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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접시에 덜어 주느라 바빴다. 먹기 편하도록 한입에 들어갈 크기로 일일이 잘라 주는 모습이 아이를 챙기는 엄마 못지않게 살뜰했다.







반면 2황자는 식사에 흥미가 없는지 포도주만 간혹 한 모금씩 마셨는데, 시선은 줄곧 대공 부부에 들러붙어 있었다.







날 선 분위기를 예상했던 글로리아 후작 내외와 슈만은 이 기묘한 평화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어 연신 눈치만 살폈다.







“음식은 입에 맞으셨나요?”







후작 부인이 엘리제를 향해 물었다.







“네. 아주 맛있게 먹었어요.”







디저트로 나온 딸기 셔벗을 이제 막 해치운 그녀가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행이에요. 내심 걱정했답니다. 신경 쓴다 해도 대공성에 비할 순 없을 테니까요.”



“프로이젠의 요리장 솜씨가 대단하긴 하지요. 하지만 글로리아도 못지않네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저희 요리장이 몹시도 감격하겠는걸요.”







부드럽게 흘러가는 대화의 끝에 후작 부인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혹시 화초에 관심이 있으시면 산책 겸 저와 함께 온실에 가 보시겠어요? 지금 가면 밤에만 피는 꽃을 볼 수 있답니다.”



“어머, 그래요? 얼마나 수줍음 많은 꽃인지 궁금하네요.”



“부인.”







엘리제가 승낙할 듯 보이자, 블레이크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 곁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만류할 거라곤 예상 못 했는지 후작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침 분위기도 괜찮겠다, 내일 있을 협상에 관해 남자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라는 뜻에서 자리를 피해 주려 한 것이다. 그런데 중재를 담당해야 할 블레이크가 아내를 붙잡고 놔주지 않으니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겠는가.







후작이 슈만에게 눈짓했다. 좀 거들라는 뜻이었다. 이에 슈만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루한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부인은 보내 드리지 그러나, 블레이크.”



“지루한 이야기라…. 그렇다면 나도 굳이 이 자리에 남아 있고 싶지 않은데.”



“아니, 이보게. 그러지 말고….”



“왜. 내 아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없지.”







블레이크의 말에 얌체같이 끼어들어 답한 건 렉스였다. 턱을 괴고 엘리제를 바라보며 그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녀도 우리와 시간을 보내는 편이 더 즐거울 거야. 어떻게 생각해, 동생?”







저를 끌어들이는 렉스의 질문에 에릭의 시선이 엘리제를 향했다. 엘리제 역시 힐끔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내 담담함을 유지했던 그의 표정이 일순 흐트러졌다. 그런 저 자신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상관없습니다. 대공비가 들어선 안 될 이야기는 없으니까요.”







억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고서 그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에게서 시선을 뗀 엘리제가 블레이크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대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어떻게 할까요?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당신 뜻에 따를게요.”



“…….”







함께 있길 바라는 듯한 렉스와 에릭의 말에 블레이크의 기분은 몹시도 저조해졌다. 엘리제가 제 시야를 벗어나는 것도 싫지만 그들의 눈길이 닿는 건 더욱더 싫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엘리제, 온실 구경은 나중에 나와 함께하지요.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찍 쉬는 게 어떻습니까.”







루카스 덕에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러고는 글로리아 후작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작 부인, 다음에 꼭 다시 초대해 주세요.”



“물론이지요. 제가 미처 배려치 못했네요. 부디 편히 쉬세요.”







블레이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리제 역시 따라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남은 이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그녀는 블레이크와 함께 만찬장을 벗어났다.







문을 나선 블레이크가 복도에 서 있던 루카스를 불렀다. 올리비아는 이동 마법진에 마력을 쏟아부은 후 휴식 중이었기에 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클랜튼 경. 나는 다시 들어가 봐야 하네.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절대 엘리제 곁을 비우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는 엘리제를 보고도 당부했다.







“가능한 한 빨리 이야기를 마치고 갈 테니 답답하더라도 방에 있어요.”



“염려하지 말고 편안히 대화 나누세요. 아무 데도 가지 않을게요.”







한참을 미적대며 엘리제의 손을 놔준 블레이크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만찬장에 들어갔다. 그런 그를 잠시간 지켜보던 그녀는 한숨을 삼키곤 몸을 돌렸다.







복도를 걷다가 둘만 남았을 때, 그녀가 투덜댔다.







“어떻게 제정신인 사람이 없어.”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 저자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럽다.”



“그렇죠? 주인공들도 다들 좀 이상하다니까요.”



“동의한다.”







그가 맞장구쳐 주니 그나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방으로 갈 건가?”



“저는 사라에게 갈게요. 당신은 블레이크와 황태자, 2황자가 무슨 얘길 나누는지 지켜봐 줘요.”



“그건 안 돼. 네 곁을 비우지 않겠다고 블레이크와 약속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해요?”



“응.”







엘리제는 간만에 속이 터질 뻔했다.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복도를 훤하게 만드는 잘난 얼굴을 보고 나니 예상대로 화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제가 간절히 부탁해도요?”







눈웃음을 살살 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그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내겐 너의 안위가 가장 중요해.”



“하지만 저들의 대화는 꼭 들어 둬야 한다고요. 그렇다고 메리나 쿤에게 엿듣고 오랄 순 없잖아요. 백 퍼센트 들킬 거야.”



“그건… 그렇지.”



“그러니 당신밖에 없어요.”



“…….”



“얌전히 사라 곁에만 있을게요.”







그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런 루카스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엘리제가 살며시 그에게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키스 열 번 해 줄게요.”



“엘리제, 이러지 마.”







괴로운 표정으로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엘리제는 포기하지 않고 그가 물러선 만큼 다가갔다.







“당신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만큼.”



“…….”



“꿈쩍 안 하는 걸 보니 내가 싫은가 봐.”



“아니야!”







결국 그는 함락당했다.







“정말로 사라 곁에만… 있을 거지?”



“당연하죠. 나 혼자 어딜 가겠어요.”







깊게 한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데려다줄게.”



“고마워요, 칼. 역시 당신이 최고예요.”







환히 웃는 그녀를 보며 그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메리의 친척으로 프로이젠에 알려진 사라는 줄곧 그녀와 함께 머물고 있었다. 엘리제를 위해 준비된 손님방과 같은 층이었기에 여차하면 재빨리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엘리제. 여기 꼭 있어야만 해.”



“알겠어요. 염려하지 말아요.”







거듭 다짐을 받고서야 그는 테라스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요원님이 엘리제 님을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봐요.”







사라의 말에 메리 역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저런 요원님은 처음 봐요.”



“같이 일하면서 정이 많이 들었지.”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엘리제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지속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건 모두가 알았다.







“아까 확인해 보니 균열이 줄었더라고요. 애 많이 썼어요, 사라.”



“이제 시작이죠.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해요. 조금만 삐끗해도 세계가 와장창 깨져 나갈 거예요.”



“그런가요.”







엘리제는 사라가 띄워 놓은 디스플레이를 바라봤다. 원본의 까만 글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빨갛게 수정돼 있었다. 이쯤 되면 거의 다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라, 물어볼 게 좀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키보드에서 손을 뗀 그녀가 안경을 고쳐 쓰며 엘리제를 쳐다봤다.







엘리제는 원작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그녀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에 관해 자신이 생각한 가능성을 사라에게 이야기했다.







“기우일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앞으로의 일에 변수가 될까 해서요.”



“흐음…. 가능성이 없는 얘긴 아니네요. 캐릭터를 본떠 온 정도가 크다면요.”



“선례가 있었나요?”



“아니요. 제가 알기론 없어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니까요.”







그건 그랬다. 특정 인물을 모티브로 한 시나리오도 흔치 않은데 거기에 출연할 예정이었던 영혼이 중간지대 조사관이 되어 다른 인물로 활동하다니. 같은 날 세 번 벼락 맞을 정도의 확률이 아닐까.







“어쨌든 염두에 두어야겠네요. 어쩌면 에릭 러셀의 돌발 행동이 엘리제 님과 관련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나기로 했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 더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듣고 나서 얘기해 줄게요.”



“네. 그런데 엘리제 님….”







사라가 뭔가를 얘기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라는 재빨리 디스플레이를 종료하고 키보드를 숨겼다. 엘리제의 눈짓에 메리가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시에나였다.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본 그녀가 엘리제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비전하. 역시 여기 계셨군요.”



“내게 볼 일이 있어서 온 건가?”



“네.”







총총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엘리제에게 바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엘리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렉스나 에릭, 둘 중 하나가 시에나를 통해 비밀스러운 만남을 청한 것이리라.







‘루카스가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대화 중일 텐데, 어떻게 빠져나왔지.’







어쨌든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블레이크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혼자 있을 시간이 앞으론 거의 없을 것이다.







엘리제가 곧장 시에나를 따라가려 하자 메리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도 같이 갈까요? 위험한 일이 생기면 어떡해요?”



“그럴 일이 뭐 있겠니. 걱정할 필요 없어. 금방 다녀올게.”







만남을 청한 사람이 에릭이든 렉스든 그녀를 위협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괜히 메리를 데려갔다가 대화를 제대로 못 하면 낭패였다. 상시 착용 중인 호신용 마법 아이템과 허리춤의 채찍도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







“비전하의 안전은 제가 보장할게요.”







시에나까지 거들자 메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소리 지르세요. 제가 바로 달려갈게요.”



“그래그래.”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 엘리제는 시에나를 따라 방을 나섰다. 멀리 가야 했다면 조금 꺼림칙했을 텐데, 시에나가 안내한 곳은 같은 층 복도 끝에 있는 손님방이었다.







“마나를 건 맹세를 했으니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문밖에 서 있을게요.”







문을 열기 전에 시에나가 말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나중에 꼭 보답하마.”







그녀에게 살포시 웃어 보인 후 엘리제는 홀로 방에 들어갔다. 따로 머무는 이가 없는지, 벽난로에 불을 지피지 않아 공기가 서늘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 기척이 먼저 느껴졌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온 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와 줬구나, 엘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