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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이 감도는 은색 머리칼에 연녹색 눈동자의 남자, 에릭 러셀이었다.







“…오라버니.”







뭐라 부를까 고민하던 엘리제는 그가 가장 친근하게 느낄 만한 호칭을 골랐다. 오답이 아니었는지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응.”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선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제 역시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짙푸른 어둠에 잠겨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시에나도 그렇지만 그 역시 그동안 여러모로 힘들었을 것이다.







“야위었네. 잘 못 지냈어?”







엘리제의 말에 그가 실소했다.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하나뿐인… 오라버니인데.”



“내가 만나자고 안 했으면,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면서.”







역시나 그는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대충 얼버무리며 좋게 좋게 속여 넘기는 건 불가할 것 같았다. 엘리제는 옅은 미소만 입가에 띤 채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고마워. 정말 와줄 줄은 몰랐는데.”



“왜 보자고 한 거야?”



“네게 할 말이 있어서.”







할 말이 있다고 해놓고 그는 입을 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질문을 던진 건 엘리제였다.







“내전은 왜 일으킨 거야. 황제가 되진 못해도 황족으로서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원작에서의 2황자는 국정엔 관심이 없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황태자를 보다 못해 황궁을 뒤엎는다. 그러나 아직 황태자는 그 정도로 실정하지 않았고, 지금의 에릭이 그런 데 관심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지루해서.”







역시나 말도 안 되는 대답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뭐든 다 할 수 있으니 더는 하고 싶은 게 없더라고. 그래서 그랬어.”







엘리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오라버니에겐 여자가 필요해. 내가 진짜 괜찮은 아가씨를 한 명 알거든? 소개해 줄게.”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도 없으면서.”



“사귀었지.”



“대공비가 되더니 그새 친구도 생겼어?”



“응.”



“좋겠네, 내 동생.”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는지 손을 들어 올렸던 그가 멈칫했다. 주먹을 말아 쥐고선 천천히 떨어뜨렸다.







상실감이 얼룩처럼 밴 그의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눈을 내리뜬 채로 그가 말했다.







“엘리제. 나는 네 남편을 죽일 거야.”







그건 정말 엘리제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언이었다.







“황태자를 치우고, 대공을 죽이고, 황제가 되어 너를 돌려받을 거야. 그러려고 시작한 거야. 이 모든 걸.”



“미친…?”







절로 벌어진 입술에서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내뱉고도 실수인 줄 깨닫지 못하여 커다래진 눈만 연신 끔뻑였다. 그가 시에나를 통해 만나자는 서신을 보내왔을 때보다 더 놀랐다.







“알아, 나도. 내가 미쳤다는 거.”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 그의 입가에 지어졌다.







“하지만 엘리제. 애초에 루카스 클랜튼이었던 내가 에릭 러셀이 된 것부터가 믿을 수 없는 일 아니니? 나는 진즉부터 미쳐 있었던 건지도 몰라. 정상인 건 아무것도 없어.”







에릭이 말한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엘리제는 그의 말을 납득했다. 애초에 루카스 클랜튼의 모티브인 카인 리베르토 역시 미친놈이었다. 너무 미쳐 있어서 정상으로 보였던 것뿐이다. 그러니 첫사랑에 실패하고 새로운 사랑은 시작도 못 한 그가 저렇게 미친 짓을 벌이는 걸 테다. 이해 못 할 바가 아니었다. 욕은 나올지언정.







무슨 말을 해야 이놈을 조금이나마 정신 차리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엘리제는 일단 상식적인 이야기를 그에게 늘어놓았다.







“제대로 준비는 하고 시작한 거야? 실패하면 그들이 아닌 오라버니가 죽게 돼.”



“그것도 나쁘지 않지.”



“아니, 오라버니를 따르는 사람들은 무슨 죈데?”



“무슨 죄긴. 미친놈을 주군으로 섬긴 죄지. 아무도 날 만류하지 않더라고. 그놈들도 정상이 아니야.”







그거야 아마도 이 세계에서 2황자의 운명이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맡은 역할은 2황자에게 충성을 다하여 그를 황제로 옹립하는 것이다. 시기가 당겨졌다고 해서 반대하진 않을 것이다.







“엘리제, 지금은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니잖아. 나는 네게 기회를 주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무슨 기회?”



“네 남편에게 말해. 나를 죽이라고. 그러면 끝낼 수 있어.”







웃고 있는 그는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이 말을 하려고 만나자고 했어.”







이 세상 그 누가 죽기를 바랄까. 카인이라고 정말 죽고 싶어서 죽었을까.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택했을 것이다.







죽음을 마음에 둔 이들 중 많은 수가 가까운 누군가에게 단서를 남긴다고 한다. 희미하디희미해도, 그것은 도와 달라는 신호였다. 제 손을 잡아 달라는 신호였다.







그마저도 남기지 않고, 남길 수 없는 사람이야말로 이미 절망에 잠식돼 버린 사람일 터였다. 카인 리베르토처럼.







“아니잖아. 죽고 싶은 거 아니잖아. 그렇다고 내 남편을 죽여 내게 미움받고 싶지도 않잖아.”







다행히 에릭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했다. 그녀를 만나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나는 오라버니가 황제가 됐으면 좋겠어. 내가 좋아하고 동경했던 오라버니라면 저 방탕한 황태자보다 몇 배는 훌륭한 황제가 될 거야.”



“그래서?”



“뭘 그래서야. 황제가 되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하고, 하나뿐인 동생 호강도 시켜 주고 하는 거지.”







가벼운 어조로 농담 몇 마디를 내뱉은 후, 엘리제는 에릭의 어깨너머 짙푸른 어둠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가 어째서 이토록 제 속을 뒤집는지 모를 일이었다.







죽음 후의 편안한 안식은 고사하고 끊임없이 카인 리베르토에 대해 곱씹게 만든다. 저를 죽이고 저 때문에 죽은 그를. 생각의 끝엔 너무도 무심했던 저 자신이 있어, 따갑고 아팠다.







하지만 괴로워도 생각해야만 했다. 눈앞의 남자가 카인이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할 때 머뭇거릴지. 어떻게 해야 벼랑 끝을 향해 폭주하는 중에 가까스로 브레이크를 밟을지. 무엇이 그의 약점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고 알게 되었기에 엘리제는 답을 알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그녀가 에릭과 시선을 마주했다. 웃음기를 지운 채 메마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내 인생도 끝장이야.”







가면을 벗은 그녀의 모습은 그 못지않게 피로해 보였다.







“네가 왜…?”



“황태자는 호시탐탐 나를 욕심내고 내 몸을 노려 왔어. 그놈이 황제가 되면 나를 가만 두지 않을 게 분명해.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대로 불행해지고 나는 나대로 불행해질 거야. 황태자에게 농락당하고 남편에게 미움받아 내쫓기든 맞아 죽든 하겠지.”







그의 눈이 당혹감에 커졌다.







“그럴 리가…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사실은 오라버니도 눈치챘던 거 아냐?”







체념한 목소리로 말하고서 엘리제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가 괘씸했겠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는 그에게 마음을 주고 웃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겠지. 게다가 평생 오라버니밖에 없던 내게 친구까지 생겼다고 하니 얼마나 밉겠어. 혼자 행복해진 내가 증오스러운 거지?”



“아, 아니야. 엘리제 나는 그런 게….”



“알아. 내게 무슨 좋은 날이 있겠어. 한낱 꿈일 뿐이지.”







엘리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독약이라도 가지고 오지 그랬어. 차라리 같이 죽자고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는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나는 널… 너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었어.”







입술까지 파르르 떨며 부정하는 그를 엘리제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저… 널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나에게도 너뿐이고 너에게도 나뿐이었으니까. 우린 그랬으니까.”







봄날의 새순을 닮은 그의 연녹색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엘리제, 나는 대체 어떡해야 하는 걸까. 너는 이제 나 없이도 괜찮은데, 나는 너무 불행해. 그래서 차라리 죽고 싶었어.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거야. 그뿐이었어.”







그가 털어놓는 속내가, 그를 닮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에 엘리제는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말아 쥐었다.







“그래. 나도 이렇게 오라버니 얼굴을 보니까 좋네.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엘리제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까 그가 지었던 미소처럼 우는 듯 보이는 웃음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내겐 오라버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괜찮아.”







적어도 이제 그는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제를 욕심내는 황태자를 기필코 무너뜨리고 황위를 거머쥐려 할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는, 그녀의 유일한 보호자인 블레이크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이 외의 것들은 무얼 선택해도 괜찮았다. 다른 변수들이야 사라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







에릭은 아까보다 배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포기할 수조차 없게 된 지금,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그러나 엘리제는 그런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어 미칠 것 같은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먼저 가. 함께 나갈 순 없으니까.”



“…그래.”







무슨 핑계를 대고 나왔는지 몰라도 자리를 오래 비울 순 없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지나쳐 방을 나갔다.







방문이 열렸다 닫히고, 서늘한 바람이 방 안을 휘돌다 스러졌다.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긴 숨을 내쉬었다.







“거지 같아.”







이가 악물리고 험한 말이 절로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모든 게 엉망인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죄 터지고 곪은 상처에 반창고만 덕지덕지 붙이는 기분이었다. 무엇도 해결되지 않고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어쨌든 남자 주인공의 속내를 알아냈으니 사라에게 전해 줄 차례였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방을 나가기 위해 엘리제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은색 쇠붙이에 손가락이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누군가 그녀를 뒤에서 안아 왔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블레이크도 카를리아즈도 아니었다. 섬뜩함에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 본다. 네 살 냄새.”







야살스러운 목소리는 악마 놈의 것이었다. 이를 부득 간 그녀가 팔꿈치로 명치를 찍어 버리기 직전, 그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블레이크는 어쩌고 어떻게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그는 글로리아 후작과 슈만에게 잡혀 있어. 협약서 초안을 작성 중이지.”







그래서 에릭과 그가 번갈아 빠져나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황태자가 먼저 원하는 조건을 문서화했겠고 이제 에릭의 차례일 것이다. 얼마간은 괜찮겠다는 판단이 서자 엘리제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이 여전히 얄미웠다. 얄팍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다 벌어졌다.







“시에나에게 편지 받았지?”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카인의 기억을 돌려줄 거야?”



“그럼.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러나 엘리제는 섣불리 기뻐하지 않았다. 영악한 악마 놈이 아무런 조건 없이 그의 기억을 돌려줄 리 없었다.







“조건이 뭔데?”



“역시 너와는 말이 통한다니까.”







그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사실 내가 갖고 싶은 게 하나 생겨서. 네 도움이 좀 필요한데.”



“뭔데?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제게 쏟아지는 그녀의 싸늘한 눈빛을 황홀한 듯 만끽하며 그가 입술을 열었다.







“너.”



“…….”



“너랑 섹스하고 싶어, 엘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