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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리아즈를 본 에릭의 눈이 커다래졌다.
“사자 님….”
에릭이 철장에 달려들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를리아즈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에릭에게 다가갔다.
“사자 님!”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요원이라 바꿔 부르기 전까지 그들은 신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사자(使者)’라 불렸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해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에릭이 알아보았는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에릭은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옷을 놓칠세라 꽈악 움켜쥐고서 애원했다.
“엘리제를 구해 주십시오!”
“…나에 대해 어떻게 알았지?”
카를리아즈는 클로드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악마가 단서를 흘린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이마에 표식으로 알았습니다.”
카를리아즈는 반사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이마의 표식은 세계의 관리자들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도록 평소엔 드러나지 않았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면 어떻게 요원으로서 일하겠는가.
“이게 보인다고?”
중얼대는 그의 옷깃을 에릭이 잡아당겼다.
“엘리제를 데려간 건 황제입니다. 대공도 지금쯤 함정에 빠져 무력해졌을 겁니다. 누군가 구해 주러 가야 합니다.”
카를리아즈는 에릭의 눈동자에서 분노와 광기를 읽었다. 에릭은 아마도 감옥에 갇히자마자 글로리아 후작을 고문하여 배후를 캐냈을 것이다. 납치됐을 것이 분명한 엘리제를 구하기 위하여.
“늦으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제발 엘리제를 구해 주십시오. 그게 안 된다면 저라도 나가게 해 주십시오.”
가만히 에릭을 바라보던 카를리아즈가 손을 뻗어 자물쇠를 움켜쥐었다. 육중한 쇳덩이가 덜그렁 소리와 함께 아무렇게나 뜯겨 나갔다. 옥문을 열고서 그가 턱짓했다.
“가지.”
상대가 정말로 이 세계의 황제라면 명분 때문에라도 2황자 에릭 러셀이 필요했다. 그는 에릭의 손목을 구속한 마력 수갑도 아무렇게나 뜯어 냈다.
클로드는 입을 턱 벌린 채 그 모습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생각해 보니 타운하우스의 지하 연무장에서도 그는 고강도 스틸레토를 산산이 조각내 부서뜨렸다. 손짓 한번에 용을 쫓아내질 않나,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질 않나.
게다가 황자에게 태연히 하대하고, 황자는 당연하다는 듯 존대하고 있음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정말로 옛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신의 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 그럼 지금 어디로 가실 겁니까?”
갑작스레 느껴지는 거리감에 다소 서먹해진 태도로 클로드가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에릭이 했다.
“황제궁에 갈 겁니다.”
“아직 제도 쪽은 이동 마법이 불가할 텐데, 그리로 간 게 확실합니까?”
“황궁의 이동 마법을 허하거나 금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황제에게만 있습니다. 엘리제와 대공을 끌어들일 땐 일시적으로 열어 주었던 거고요. 하지만 지금은 다시 닫힌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빨리 가도 반나절은 걸리겠군요.”
블레이크가 위험한 상황임을 깨달은 클로드가 간절한 눈빛으로 카를리아즈를 쳐다보았다.
“뭔가 방법이 있으시겠지요?”
“당연히 있으실 겁니다.”
“…….”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를리아즈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것 같아. 좀 고생스럽겠지만.”
“상관없습니다.”
몸을 돌려 앞서 걷는 카를리아즈의 뒤를 에릭이 바짝 쫓았다. 클로드 역시 그가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듯 재빨리 따라나섰다.
***
움직이지 않는 팔을 가까스로 들어 올린 블레이크가 바트의 다리를 붙잡았다.
“엘리제에게… 해독제를, 제발….”
조금 전부터 엘리제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서 움직이질 않았다. 벌써 독이 퍼지기 시작한 건지도 몰랐다.
“해독제. 해독제라….”
바트가 입꼬리를 늘려 웃었다.
“그 말을 믿었어요? 가만 보면 순진하다니까. 이러니까 악마에게 놀아나지.”
“그게 무슨….”
“아깝게 내가 왜 그녀를 독으로 죽이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사지를 마비시키는 약일 뿐이니까.”
바트의 말에 블레이크는 안도했다. 제가 속았다는 것보다는 엘리제가 당장 죽지 않는 것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어쨌든 내가 당신을 속인 건 사실이니까, 마지막으로 좋은 구경 시켜줄게요.”
허리를 굽힌 바트가 블레이크의 새파란 눈을 가까이서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사실 사람 해체하는 데 일가견이 있거든요. 맛있게 먹고 예쁘게 분해해 줄 테니까 잘 보고 있어요.”
“……!”
경악에 휩싸인 눈동자를 당장이라도 도려내 보관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으며 그가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안 돼!”
힘줄이 끊어지고 근육이 파열돼 넝마가 된 몸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았는지, 블레이크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소리 지르며 뒤에서부터 그를 덮쳤다.
가까운 거리에 슈만이 있었으나, 너무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대처하지 못했다.
“컥…!”
제 몸으로 바트를 짓누른 블레이크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짠 공격에 바트의 목뼈가 부러지려는 찰나였다.
콰직-!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블레이크의 양쪽 팔을 관통했다. 겨우 늦지 않게 바트를 구해낸 클랜튼 후작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슈만! 대체 뭐 하는 건가!”
그러나 슈만은 머뭇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팔꿈치 아래가 꽝꽝 얼어 버린 블레이크는 이제 바트를 해칠 수 없었다.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으니 제 목숨은 물론 대공비의 목숨도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도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가 끔찍한 짓을 당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다가 죽게 될 것이다.
슈만의 예상대로 바트는 금세 블레이크를 떨쳐 냈다. 죽을 뻔했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었는지 씩씩대며 블레이크를 걷어찼다.
“■■! 이 개 같은! ■■ ■■가!”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해대는 모습이 악귀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머리통을 터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바트가 한쪽 발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였다.
그 상태로 몸이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게, 적당히 좀 했어야지.”
혀를 차며 걸어오는 렉스 러셀의 모습에 슈만과 클랜튼 후작은 경악했다. 언제 홀 안에 들어온 것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는데, 벌써 거리가 지척이었다.
“황태자…?”
“어떻게 여길…!”
그러나 렉스는 대답은커녕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시나리오가 엉망이 된 지금, 이 세계의 조연 따위에 관심 둘 이유가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미동조차 없는 블레이크의 머리맡에 멈춰 선 렉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건 뭐 산송장이네. 살릴 능력은 없어. 그런 건 요원들 전공이라. 알지?”
“알아. 그러니까 부탁한 거나 해줘.”
대답한 건 엘리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축 늘어져 있던 그녀가 뚝뚝 끊어진 밧줄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말했지? 블레이크가 당한 거의 최소 두 배야.”
“무슨…!”
당황한 와중에도 황태자를 막으려고 하던 슈만과 클랜튼 후작은 자신들 역시 바트와 마찬가지로 꼼짝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누구 부탁이라고. 당연히 들어줘야지.”
생글생글 웃으며 렉스는 바트의 짧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곧바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바트가 비명을 질렀다.
“아악!”
“엄살은. 이제 시작인데.”
손가락 두 개를 붙여 세운 렉스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바트의 한쪽 눈을 깊숙이 찔렀다.
“아아악! 악!”
“아까 네가, 쟤한테 이런 거 하고 싶어 했잖아. 당해보니까 어때?”
눈동자를 도려 파내는 손길이 무자비하며 잔혹했다.
그 모습을 핏발 선 눈으로 잠시간 지켜보던 엘리제가 블레이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걸음을 떼, 그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가 엎어진 그의 몸을 힘겹게 뒤집었다. 드러난 몰골이 너무도 처참하여 숨이 턱 막혔다.
엘리제는 그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조심스레 올렸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다른 데는 손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살아 있으면 눈 좀 떠 봐요.”
“…….”
“당장 눈 안 뜨면, 나… 가 버린다?”
협박이 통한 걸까. 움찔 떨리던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리며 이젠 꽤 정이 든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났다.
“…엘리제.”
흔들리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엘리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블레이크였다면 저를 뚫어지게 바라볼지언정, 이렇게 피할 리 없다. 악마가 재깍 기억을 돌려주긴 한 모양이다.
“카인…. 카인 리베르토.”
드디어 그를 만났다. 몸 고생, 마음고생, 온갖 고생을 다 하고서야 이 웬수 같은 놈과 재회했다.
“잘못한 건 아나 보지?”
느리게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그녀를 바라본다. 푸른 눈동자 가득 그녀의 상이 맺혔다.
“미안해.”
눈꼬리가 축 처지는 저러한 눈웃음은 블레이크에게선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해서, 속이 쓰라렸다.
“만나면 뺨을 열 대는 때려 주려고 했는데, 그랬다간 죽어 버릴 판이네.”
“…네 손엔 백 대 맞아도 안 죽어.”
엘리제의 눈썹이 홱 들려 올라갔다.
“이게 진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번졌다.
“보고 싶었어.”
기습적으로 내뱉은 말에 엘리제는 일순 굳어 버렸다.
“네가 웃는 모습도, 화내는 모습도. 보고 싶었어, 엘리제.”
“…….”
“살아서 나와 눈 맞춰 주는 널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어.”
“그럼 이제 여한이 없겠네.”
엘리제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응. 정말 그래.”
그는 정말 미련 없다는 듯 웃었다.
“행복하게, 잘 지낼 거지?”
내기의 끝을, 이별을 염두에 둔 듯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비록, 널…. 화나게 했지만. 마지막이니까 용서해 줘.”
잠자코 그의 말을 듣던 엘리제가 미간을 살풋 찡그렸다. 작고 도톰한 입술을 몇 번 비죽이더니 그의 뺨을 아프게 꼬집었다.
“너 왜, 나 사랑한다고 말 안 해?”
이번엔 그가 굳어 버렸다.
“언제까지고 같이 있고 싶다고 왜 말 안 해? 내가 너무 소중해서 그랬다고 왜 말 안 하냐고.”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제가 다다다, 말을 쏟아 냈다.
“이기적인 새끼가 어디서 착한 척이야.”
“…….”
“너도 나 같이 못됐으면서. 지옥이든 어디든 끌고 가야 할 거 아니야. 안 되면 생떼를 쓰든 싹싹 빌든. 제발 같이 가 달라고, 함께 있고 싶다고 매달려야 할 거 아니야.”
“엘리제….”
“그러면 내가, 못 이기는 척 가 줄 수도 있잖아.”
요동치듯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엘리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왜 사람 우습게 만들어. 구질구질하게 이런 말 내뱉게 만들어. 머저리같이 생전에도 내색 한번 안 하더니, 끝까지 이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