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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룸이 있는 3층에 글로리아의 밀실이 있었다. 글로리아의 밀실은 중립을 지켜 왔던 후작가가 수대에 걸쳐 완성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때론 황실의 일원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었고 때론 가주나 후계자를 지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밀실엔 다른 출구는 물론 창문도 없고 오직 글로리아 후작이 가진 펜던트로만 여닫을 수 있는 두꺼운 석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밖에서 가해지는 충격을 방어하고 외부로부터의 이동 마법을 차단하는 마법진이 내벽 사면에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글로리아 후작과 슈만은 밀실의 유일한 출구 앞을 프로이젠의 기사들이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아울러 복도 양끝은 크롬벨 직속 기사들이 지켰다.
그렇게 몇 중으로 방비를 하고서야 블레이크는 슈만에게 이끌려 겨우 밀실 앞을 떠났다.
슈만은 시에나를 통해 황태자 측 기사들과 2황자 측 기사들의 면면을 확인하게 했다. 각자의 신념에 따라 황태자나 2황자를 따르고는 있어도 본래 네프러스 소속인 그들이기에 순순히 조사에 임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 중 시에나를 끌고 갔던 흰색 제복의 기사는 없었다. 시에나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그녀를 속여 유인한 직후 후작가를 떠났거나 누군가 네프러스 기사로 위장했다는 소리였다.
슈만은 글로리아의 하인들과 타 가문 기사들까지 모두 불러 모으도록 명을 내렸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블레이크는 점점 기분이 저조해졌다. 아까부터 루카스 클랜튼이 보이지 않아 기사들을 시켜 데려오게 하였는데 여태 소식이 없었다. 그가 제멋대로 엘리제의 곁을 비울 사람이 아니라는 건 블레이크가 제일 잘 알았다.
이때, 기사 중 하나가 그에게 와서 말했다.
“비전하의 시녀 메리 브룩과 친척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택 다른 곳에 있는 건 아닌가?”
“모두 찾아보았으나 없습니다.”
몹시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말아쥐며 그는 슈만에게 다가갔다.
“슈만.”
시에나와 얘기를 나누던 그가 블레이크를 돌아보았다.
“엘리제를 봐야겠다. 밀실을 열어 줘.”
블레이크의 황당한 요구에 한마디 하려던 슈만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멈칫했다.
“무슨 일… 있나?”
다른 말없이 블레이크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알겠네.”
슈만은 일단 조사를 멈추고 블레이크와 함께 3층으로 향했다. 밀실 앞을 지키던 프로이젠과 크롬벨의 기사들이 예를 갖추었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는 그들을 제치고 슈만은 글로리아 후작에게 받아 놓은 팬던트를 입구의 마법진에 올렸다.
웅웅 소리와 함께 밀실의 거대한 석문이 양쪽으로 드르륵 열렸다.
“엘리제…?”
지나친 적막에 블레이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슈만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간 그의 눈에 텅 빈 내실 안이 보였다.
“엘리제…. 엘리제…!”
그는 미친 듯이 밀실 안을 뛰어다니며 엘리제를 찾았다. 몸을 굽혀 침대 아래를 확인하고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테이블과 소파, 침대 시트를 뒤집는 모습엔 광기마저 서려 있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밀실 안을 둘러보던 슈만이 문득 한쪽 벽면에 손을 얹었다.
“마법진이 손상됐군.”
쥐어뜯어 솜털이 펄펄 날리는 베개를 팽개치며 블레이크가 슈만에게로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마법진이 손상됐다니.”
“외부와 밀실 간의 이동 마법을 막는 마법진이 훼손돼 있어. 이건 내부에서밖에 망가뜨릴 수 없는 것인데….”
슈만이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블레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가 훼손한 게 아니야.”
“어떻게 확신하지?”
“그녀는 검술도 마법도 못 해. 평범한 사람 수준의 마력도 갖지 못하는 몸이야. 이걸 훼손할 능력도 없고, 훼손했다 쳐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을 리 없어.”
“하지만 대공비는 제국의 손꼽히는 마법사인 태자 전하를 홀로 제압했지 않았나.”
“그건 호신용 마법 아이템의 도움을 받은 것뿐이다. 그놈이 방심한 탓도 있을 테고.”
“이번에도 마법 아이템을 사용하여 빠져나갔다면?”
블레이크는 차라리 슈만의 말대로 엘리제가 스스로 이곳을 나간 것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마법 아이템을 내 아내에게 구해다 준 적이 없어.”
구할 수 있었다면 구해 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동 마법 같은 상급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마법 아이템은 매우 희귀했다. 꾸준히 경매장을 살펴 온 그이지만 비슷한 것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블레이크, 대공비가 밀실에서 혼자 힘으로 빠져나간 건 사실이야.”
블레이크는 슈만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굉장히 섬뜩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슈만의 말대로 엘리제를 빼내 간 것은 외부에서 침입한 누군가가 아니었다. 만약 밀실 안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엘리제를 납치했다면?
그렇다면 공조한 것은 누구인가.
블레이크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를 악문 채 눈가를 짚고 있는 그를 슈만이 다독였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 찾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돕겠네.”
블레이크는 입을 굳게 다물고서 고개만 끄덕였다. 밀실에서 나온 슈만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달려온 글로리아 후작 내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대공비께서 사라지셨다니…. 그럼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요?”
“일단은 영주성 인근을 샅샅이 수색해 보도록 하지요.”
눈을 내리깐 채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잠잠히 듣고 있는 블레이크에게 클로드가 다가왔다.
“주군.”
블레이크의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클로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새파란 눈에 가득 찬 진득하고 어두운 살기가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뭔가.”
“실은… 외성 경계를 서던 우리 쪽 기사가 영주성을 벗어나는 클랜튼 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클로드의 말에 블레이크의 시선이 뒤편으로 미끄러졌다. 그곳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바트 루오스였다. 블레이크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클랜튼 경이 누군가와 함께 영주성을 벗어나는 걸 제가 봤습니다.”
“정말인가?”
“네. 그때는 내성 안 상황을 몰라 무심코 넘겼는데, 주군께서 클랜튼 경을 찾으셨단 얘길 듣고 고하러 왔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영주성을 벗어난 루카스 클랜튼. 그리고 사라진 메리 브룩과 그 친척들. 정황상 의심의 여지가 충분했다.
“내가 직접 쫓겠다.”
생각을 끝낸 블레이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같이 가지.”
“미안합니다, 대공.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슈만과 글로리아 후작의 말에 블레이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제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가 빠르게 무언가를 적고 프로이젠의 인장을 찍어 클로드에게 건넸다.
“주군, 이건….”
“내가 떠난 후 여기에 적힌 대로 수행토록 해.”
“네, 알겠습니다.”
잠시간 클로드를 바라보던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을 믿겠다.”
뜻밖의 말에 클로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가슴에 주먹을 붙인 클로드가 결연한 목소리로 외쳤다.
“결코 주군께 실망을 안겨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의 등을 툭툭 두드린 블레이크가 방을 나섰다.
“바트, 앞장서라.”
“네, 주군.”
그 외의 기사들은 대동치 않은 채 블레이크는 슈만과 함께 영주성을 나섰다.
***
“■■.”
엘리제는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가격당한 뒷덜미가 아직도 아팠다.
“어떤 새낀지 걸리기만 해 봐라….”
낮게 중얼대며 그녀는 목을 쥔 채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기절한 사이 주변 환경이 달라져 있었다. 글로리아의 밀실이 아닌 매우 널따란 홀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제가 감금될 것을 미리 알았던 듯, 밀실에 숨어 있다가 그녀를 납치한 이는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엘리제의 뒷덜미를 쳐 기절시킨 누군가였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일어났구나.”
바로 원작상 엘리제의 친부, 클랜튼 후작이었다. 엘리제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먹인 엿이 이토록 거하게 되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글로리아 후작도 한 패예요?”
“한패…라니. 그렇게 천박한 말을 써서야 되겠니?”
“납치범 주제에 별걸 다 트집 잡네.”
중얼대며 엘리제는 홀 안 광경을 훑었다. 용 두어 마리는 족히 들어갈 정도로 웅장한 홀의 가장 안쪽, 높다란 단상 위엔 호화롭고 아름다운 옥좌가 놓여 있었다.
“여긴….”
“너로선 처음 와 보는 곳이겠구나. 여긴 영광스러운 제국의 심장, 황제 폐하께서 머무시는 궁이란다.”
분명 꽤나 쌓인 것이 많을 텐데도 클랜튼 후작은 조곤조곤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치 사랑해 마지않는 어린 딸을 데려와 구경시켜 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다만 말투와 달리 그녀를 향한 눈빛은 한낱 사물을 대하듯 지독히도 무감했다.
“여긴 왜 데리고 온 거죠?”
엘리제는 의아했다. 납치해서 인질로 삼으려면 차라리 클랜튼 후작저로 데려가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내전 탓에 한창 혼란스러운 황궁에 그녀를 데려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 아비는 언제나 폐하께 충성해 왔다. 널 여기 데려온 것도 당연히 폐하의 뜻이지.”
“…뭐라고요? 황제 폐하께서 절 데려오라고 하셨다고요?”
“그래.”
<타락한 연인>의 황제, 세드릭 러셀은 시나리오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조연은커녕 엑스트라도 아니었고 등장인물 열람 페이지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그런 존재가 클랜튼 후작과 글로리아 후작을 움직여 그녀를 납치한단 말인가.
“벌써 황태자나 2황자를 황제로 옹립한 거예요?”
그새 황제가 바뀌기라도 한 건가 싶어 묻자 후작이 코웃음 쳤다.
“그들은 반역자일 뿐이다.”
그는 딱 잘라 말했다.
“폐하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황궁을 소란스럽게 한 그들도, 또한 폐하 외의 존재를 따르는 불충한 무리도.”
이건 그야말로 원작 파괴였다. 엘리제는 황당함에 입술만 뻐끔거렸다. 균열이 너무 심해진 나머지 세계가 미쳐 돌아가는 걸까? 이러다 너 죽고 나 죽고, 모두가 죽고 죽이는 결말로 치닫게 되는 건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 엘리제가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탈출하여 중간지대 조사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운이 좋다면 카를리아즈가 근처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그녀가 있는 곳을 묻지도 않고 찾아오곤 했으니까. 일단 ‘황궁 속 미궁’에 속하는 황제궁만 벗어나면 된다.
다행히 클랜튼 후작은 그녀를 포박해 두지 않았다. 엘리제는 다리를 주무르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황제 폐하는 언제 알현할 수 있는데요?”
제게 남은 호신용 마법 아이템을 헤아리며 엘리제가 태연히 물었다.
“그야 당연히….”
클랜튼 후작이 힐끔 그녀를 쳐다보며 웃었다.
“네 남편이 온 후지. 황제 폐하를 네까짓 게 혼자 알현할 수 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