이 필요했다.







그때였다. 독수리로 변해 성벽까지 나가 있던 쿤이 쌩하니 날아 들어와 소파에 처박혔다. 허우적대던 것도 잠시, 재빨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소리쳤다.







“왔어요!”



“정말?”



“네! 외성 밖 평야가 병사들로 새카매요! 프로이젠의 군사예요!”







사라는 키보드도 내팽개치고 테라스로 달려 나갔다. 지금은 제가 한두 문장 더 치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 했다. 도저히 수습될 것 같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테라스 난간을 짚은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쿠구구구궁.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저 멀리 새까만 점 하나가 나타났다. 그러곤 오래지 않아 지평선을 새까맣게 채웠다.







족히 만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었다. 이 많은 수를 마법진을 이용해 건너오게 했으니, 2황자 측 마법사들은 지금쯤 모두 탈진하지 않았을까.







주군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소식에 프로이젠에 남아 있던 두 개 기사단이 모두 출격했다. 황색과 백색 방패 문양이 수놓인 검푸른 제복의 기사가 수백이었다.







그러나 사라의 시선은 지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글로리아 성 앞 평야의 상공을 거대한 용이 유려하게 선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쐐액.







각각이 건물 한 채만 한 날개가 공기를 찢어발겼다.







그 위에 올라탄 이들의 면면을 확인한 사라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엘리제 님이야! 메리가 엘리제 님과 대공님을 모시고 왔어!”



“정말요?”



“아아, 저거 승차감 장난 아닌데. 쿤, 네가 좀 가 보렴. 엘리제 님이 괜찮으실지 모르겠구나.”



“알겠어요!”







고개를 주억거린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테라스 너머로 날아올랐다.







“어떻게든 시간을 맞췄군요.”



“그러게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사라는 내팽개쳤던 키보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지르던 황태자 측 군사들과 중립 측 군사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춘 상태였다. 날카롭게 내지르는 용의 포효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든 것이다. 불가항력의 공포가 전쟁의 광기를 덮었다. 포식자를 마주한 연약한 초식동물처럼 오들오들 떨며 꼼짝하지 못했다.







프로이젠의 군사들 역시 움직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진격하려 해도 겁을 집어먹은 말들이 꼼짝하지 않았다.







평야를 넓게 선회하던 용이 멈춰 서 날갯짓하며 고고히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용의 몸통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쿵!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십여 미터는 될법한 상공에서 거리낌 없이 뛰어내린 남자가 굽혔던 무릎을 펴고 몸을 바로 세웠다.







당장엔 움직이지 않는다 한들 무기를 든 천여 명의 병사가 불과 몇백 미터 앞에 있었다. 또한 등 뒤엔 프로이젠의 군대가 당장이라도 성을 향해 진격할 듯 흉흉한 기세를 뿜어대고 있었다.







그러나 검 하나 없이 그들 사이에 홀로 선 남자는 위축되기는커녕 위압감을 흘리며 모두를 침묵케 했다.







프로이젠 기사단의 선두에 있던 이가 그를 향해 쏜살같이 말을 달려왔다. 다섯 걸음 뒤에 멈춰 서 말에서 내리곤 무릎을 꿇어 자신의 검을 바쳤다. 남자는 당연하단 듯이 기사단장이 바친 검을 취했다.







말에 오른 남자가 성 앞 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검푸른 머리칼 아래 새파란 눈동자가 싸늘했다.







“항복하라.”







마법사 없이도 그의 목소리는 평야 끝에서 끝까지 울려 퍼졌다.







“자비를 바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