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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를 부른다고요?”
엘리제는 도망가려던 것도 잊고 빽 소리를 질렀다.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황제란 작자는 저와 블레이크를 불러 뭘 하려는 걸까. 반역을 일으킨 황태자와 2황자를 진압하란 명이라도 내리려는 걸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그녀는 발뒤꿈치에 무언가 닿는 것을 느꼈다. 직후엔 등이었다. 딱딱한 무언가에 가로막혀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엘리제는 허공을 더듬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사방에 있었다.
“도망가면 안 되지, 엘리제. 곧 대공이 올 텐데 어딜 가려고.”
엘리제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여기서 마법 아이템을 사용하여 벽을 깨뜨려 봤자 상급 마법사인 클랜튼 후작에게 금세 제압당할 것이다.
이제 엘리제가 할 수 있는 건 부디 대공 부부를 부른 황제의 의도가 나쁜 것이 아니기를 비는 것뿐이었다.
그때였다.
클랜튼 후작이 선 뒤쪽 공간에서 무언가 웅웅거리며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엘리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빛은 바닥에 그려진 복잡하며 정교한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제야 오는군.”
몸을 돌린 후작이 마법진에 손을 올려 마력을 주입했다. 희미하던 빛이 더욱 강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발동되며 내는 소리에 귀마저 먹먹해진 순간, 엘리제는 재빨리 호신용 아이템을 사용하여 저를 가로막은 벽을 부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탈출할 수 없으리란 걸 직감한 것이다.
쓸 수 있는 마법 아이템을 모두 사용하고서야 엘리제는 저를 가둔 공간에서 간신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출구를 향해 뛰었다. 후작이 마력을 주입하고 있는 것이 이동 마법진이라면 중도에 손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출구까지의 거리가 생각보다 멀었다. 마음과 다르게 빨리빨리 움직여 주지 않는 다리를 원망하며 달려가던 엘리제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덜컥, 몸이 굳고 말았다.
“엘리제!”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제는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들려온 목소리가 바로 블레이크의 것이었음에.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안도한 표정으로 제가 다가오는 블레이크를 향해 슈만이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블레이크!”
엘리제는 비명을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쩌엉-!
슈만이 공격해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듯, 블레이크는 들고 있던 검을 검집째 들어 올렸다. 두 개의 쇠붙이가 충돌하며 낸 굉음이 홀을 울렸다.
엘리제는 얼어붙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자신이 여기 있어 봤자 블레이크의 약점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시야를 벗어나면 그가 더 조급해져 다치는 건 아닐까 염려됐다.
블레이크는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슈만의 집요한 방해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실력이 비등한 만큼 슈만이 퍼붓는 공격 중 어느 것 하나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칫 한눈팔았다가는 금방 당하고 말 터였다.
게다가 분명 함께 이동해 왔음에도 사라져 보이지 않는 바트와 상급 마법사 클랜튼 후작까지 신경 써야만 했다.
“누가 널 움직였나 했더니, 결국 이건가. 중재니 협상이니 한 것도 다 미끼였군.”
황제궁으로 연결된 이동 마법진 그리고 클랜튼 후작의 존재만으로도 블레이크는 이번 일의 배후를 알아차렸다.
침상에만 머무는 줄 알았던 황제가 제국의 몇몇 귀족에게 영향력을 행사 중이라는 사실은 조사 결과 확인했었다. 그러나 프로이젠과 상관없는 일이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체 이유가 뭐지? 프로이젠은 반역하지 않았다.”
“이유 같은 건 몰라. 나는 다만 폐하의 충실한 검으로서 프로이젠 대공을 제압해 데려오라는 명을 받들 뿐이다.”
검기를 머금은 두 개의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대리석 바닥이 엉망으로 깨져 나갔다. 흙먼지와 돌풍이 사방에 비산했다. 수십 합이 오가도록 어느 한쪽도 물러나지 않았다.
슈만을 도울까 싶어 마법을 준비하던 클랜튼 후작은 혀를 차며 포기했다. 어떻게 얽혀 싸우는지 그의 시력으로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너무 빨랐고 너무 강했다.
비등한 실력의 그들이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었던 건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이었다. 블레이크는 슈만을 죽여서라도 엘리제에게 가고자 했고, 슈만은 블레이크를 살려서 제압해야 했다.
서걱!
블레이크의 검이 슈만의 복부를 그었다. 피가 치솟는 아랫배를 감싸며 슈만은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엘리제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블레이크는 굳어 버리고 말았다. 슈만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약점이 생긴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일이지. 안 그런가, 블레이크.”
엘리제가 제게 다가오는 바트에게 구교묘를 흔들며 위협하고 있었다. 마력 한 톨, 근육 한 줌 없는 그녀에게 아무리 맞아 봤자 아프기는커녕 간지럽기만 하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저리 가! 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멈추지 못해?”
공중에서 흐느적대는 가죽끈에 손을 뻗은 바트가 구교묘를 잡아채 제 쪽으로 당겼다.
“앗…!”
당연히 엘리제의 몸도 따라 끌려왔고, 결국 바트의 품에 안착하고 말았다.
“이거 놔…!”
분개한 그녀가 콱콱 그의 발을 밟아 댔으나 바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더욱 꽉 당겨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 몸부림치지 말아요. 괴롭히고 싶어지니까.”
한쪽 팔로 엘리제를 옭아맨 그가 그녀의 몸에 있는 장신구를 하나하나 빼냈다. 양쪽 귓불에 매달린 귀걸이 한 쌍과 팔찌 두 개, 그리고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바닥에 툭 툭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도 하나 있다고 했는데….”
그의 손이 엘리제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바트 루오스!”
살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루오스는 프로이젠의 가신이 아닌가! 불만이 있다면 내게 말해!”
손을 멈춘 바트가 시선을 돌렸다. 얼음벽을 세워 가까스로 블레이크를 막고 있는 클랜튼 후작과 상처를 입은 슈만을 한 번씩 쳐다보곤 미간을 구겼다.
“경을 따라나서며 내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 성싶은가? 경에게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지 않나! 그녀에게 해를 끼치지 마라!”
“가족…. 가족이라.”
블레이크의 말에 바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착각하셨군요. 그런 건 아무 의미 없는데. 다 죽이셔도 좋아요.”
“…뭐?”
“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요. 그 외의 것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복수…?”
이번에는 엘리제도 흠칫 놀랐다.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복수를 원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당신이 카인 리베르토라 불리던 때에 날 죽였거든요.”
블레이크뿐 아니라 슈만과 클랜튼 후작도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바트를 쳐다봤다. 엘리제만이 너무 놀라서 입을 턱 벌렸을 뿐이다.
바트 루오스, 아니 로버트 실러는 이미 블레이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아. 당신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한댔지. 이거 정말 아쉽네요.”
“대체… 경이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다.”
“몰라도 돼요. 그편이 난 더 재밌거든.”
바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광기에 엘리제는 흠칫 몸을 떨었다. 심상치 않다고는 느끼고 있었어도 그 정도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는 카인이 저를 죽였다고 말했으나 엘리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분명 숨겨진 내막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건 대체 어떻게 그가 카인의 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는가였다.
블레이크와 카인의 외모는 분명히 달랐다. 그런데 머뭇거림 없이 그를 카인이라 지칭할뿐더러 기억이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엘리제의 말을 엿들어서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가 카인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건 카를리아즈뿐이었고, 그때 두 사람은 환상 호수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인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 건 악마뿐이었다.
‘하지만 렉스일 가능성은 없어.’
지금 바트의 행동은 여태껏 렉스가 내보인 욕망과 상충하는 데다가 악마는 한번에 두 개의 계약자를 둘 수 없다.
바트는 아마도 또 다른 악마의 계약자일 것이다.
‘그럼 이 세계에 악마가 한 명 더 있다는 소린데. 설마 그게…?’
유일하게 그녀가 만나지 못한 존재. 그래서 확인하지 못한 존재. 또한 슈만과 클랜튼 후작을 움직여 그녀와 블레이크를 황제궁에 끌어들인 숨겨진 배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바트와 계약한 악마는 이 세계의 황제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니 지금 바트가 하는 짓을 슈만과 클랜튼 후작이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다.
새로이 깨닫게 된 사실에 엘리제가 얼어붙어 있을 때, 돌연 그녀의 입을 벌리게 한 바트가 유리병에 든 액체를 강제로 흘려 넣었다.
“으, 읍….”
“착하지. 어서 삼켜요.”
그가 입과 코를 틀어막은 탓에 엘리제는 뭔지 모를 액체를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에게 뭘 마시게 한 거지?”
블레이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독이요.”
바트는 태연히 대꾸했다. 그러곤 어디선가 밧줄을 꺼내 엘리제의 몸을 꼼꼼히 묶기 시작했다.
“왜, 왜 이래! 뭐 하는 거야!”
몸부림치는 엘리제가 거슬렸는지 그가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내리눌렀다.
“흑!”
“엘리제!”
콰광-!
블레이크의 앞을 가로막던 얼음벽이 그의 계속되는 검격에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장애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더 가까이 다가갈 순 없었다. 엘리제가 바트의 손아귀에 있는 지금, 그를 자극해선 안 됐다.
“으…읏….”
“가만히 있어요. 안 그러면 내가 어떤 심한 짓을 하게 될지 몰라.”
엘리제를 짓누른 채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두면 한 시간 안에 장기가 모두 녹아내려 죽게 될 거예요. 당신 하는 거 봐서 해독제를 줄 수도 있고요.”
블레이크의 얼굴에 끔찍한 분노와 공포, 절망이 번져 갔다.
“내가… 뭘 하면 되지?”
“일단 칼부터 버려요.”
블레이크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순순히 내려놓았다. 안에 차고 있던 단검까지 끌러 바닥에 던졌다.
결박되어 꼼짝 못 하게 된 엘리제를 내려놓고서, 바트는 블레이크에게 다가갔다. 그가 바닥에 놓인 단검을 집어 들어 이리 저리 살펴보았다.
“무릎도 꿇고.”
치욕감에 이를 갈면서도 블레이크는 바트가 원하는 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거 알아요?”
검 끝을 블레이크의 얼굴에 가져다 댄 그가 천천히 날을 미끄러뜨렸다. 눈꼬리에서부터 턱까지 붉은 실선이 길게 그어졌다. 배어 나온 핏방울이 투둑, 툭 떨어져 셔츠를 적셨다. 얼굴 한쪽을 가로지른 검날은 목을 지나 어깨까지 내려왔다.
“기억 안 나겠지만, 당신이 나를 칼로 찔렀거든요. 그런데 사람을 처음 찔러 보는지 영 어설프더라고요. 그래서 굉장히… 고통스러웠어요.”
그리 말하며 바트는 블레이크의 오른쪽 어깨에 검을 푹 찔러 넣었다.
“악! 블레이크!”
찔린 것은 블레이크인데 비명이 터져 나온 쪽은 엘리제였다.
쇠붙이가 살을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새파란 눈동자에 고통이 차올랐다. 이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며 바트는 손목을 돌렸다.
“별로 안 아픈가 본데?”
찔러 넣은 검날을 느릿하게 비틀며 근육을 헤집어 망가뜨렸다. 기어코 블레이크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오는 걸 듣고서야 그는 검을 빼냈다.
“하지 마! 하지 마! 왜 그래!”
악을 지르는 엘리제에게 바트가 말했다.
“그렇게 흥분하면 독이 더 빨리 퍼질 텐데? 얌전히 있어요. 응?”
“엘리제, 나는 괜찮으니 제발….”
독이 퍼진다는 말에 블레이크가 조급히 말을 잇는 순간, 그의 왼쪽 어깨에 바트가 다시금 검을 찔러 넣었다.
“아파요? 나도 진짜 아팠거든.”
치명상을 입지 않을 부위만을 골라서 그는 연신 쑤시고 헤집었다. 지나치게 교활하며 잔악했다.
“그러게 왜 그랬어요. 어차피 구하지도 못할 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