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엘리제가 기가 막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빠는 것만으로도 가 버릴 뻔했는데 넣으면 얼마나 황홀할까. 생각하니 미치겠더라고.”
주황빛 감도는 그의 금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한번만 하자. 그러면 기억을 돌려줄게. 네게 불리한 얘긴 아닐걸?”
제 앞에 바짝 다가선 렉스를 쳐다보며 엘리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불리한 얘기가 아니라는 건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알았다. 카인 리베르토가 기억을 되찾게 되면 자연스레 악마와의 계약과 내기의 조건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내기에서 이기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진심이야?”
“당연하지.”
미심쩍어 묻자 그는 재깍 대답했다. 거의 가슴이 맞닿을 만큼 다가와선 그녀의 등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네 가짜 남편 따위 생각도 안 나게 해 줄게. 나 진짜 잘하거든?”
느릿하게 등줄기를 훑는 손길엔 성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일단 손 떼.”
엘리제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밀쳤다.
“왜 앙탈이야. 어차피 할 거면서.”
다 안다는 듯 실실 웃으며 붉은 혀를 내어 입술을 핥는 모습이 야살스러웠다. 이미 아래까지 한껏 세운 채 그가 은근슬쩍 하체를 붙여왔다.
만약 이 세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놈의 제안에 응했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실컷 놀아 봤을 악마 놈은 섹스도 잘할 게 분명했다. 가볍게 즐기고 얻을 수 있는 대가가 이토록 큰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내키지 않을뿐더러 기분까지 나빴다. 보통 나쁜 게 아니라 매우 매우 나빴다.
카를리아즈처럼 진심을 나누길 바라는 상대라면 모를까, 화대를 치르듯 대가를 주고 저를 가지려 드는 놈과 어울리긴 싫었다.
지금의 그녀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사람의 진심을 믿지 않던 과거와는 달랐다. 비록 두 번 세 번 생각해도 미친놈이지만, 저를 사랑하여 제 삶을 버린 카인이 있지 않은가.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에게 그녀는 목숨만큼 소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역시 그래야 했다. 최소한 녀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만큼은 저 자신을 아껴야 했다. 안 그랬다간 그가 기억을 되찾은 연후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겠는가. 아마도 족히 몇백 년은 시달릴 것이다.
게다가 엘리제는 카를리아즈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그때가 오면 생각해. 놈이 주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지 말고 새로운 답을 찾아.]
지금 악마의 제안은 얼핏 보기에 가장 쉬운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악마는 손해나는 거래를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이미 엘리제의 약점을 알고 있다. 뭔가 함정이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저를 지분대는 렉스를 싸늘하게 쳐다보던 엘리제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제 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렉스.”
“응?”
“학습능력이 너무 떨어지는 거 아냐?”
의아한 시선이 얼굴에 닿는 순간 엘리제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지져.”
파지직, 전류가 흘렀다.
그러나 렉스는 기절하지 않았다. 옅은 보호막이 엘리제가 흘려보낸 전류를 튕겨 낸 것이다.
“후… 엘리제. 내가 마법사란 걸 잊었어? 설마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응. 얕봐서 미안해. 그럼 얼리지 뭐.”
“야, 악…!”
퍼벙-!
냉기가 훅 끼치며 그의 몸을 휘감았으나 이번에도 보호막에 막혀 옷깃만 얼어붙었다.
“뭘 엄살이야.”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매서운 전격 마법이 다시 한번 그에게 내리꽂혔다.
“커헉…!”
세 번째까진 예상 못 했는지 이번엔 그 무엇도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진 렉스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물기가 남은 몸에 파직, 전류가 튀었다.
“야비한 자식. 보호 마법까지 걸고 왔겠다?”
그는 엘리제가 팔찌를 사용할 때를 대비한 것이다.
만약 블레이크가 잔뜩 구해다 준 호신용 마법 아이템들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어쩌면 지난번처럼 눈이 뒤집힌 채 달려들어 저를 덮쳤을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신경질이 나서 엘리제는 쓰러져 꿈틀대는 놈을 퍽퍽 차 주었다. 쌓였던 스트레스까지 꽉꽉 눌러 담아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발이 아파지자 허리춤에 매어 두었던 구교묘를 끌렀다.
“이럴 때 한번 써먹어 봐야지.”
엘리제는 인정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아홉 줄기의 가죽끈이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짝! 짜악!
차진 소리가 났으나 아무리 채찍으로 후려쳐도 그는 딱히 아파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부터 부풀어 있던 그곳이 터질 듯 솟아오르는 게 아닌가.
기분이 나빠진 엘리제는 다시 씩씩대며 그의 엉덩이를 퍽, 걷어찼다.
그러곤 좀 더 효율적으로 때리기 위해 힐을 벗어 드는 순간이었다.
“…엘리제.”
뒤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제는 움찔, 굳어 버렸다. 매우 익숙한 목소리여서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온 블레이크가 그녀의 손에 들린 구두를 쥐고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힘없이 넘겨주자, 서슴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선 그녀의 발에 구두를 신겨 주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 그를 내려다보던 엘리제가 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너머에 슈만과 글로리아 후작, 에릭이 서 있었고 저 뒤편으로 바트의 모습도 보였다. 저를 보는 그들의 표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블레이크는 땅에 떨어져 있는 구교묘을 집어 그녀의 허리춤에 단단히 묶어 주었다. 그가 제 차림새를 매만져 주는 동안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엘리제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황태자가 저를 겁간하려 하기에 너무 화가 나서 그만….”
“무엇이 미안합니까. 잘했습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겨 주는 손길이 몹시도 다정했다. 엘리제는 괜스레 울컥하여 그를 올려다봤다. 엘리제는 그가 제 모든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오해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걱정과 염려, 애정만이 가득한 눈빛이 오롯이 저를 향해 있었다.
“흐으… 더… 더 때려 줘….”
지금도 렉스의 중심부는 불룩했다. 심지어 그 부분이 동전만 한 크기로 어둡게 젖어 있기까지 했다.
“저 변태 새끼가….”
어디선가 부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선 것은 슈만 크롬벨이었다.
“대강의 상황은 알 것 같군요.”
엘리제는 말을 잇는 그를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황실을 수호하는 네프러스의 단장이자 제국의 검인 그는 황가의 일원을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 즉결처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대공비께선… 무슨 이유로 이 방에 계셨던 겁니까.”
그녀를 향한 슈만의 눈빛과 표정은 모호했다.
“슈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블레이크가 엘리제를 등진 채 슈만을 노려봤다. 장대한 체격의 그가 제 앞에 버티고 서자, 엘리제는 이제 블레이크의 널따란 등밖에 볼 수 없었다.
“말 그대로네. 태자 전하와 만나기로 약속한 건지, 아니면….”
“제 시녀를 찾으려고요. 저와 같은 층에 그 아이의 방이 있다는 건 들었는데 어딘지 몰라서 찾으러 다니고 있었어요.”
엘리제의 침착한 대답에 슈만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비전하, 여기 계셨군요!”
시에나가 슈만을 밀치며 다급히 방에 들어왔다.
“죄송해요.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끔찍한….”
블레이크를 지나 엘리제에게 온 시에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폈다.
“나는 괜찮네, 라우디아 양. 그런데 어딜 갔다 오는 건가.”
숨을 몰아쉬고 있는 거로 보아 시에나는 복도에 있지 않았던 듯했다.
“어떤 기사분이 대공님께서 절 찾으신다며 다짜고짜 따라오라고….”
시에나의 말에 방 안에 침묵이 깔렸다. 당연히 블레이크는 대공비의 시녀를 부른 적이 없었고, 이는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알았다.
“혹시 어디 소속 기사였는지 기억납니까?”
슈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얀 제복이었으니 아마 황실 소속 기사이실 거예요.”
“다시 본다면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저와 기사님을 목격한 하인들도 있어요.”
그러고 보니 갑작스러운 마력의 파동에 모두가 다급히 이 방으로 향하게 된 경위도 수상했다. 누군가 작정하고 꾸민 일일 가능성이 있었다.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군요.”
슈만이 낮게 신음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황태자를 쳐다봤다.
“일단은 태자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다소 불편하시더라도 대공비께선 글로리아의 밀실에 머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뭐? 엘리제가 왜 그래야 하지?”
블레이크는 그의 의견에 즉각 반발했다.
보통 영주성의 밀실은 주요 인물을 보호하거나 혹은 신분 높은 이를 일시적으로 감금하기 위해 사용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녀를 가두겠다는 말이니 좋게 들릴 리 없었다.
“그러는 편이 부인께 더 안전하기 때문일세. 협상을 위해 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를 모실 때 우리 중립 가문은 두 분의 안전을 약속하였네. 그런데 만약 지금의 상황이 외부에 알려지면 어찌 될 거라고 보나.”
“파렴치한 놈을 따르는 세력 따위 말살하면 그만이야.”
“블레이크! 함부로 말하지 말게!”
슈만이 기세를 끌어올려 버럭 소리쳤다. 그러든 말든 블레이크는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얼굴로 그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지금 자네는 중립을 지켜야만 하는 입장이야. 사감에 휘둘려 중대한 일을 망칠 텐가?”
“네놈이 같은 일을 당했다면 어찌했을지 궁금하군, 슈만 크롬벨. 그때도 사감 운운할 텐가.”
낮고 어둑한 목소리에 실린 경고의 뜻에 슈만은 멈칫했다. 블레이크는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프로이젠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일인 만큼 마냥 참으라고 할 순 없었다.
“만약 태자 전하께서 대공비께 못 할 짓을 저지르려 했다면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해. 이는 나, 슈만 크롬벨이 책임지고 받아 내겠네. 그러나 그건 전하께서 깨어난 뒤가 되어야 할 걸세. 그 정도의 인내심도 보이지 않을 텐가.”
슈만은 한층 누그러진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자네와 프로이젠의 기사들이 강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글로리아에 있는 모든 세력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지킬 수 없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일세. 그래서일 뿐이니 부디 나쁘게 생각지 마.”
얼핏 들으면 좋게 들려도 담긴 뜻은 협박에 가까웠다.
블레이크가 이를 갈자 엘리제가 살며시 그의 팔을 잡았다.
“저는 괜찮아요. 제 안전을 위해서라잖아요.”
슈만의 공정한 성격을 생각할 때 황태자 폭행 사건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순 없을 것이다. 양측 의견을 듣고 목격자의 증언을 확보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건 지극히 그다운 행동이었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이미 기절해 있는 사람을 때리는 건 어느 세계에서든 문제될 행동이었다. 되도록 감정 상하지 않도록 좋게 좋게 해결하는 편이 그녀에게도 나았다.
엘리제를 돌아본 그가 표정에서 분기를 지우며 말했다.
“그럼 내가 부인과 함께 있겠습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블레이크가 저와 함께 있으면 클로드를 비롯한 프로이젠의 기사들이 꼼짝할 수 없다. 여차하면 다함께 발이 묶이거나 위험해질 수 있었다.
“황태자가 깨어나면 풀어줄 텐데요, 뭐. 하룻밤만 참아요. 네?”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며 말하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참지 않을 겁니다.”
“그래요.”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 있으려니, 악마 놈의 제안에 응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렉스와 관계하는 장면을 목격당했다면 어찌 될 뻔했나. 이제껏 쌓아 온 약간의 신뢰마저 모두 깨져 버렸을 것이다.
블레이크를 놔주기 직전, 엘리제는 그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블레이크. 바트를 조심해요.”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어루만진 후, 엘리제는 한 걸음 물러났다. 실수인 척 렉스의 손가락을 힐로 콱 짓밟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