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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는 자신이 로버트 실러로 불리던 때부터 카인을 싫어했다. 새롭게 정한 목표, 엘리제 미리암과 쓸데없이 친했기 때문이다. 엘리제는 지속해서 교류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오직 카인만이 유일했고 그래서 변수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조금 번거로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 일을 망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에게 발각돼 살해당할 거라곤.
어딜 찔러야 제대로 숨을 끊어 놓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 초보 주제에 카인은 겁먹거나 흥분하지 않았고, 그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떠났다.
직후, 저를 찾아온 악마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복수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모월 아무 날에 살해당해야 할 엘리제의 운명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카인은 로버트 대신 그녀를 죽였고 저 또한 자살했다.
로버트는 저와 계약한 악마를 통해 이 모든 걸 지켜보았다. 그는 카인과 엘리제가 <타락한 연인>에 빙의한 날, 바트 루오스의 몸에 빙의했다. 카인에게 복수하고, 실패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생전에 엘리제 미리암의 생을 1분 1초도 늘려 주지 못했듯, 카인은 이번에도 그녀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자신의 연인이 처참히 범해진 후 잘리고 찢겨 고깃덩이로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그리고 느끼게 될 절망이 그를 희열케 했다.
“기분이 어때요? 뭐라고 말 좀 해봐요.”
“…….”
입을 열었다가 고통에 겨운 신음이 새어나갈 것 같아, 블레이크는 이가 으스러지도록 사리물었다. 정신을 놓지 않고 엘리제를 바라보는 것만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블레이크의 모습에 엘리제는 숨을 헐떡였다.
“아… 으….”
부릅뜬 채 깜빡이지도 않은 탓에 실핏줄이 모두 터져 눈앞이 흐렸다. 그런데도 저를 향한 블레이크의 눈빛만큼은 선명히 보였다. 다정하고 부드러우며 애틋하여 목이 멨다.
“바트, 이건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이러다 자칫 죽을지도 모르네!”
슈만의 다급한 외침에 바트가 힐끔 그를 쳐다봤다.
“상관하지 말아요. 제가 폐하의 대리인이란 걸 잊은 건 아니죠?”
“그건 알지만….”
엘리제는 미칠 것 같았다. 이미 피 웅덩이가 생겼다. 저 정도의 출혈이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내기에서 이긴다는 확신도 없는데 저대로 죽게 되면 카인의 영혼은 어떡한단 말인가.
아니, 굳이 카인의 영혼 때문이 아니더라도 엘리제는 블레이크가 저런 괴로움을 겪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곳이 시나리오 속 세계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블레이크는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저를 사랑하여 그 무엇도 불사하였던 그녀의 소유, 그녀의 연인이었다.
분노와 슬픔에 치가 떨렸다. 감정이 고조될수록 도리어 머릿속이 차가워지며 쨍한 이성이 살아났다.
“렉스….”
나지막한 목소리로 엘리제가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거기 있지…? 보고 있지…!”
그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저를 욕심내는 악마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라는 분명한 확신.
“당장 나와!”
그녀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공간에 파문이 일었다.
엘리제는 저를 제외한 모든 것이 멈췄음을 깨달았다. 첫 만남에서처럼 공간을 분리해 시간을 멈춘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한 악마가 연기처럼 나타나 그녀 앞에 형상을 갖추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빙긋이 웃는 얼굴은 여전히 밉살스러웠으나 지금으로선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에게 남은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계약해.”
이제는 자신이 블레이크를 구할 것이다.
“응? 뭐라고?”
카인 리베르토를 지하세계 저 밑바닥에 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떨어져도 같이 떨어져 끝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계약하자고. 날 갖고 싶댔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렉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하세계로의 스카우트 정도가 목표였건만 제 개인 소유물이 되겠다니.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그로서는 굉장한 횡재였다. 엘리제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제고 제 뜻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 카인과 계약 해지하고 나랑 하자. 어차피 한번에 하나밖에 못 한다며.”
“계약 해지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시나리오가 끝나서 내기가 종료되든가 카인이 동의해야만 해지할 수 있어.”
“그럼 추가 계약서를 써. 카인이 내기에서 졌을 때 지불해야 할 대가를 내가 대신 치르는 거로. 어때? 그런 건 가능하잖아.”
“흠…. 그래.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네.”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허공에 나타난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다. 덤덤한 척해도 그는 지금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계약서를 쓰는 사이 엘리제가 마음을 바꿀까 봐 조급하게 조항들을 휘갈겨 썼다.
“어차피 상관없어질 테니까 카인의 기억은 미리 돌려줘. 끝나기 전에 얘기를 좀 나누고 싶어.”
“알겠어. 또 원하는 건?”
“저거.”
엘리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쳐다본 렉스가 물었다.
“바트 루오스?”
“응. 저 새끼 좀 조져 줘. 내 남편 다치게 한 거에 보태서 두 배 정도면 돼.”
말이 두 배지 죽여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겸사겸사 나도 좀 구해 주고.”
“내 사랑, 은근 원하는 게 많네?”
“그래서 싫어?”
“아니? 그럴 리가.”
대강의 계약서 작성을 마친 렉스가 엘리제의 몸을 옭아맨 밧줄을 간단히 끊어 냈다. 저린 팔을 주무르며 엘리제는 그가 건넨 계약서를 위에서부터 쭉 훑었다.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마른 입술을 핥으며 그가 속삭였다.
“후회 안 할 거야. 진짜 잘해 줄게.”
달콤한 그녀를 언제든 물고 빨 수 있게 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몸에 열이 올랐다. 이토록 기대했다가 무산된다면 끔찍한 상실감에 시달릴 것이다.
“좋아. 나쁘지 않네.”
무심히 대꾸한 엘리제가 계약서 하단에 서명했다. 주황빛이 감도는 렉스의 금안이 희열로 번뜩였다.
이로써 엘리제는 영원히 그의 소유가 될 것이다.
***
“어때요? 찾았어요?”
메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카를리아즈에게 물었다.
“아니.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아아…. 어떡해…. 엘리제 님….”
울기 직전인 메리 못지않게 카를리아즈 역시 미칠 것 같았다. 요원 생활 500년 동안 이토록 초조하고 불안했던 건 처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엘리제가 이 세계 어느 곳에 있어도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번, 엘리제가 환상 호수에 들어갔을 때만 일시적으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을 뿐이다. 다행히 그때는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위치를 기억하였기에 무작정 호수에 뛰어들어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글로리아 성에 있던 그녀가 갑자기 이 세계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새끼 고양이로 변신해 있던 쿤이 매의 발톱에 잡혀가는 걸 우연히 목격했을 때만 해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빨리 가서 고양이만 구해 오면 될 줄 알았다.
매를 쫓느라 숲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초입에서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하반신이 땅에 묻혀 있는 피터를 발견했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엘리제가 여전히 성에 있음을 확인한 그는 기절한 피터를 구해 어깨에 들쳐 메고서 숲을 수색했다.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사라를 피터 다음으로 발견했고, 족히 10미터는 되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메리를 마지막으로 찾아 꺼내 주었다.
직후, 그는 다시 한번 엘리제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느껴지질 않았다. 글로리아 성은 물론 프로이젠이나 제도,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으시겠죠? 괜찮으실 거야….”
사라와 피터를 양쪽 어깨에 짊어진 채 열심히 그를 뒤따르며 메리가 물었다. 아까부터 울먹이던 그녀는 이제 아이처럼 훌쩍대고 있었다.
엘리제가 보낸 줄 알았던 다급한 내용의 쪽지는 조사관들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고, 매로 하여금 쿤을 물고가게 한 것은 카를리아즈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었다. 조사관들과 그를 정확히 겨냥한 걸 보면 상대는 그들에 대해 이미 모두 파악하였을 것이다.
“모르겠다.”
그는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지금 누굴 달래줄 정신이 아니었다.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영주성을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두 조사관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메리 역시 뒤처지지 않았다.
글로리아 외성에 당도해 갈 무렵, 그들은 시끄러운 함성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뭐지?”
엘리제의 신변만을 걱정했던 카를리아즈와 메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성이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있었다. 이미 밤인지라,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일단 성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메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를리아즈가 등을 내밀었다.
“업혀. 같이 가지.”
카를리아즈에게 업힌 메리는 다리 힘만으로 그를 붙들었다. 떨어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는 안심하고 솟구쳐 올랐다. 성벽의 높이보다 배는 높게 날아올라 내성까지 단번에 진입했다. 본래 사라와 메리가 머물던 방 테라스에 조사관들을 내려 주고서 그가 말했다.
“나는 일단 어찌 된 상황인지 먼저 알아보고 올 테니, 넌 어떻게든 조사관들을 깨워.”
“네. 다녀오세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새끼 고양이까지 꺼내어 내려놓고서 그는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렸다.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클로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보고 클로드가 반색했다.
“클랜튼 경! 한참 찾았습니다. 대체 어디 갔었던 겁니까?”
“누군가 시녀 메리 브룩과 그 친척들을 해치려 해서 구해 온 참입니다.”
“맙소사…!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지금 대체 누구에게 공격받고 있는 겁니까.”
“프로이젠을 제외한 모두에게요. 물론 성 밖에서 자기들끼리도 싸우고 있긴 합니다만….”
“그게 무슨…?”
“지금 글로리아는 프로이젠이 장악한 상태입니다.”
“네?”
클로드는 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주군께서 남긴 지시서입니다. 주군께선 글로리아 후작과 네프러스의 단장이 우릴 배신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황태자 측과 2황자 측도 물론 믿을 수 없고요. 그래서 신속하고 은밀하게 성을 차지한 후 수성에 임하라 명하셨습니다. 프로이젠에 올리비아를 보냈으니 지원군도 곧 올 겁니다.”
간략한 상황설명과 대응책이 적힌 지시서를 읽어 내려가던 카를리아즈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엘리제가… 납치당했다는 얘깁니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적힌 내용대로라면 배신자 바트와 슈만을 따라간 블레이크 또한 위험했다. 함정임을 알면서도 블레이크는 그것만이 엘리제를 찾을 단서임을 알고 따라나선 것이다.
“지금 시에나 라우디아와 에릭 러셀은 어디 있습니까?”
“라우디아 영애는 잘 모르겠고 2황자는 글로리아 후작 내외와 함께 감금돼 있습니다.”
“좀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단서를 얻고 나서 곧장 비전하를 구하러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카를리아즈는 클로드와 함께 내성 안 지하실로 향했다. 대부분의 영주성이 그러하듯 글로리아 성의 지하에도 간이 옥사가 있었다. 프로이젠의 기사 몇이 지키는 지하실 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매우 괴롭게 느껴지는 신음을 들었다.
“끄으윽….”
깜짝 놀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간 카를리아즈와 클로드의 눈에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는 글로리아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후작 부인은 한쪽 구석에 실신해 있었고, 그런 그녀를 에릭이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클로드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에릭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력을 억제하는 수갑이 채워진 그의 손은 누군가의 피로 검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