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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어 보이려니 자연히 그렇게 됐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그의 소원과 같았다.
만약 내기에서 이겼다면 말할 수 있을 터였다. 평생 너 하나 사랑하였고, 지금도 목숨처럼 사랑한다고. 첫사랑이며 마지막 사랑이라고 말해 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불가했다. 지금은 그리 말해선 안 됐다.
그는 처음부터 제가 악마와의 내기에서 이길 수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바랐던 건 그저 하나였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의 남자로 살아 보고 싶었다. 고작 몇 개월뿐이라도 좋으니 그렇게 지독하도록 달콤한 순간을 영원히 끌어안고 싶었다.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그는 지하세계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일 분이 백 년 같은 그곳에서 찢기고 태워지며 망가진 채 바닥을 기었다. 오늘 겪은 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런 끔찍한 곳에 엘리제를 데려갈 순 없었다. 절대로 그럴 순 없었다.
그녀는 살인자에 불과한 저와 함께 있어선 안 된다.
이제부터라도 행복해야 했다. 고단한 과거의 삶을 보상받아야 했다. 선량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욕심이 나서. 엘리제의 말대로 저는 못되고 이기적이라서.
그녀를 이대로 바라보고 있다가는 저도 모르게 애원하게 될까 봐, 피로한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어떻게 욕심내.”
최선을 다해 덤덤히 내뱉고자 했음에도 말끝이 흔들렸다. 우스울 노릇이었다. 제 손에 들어온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 블레이크 프로이젠이란 인물 뒤에 숨어 그녀를 마음껏 탐하고 소유하고 집착하였으면서 이제 와 놓아주는 척이라니.
잠시간 침묵하던 엘리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단 말이지? 넌 나 없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거네?”
“…….”
“잘됐네. 그럼, 잘 지내. 지하세곈지 어딘지는 나 혼자 갈 테니까.”
“뭐? 네가 거길 왜 가?”
번쩍 눈을 뜬 그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나도 악마랑 계약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불안감이 깃든 그의 다급한 질문에 엘리제가 방긋 웃었다. 제 안의 누군가에겐 마냥 천사처럼 보일지 몰라도 카인은 잘 알고 있었다. 저건 그녀의 기분이 바닥을 칠 때만 볼 수 있는 뒤틀린 미소였다.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그러나 되살아난 이성이 속삭였다. 거짓이라면 악마 놈이 어째서 그녀를 도와주고 있겠냐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째서. 어째서….”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이렇게 또 한번 그녀를 제가 있는 바닥까지 끌어내리고야 말았다.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기어코 그녀를 망치고야 말았다. 저의 이기심이, 저의 탐욕이, 저의 어리석음이 최악의 최악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어째서?”
엘리제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서 그녀가 다시 한번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러게. 어째서지.”
카인이 다급히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난데없이 홀 안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쿠과과광!
지축을 울리는 진동.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황제궁의 천장에 뜯겨 날아갔다.
“윽…! 뭐, 뭐야…? 갑자기!”
카인을 끌어안고 간신히 버티는 와중에 엘리제는 옥좌가 있던 단상 주변이 새카맣게 물드는 걸 보았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검은 안개가 음산하게 피어올랐다.
“이, 이제 너희들은 끝났어!”
악에 받친 고함이 들려왔다. 악마 아니랄까 봐 어찌나 작신작신 밟았던지, 피곤죽이 되어 렉스의 발아래 깔려 있던 바트가 내지른 소리였다.
“이 세계는 완전히 끝났다고!”
단상 쪽 허공에 생겨난 시커먼 틈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맙소사.”
엘리제는 누가 보든 말든 황급히 반지를 두드렸다. 패널 디스플레이가 떠오르자마자 새빨간 경고창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떠올랐다.
『균열이 가속화됩니다.』
『균열이 6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균열이 7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징조>가 시작됩니다.』
『균열이 8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멸망>이 시작됩니다.』
『시나리오 완성률: 85퍼센트(수정 중) / 세계의 균열: 80퍼센트』
욕지기가 절로 튀어나왔다. 균열도가 높아질수록 외부 세계와의 틈이 벌어져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강림할 수 있게 된다던 카를리아즈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저 시커먼 구멍이 완전히 열리는 순간, 무엇이 이 세계에 도래할지 상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이대로 있다간 손쓸 새도 없이 가장 먼저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대체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이 세계 어디가 안전하단 말인가. 블레이크는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고 그를 데려갈 힘이 제겐 없었다.
저 틈을 벌리는 존재가 꽤나 고위급 악마인지, 렉스는 창백해진 얼굴로 와들와들 떨고만 있었다. 뭘 할 수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트만이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히죽댈 뿐이었다.
엘리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게 실감 났다.
“카인.”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그를 불렀다.
“이것만 알아 둬. 사랑이니 뭐니 그런 건 잘 몰라. 하지만 내가 널 정말 많이 의지했고 아꼈다는 것만은 기억해. 나의 평생에 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어.”
일이 어찌 되든 그것만은 말해 주고 싶었다.
“엘리제.”
그녀가 어째서 그런 말을 지금 이 순간에 하는지, 저 시커멓고 불길한 구멍이 무엇을 초래할 것인지 카인은 예감했다. 그리고 지금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임도 깨달았다.
“네게 고백할 게 있어.”
엘리제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열네 살의 첫 키스. 사실 너한테 한 거야. 네가 잠들었을 때, 몰래 네 입술을 훔쳤어.”
그럴 때가 아님에도 엘리제는 하도 기가 차서 ‘뭐 이 새끼야?’하고 욕할 뻔했다. 다행히 꾹 참을 수 있었고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부터 너만이 내 마음에 있었어. 스물아홉 해 동안 넌 내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야.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네가 없는 곳이 내겐 지옥이야.”
진동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기에 그는 저를 안은 그녀의 팔을 더욱 힘주어 쥐었다.
“어딜 가든 함께 있자. 제발 그래 줘. 밑바닥에서도 너만은 내가 웃게 해줄게.”
그의 절박한 고백에 엘리제는 입술을 비죽였다.
“진즉에 이럴 것이지.”
그랬으면 그들 생애 더 많은 날들이 봄처럼 따뜻했을 것이다. 여름처럼 뜨겁진 않아도, 웅크려 떠는 긴긴 겨울은 없었을 것이다. 한번쯤 아니, 실은 여러 번 상상했던 대로 웃고 떠들며 아웅다웅하다가 함께 잠들고 함께 깨어났을 것이다. 외로울 새 없이 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함께라서 다행이었다. 엘리제는 카인에게 잡힌 팔을 빼 그의 손을 맞잡았다. 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히 엮어 쥐었다.
“함께 있어 줄게. 앞으로도 쭉. 고맙지?”
선심 쓰듯 말하고선 그를 좀 더 당겨 안았을 때였다.
“야 이 악마 새끼야아아!”
홀을 쩌렁쩌렁 울리는 욕설과 함께 무언가가 아래로 쿵, 떨어져 내렸다.
“커억!”
렉스를 정확히 겨냥하여 굉장한 위력의 발차기를 날린 이는 다름 아닌 메리였다.
“네가 감히 엘리제 님을 납치해? 죽어 버려! 죽어! 죽엇!”
뭔가 한참은 잘못 알고 온 듯, 애꿎은 렉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이쪽으로 쾅, 저쪽으로 쾅, 패대기쳐댔다.
그 꼴을 보면서도 엘리제는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 악마나 저 악마나 원흉이긴 매한가지였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렉스 따위가 아니었다.
“칼….”
용의 몸에 채운 하네스의 고삐를 쥐고 홀 한가운데 내려선 카를리아즈를 보는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독하게 참고 있던 눈물이 그제야 차올라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리제…!”
다급히 다가온 그는 처참한 몰골의 카인을 발견하고 가장 먼저 치유의 힘을 사용했다. 흰빛이 꽤 오랫동안 머문 후에야 지독한 상처들이 사라졌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잠긴 목소리로 엘리제가 투정하듯 말했다.
“미안하다. 고생 많았지?”
바트에게 목이 졸려 생긴 멍을 발견한 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별것 아닌 외상이었으나 그는 기어코 그녀까지 치유해 주었다.
카인은 잠자코 옆에 서서 그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카인의 눈빛이 이전과 다름을 눈치챈 카를리아즈가 물었다.
“기억을 찾은 모양이군.”
“…당신, 혹시 윗세계의….”
악마에게 얻은 정보와 블레이크로 지낸 날의 기억을 더듬어 합한 카인은 카를리아즈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 냈다.
“그래. 맞아.”
“그런데 왜 루카스 클랜튼의 몸에 들어간 거지?”
“아이 참, 지금 그런 한가로운 얘길 할 때가 아니야.”
엘리제가 재빨리 끼어들어 말했다.
“저걸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그녀 말이 맞아. 다른 건 나중에 얘기토록 하지.”
카를리아즈는 검은 틈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까보다 확연히 벌어져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며 기둥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글로리아 성으로 돌아가. 멸망을 막고 ‘저것’을 이 세계에서 몰아내려면 균열도를 낮춰야 해. 프로이젠 대공이라면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저건 어떡해요? 저 악마는. 좀 있으면 튀어나올 것 같은데.”
“내가 있잖아. 놈이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건 나 또한 본래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는 소리야.”
“아….”
“여긴 나한테 맡기고 블레이크와 함께 가.”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용에게로 갔다. 턱을 괴고 엎드려 있는 용의 거대한 몸뚱이 옆엔 반 기절 상태인 에릭과 시에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쟤들은 왜 데려왔어요?”
엘리제의 속삭이는 말에 카를리아즈가 답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함께 있으면 그 지역이 시나리오의 주무대가 돼. 이 정도로 거창하게 일을 벌였으니 실패하더라도 책임은 악마 놈이 물겠지.”
“아.”
“그리고 막타는 주인공 커플이 쳐야 한다고 사라가 그러더군.”
“음…. 나름 그림이 될 것 같긴 하네요.”
마왕에게 영혼을 판 황제를 무찌르는 주인공 커플! 사라는 시나리오의 결말을 그렇게 수정할 모양이다. 그리되면 권선징악은 확실히 챙겨 가는 셈이다. 어쩌면 약간의 핑크빛 분위기와 함께.
“2황자가 자신의 세력을 이동 마법진 쪽으로 돌렸다. 프로이젠을 지원할 거야. 그쪽엔 마법사가 많다더군.”
“그래요?”
엘리제가 반색했다. 에릭 덕분에 일이 한층 수월해질 것 같았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에릭을 노려보던 카인은 엘리제가 저를 쳐다보기 직전 반듯이 얼굴을 폈다. 그러곤 태연히 카를리아즈를 향해 물었다.
“이 용을 타고 가라는 건가?”
“그래. 당장엔 방법이 이것뿐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두 분은 제가 안전하게 모실게요!”
대충 렉스와 바트로 보이는 것들을 양손에 쥐고 질질 끌고 오며 메리가 해맑게 외쳤다. 슈만과 클랜튼 후작은 어떻게 되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
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퍼져 있는 에릭과 시에나의 몰골을 보자니 몸 약한 엘리제가 걱정됐다. 하지만 이미 저만큼 치솟은 기둥에서 언제 악마 놈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카를리아즈의 말대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메리의 도움을 받아 엘리제가 먼저 용의 등에 올라탔다. 뒤따라 오르기 위해 카를리아즈를 지나쳐 가며 카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벨렉시아무트.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
“……!”
카를리아즈의 눈이 커다래졌다. 카인이 방금 말한 것은 악마들의 진명이었다.
진명을 알고 상대하는 것과 모르고 상대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다만, 악마의 계약자가 이를 발설했다간 영혼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기에 묻지 않았던 거였다.
“왜 이런….”
“당신이라면 갚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카인은 엘리제를 위험에 빠뜨린 악마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앞으론 그 누구도 엄두 내지 못하도록 철저히 되갚아 주길 바랐다. 직접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로선 불가한 일이었다. 분하지만 카를리아즈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반드시 갚아 줄게.”
고개를 끄덕인 카를리아즈가 엘리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믿어, 엘리제. 모두 괜찮을 거야.”
“당연히 믿죠. 우리 요원님을 어떻게 안 믿어.”
“응.”
빙긋이 미소 지은 카를리아즈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그의 위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불길한 기운을 풍기며 상공에 기둥을 만들어 가는 악마의 그것과는 반대로 하늘에서부터 쏟아져 내린 빛의 폭포였다.
길어진 은청색 머리카락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이마에 새겨진 선명한 금빛 표식. 그 아래 다채로운 색을 머금은 눈동자가 신비롭게 반짝였다.
화아악-!
빛으로 이루어진 열두 장의 날개가 꽃처럼 만개했다. 휘몰아친 바람이 악마가 일으킨 검은 안개를 차단했다.
강림을 끝낸 그에게선 환상 호수에서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성스러운 힘이 느껴졌다. 손에 들린 길쭉한 창이 푸르게 번뜩였다.
“가. 어서.”
나직하나 단호한 목소리가 용의 등에 올라탄 세 사람에게 닿았다. 검은 기둥 또한 이미 하늘까지 치솟았기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가자, 용용아!”
메리의 외침에 길게 한번 울부짖은 용이 날갯짓을 했다. 한쪽 팔에 하네스의 끈을 여러 번 휘어 감고 다른 쪽 팔로 엘리제를 단단히 끌어안은 카인이 낮게 몸을 숙였다. 용의 몸체가 상공으로 치솟았다. 황궁이 순식간에 까마득히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