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보기
-107-





“설마 제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는 당혹감에 굳어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해 주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있어요. 때론 지난 일들을 돌이키며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게 되기도 하죠.”







엘리제는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퍼진 동요를 웃는 낯으로 들여다봤다.







“처음부터 우린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작한 사이잖아요. 알 수 있는 거라곤 외모뿐이었죠. 솔직히 말하자면 전 당신이 너무 잘생겨서 호감이 갔어요. 당신도 마찬가지겠죠.”







블레이크는 첫날부터 제게 잘해 줬다. 그녀 역시 첫날부터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이러쿵저러쿵 대단한 이유를 붙이려 애쓸 필요 없이 예쁘고 잘생겨서다. 시작은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좋은 이유가 늘어났어요. 당신은 제게만 다정하죠. 다른 이들에겐 냉정하며 계산적이고요. 그래서 더 만족감을 느껴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냉정하며 계산적’이라는 평을 듣는다면 누구나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에 따라붙는 말이 ‘만족감’이라면 더더욱.







“…엘리제.”



“전 특별 대우받는 걸 좋아하고 남편의 사랑에 우쭐해지는 여자예요. 이런 사람이라서 실망했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가 허둥대며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엘리제는 더욱 활짝 웃으며 블레이크의 손을 잡아당겼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의 상체가 그녀에게로 기울어졌다.







“당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요. 저 때문에 얼마나 자주 질투하는지, 속상한지, 기쁘거나 우울한지. 모든 걸 당신 입으로 듣고 싶어요. 그러면 정말 황홀하도록 기쁠 거예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엘리제는 그의 입술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더 깊이 알게 되면, 서로에 대한 사랑 또한 깊어지지 않을까요.”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새파란 눈동자 안에 서렸던 복잡한 감정들이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내가….”







엘리제의 엄지에 지그시 눌렸던 그의 입술이 한참 만에 열렸다.







“얼마나 자주 질투하는지 궁금하다 했지요. 엘리제, 나는 매 순간 질투합니다. 루카스 클랜튼에게만이 아닙니다. 부인과 친근한 모든 이들에게 질투가 납니다. 부인의 눈길이 머무는 것, 손길이 닿는 것, 심지어 이 몸을 감싼 천 쪼가리에도 나는 질투합니다.”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엘리제의 블라우스 깃을 가만히 매만졌다.







“나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곳에 가두어 두고 싶은 난폭한 욕망이 매 순간 치솟습니다. 그러나 내 안의 어떠한 목소리가 이를 막습니다. 자유롭게 놓아두라 말합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엘리제는 가슴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부인을 잃게 되면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인의 건강과 안전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클랜튼 경을 예외로 뒀을 뿐, 나는 절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모태에서부터 군주로 태어나 평생을 지배하며 소유했습니다. 나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엘리제가 블레이크에게서 카인의 모습을 찾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카인은 그녀를 독점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관계를 맺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시시콜콜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







“엘리제, 이런 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속내를 털어놓은 그는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그건 엘리제가 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날 것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었다. 싫다고 도망가도 기어코 그녀를 제 곁에 붙들어 놓고야 말 저 자신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디까지 냉혹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럼요. 당신이 절 존중해 주는 한 그 무엇도 변치 않을 거예요. 블레이크, 당신만이 저를 가질 자격이 있잖아요.”







엘리제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맞춤을 졸랐다. 안심한 듯, 그는 엘리제에게 입을 맞춰 주었다. 부드럽고 애틋한 입맞춤이었다.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이며 엘리제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생각보다 더 어려워지겠네.’







설정값이 남아 있는 몸에 억지로 들어가게 되면 보통은 빙의한 영혼 쪽에서 기존의 설정값을 흡수하게 된다. 창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일 뿐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카인의 경우엔 기억을 잃어 영혼이 손상된 상태였다. 블레이크에게 카인의 인격이 흡수된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렉스와 계약한 건 블레이크가 아닌 카인이다. 블레이크가 ‘내면의 소리’ 정도로 여기는 카인의 인격을 끌어내지 않고서는 내기의 단서를 얻을 수 없다.







‘역시나 기억을 되찾게 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나.’







야비한 악마 놈이 만만치 않은 대가를 요구할 것이 빤했다. 그는 이미 엘리제가 카인을 쉽게 포기 못 한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편지를 보낸 지 하루 만에 재깍 달려오지 않았나.







회심의 사랑 고백이 통하지 않는다면 또 어떠한 시도들을 해야 할지 속이 답답했다. 내기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었건만, 처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었다.









***











오인 이하의 적은 인원을 위한 소규모 이동 마법진과 달리 대규모 이동 마법진은 출발지와 도착지에서 동시에 마력을 주입해야 했다. 백여 명이 넘는 숫자가 한 번에 이동하려면 필요한 마법사의 숫자도 족히 열 명은 되어야 하는 데다가 마력의 주입이 원활하지 않으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에 불안정한 상황에선 대규모 이동 마법진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젠의 기사들이 바짝 긴장하였던 것이 무색하게 그들은 순조로이 이동 마법진을 통과하여 글로리아 영지에 들어섰다.







그리고 영주성 밖에서 기다리던 황태자와 2황자, 양측 진영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혼자 나가려는 블레이크를 엘리제가 붙잡았다.







“같이 가요. 저도 인사해야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마도 곧 만찬이 있을 테니 그때 인사하면 됩니다.”







빤히 바라보는 엘리제의 시선에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지금 질투하는 겁니다. 나는 부인이 저들을 만나는 게 싫습니다.”



“내게 아무 의미 없는 사람들이라도요?”



“그렇다 할지라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한번씩은 손을 뻗쳤으니까요.”







납치한 전적이 있는 에릭은 당연하지만, 렉스가 찝쩍댔던 것도 그는 놓치지 않고 마음에 두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다녀오세요.”







이토록 대놓고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그를 홀로 보내고 마차에 남았다.







무료함에 커튼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블레이크와 슈만, 렉스와 에릭의 모습이 보였다.







‘쟤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나.’







렉스의 경우엔 악마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으니 알아서 만나러 오겠지만 에릭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루카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을 빤히 주시하고 있을 때 문득 렉스와 에릭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제는 눈이 마주치기 전, 도로 커튼을 내렸다.







블레이크는 엘리제가 동행할 것임을 미리 말해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그들이 모를 리 없다. 블레이크 혼자였다면 굳이 말이 아닌 마차를 탈 이유가 없으니.







‘렉스는 그렇다 치고 에릭은 대체 왜 날 보자고 한 걸까.’







시에나에게로 방향을 틀었어야 할 관심이 아직도 제게 들러붙어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클랜튼 후작 때문인가?’







2황자 에릭의 기억을 흡수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 친어머니는 클랜튼 후작 부인이다. 임신한 그녀와 배 속 동생을 위해 후작의 구명을 원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려면 엘리제의 선처가 필수였다.







‘아니면 혹시….’







시에나가 ‘동경’을 말했을 때부터 마음에 걸린 게 하나 있었다.







본래 엘리제는 <타락한 연인>의 주인공, 시에나 라우디아 역에 캐스팅됐었다. 엘리제가 알기로 이는 시나리오 원작자의 요청이었다. 처음 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신인 시절의 엘리제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엘리제와 이미지가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캐스팅을 고집했다고 들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엘리제의 모습은 신인 시절 그녀가 꿈꾸던 모습과 흡사했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여유로운. 정상에 서 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오롯한 자신감이 모든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이. 그렇게 되기 위해 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 얼마나 노력하고 애써 왔나.







변수가 있다면 그래서일 거란 생각이 얼핏 들었다.







‘루카스 클랜튼의 원형도 카인이랬으니까.’







그에게 시에나 이전의 첫사랑이 있는 것도 비슷했다. 과거 카인은 인터뷰에서 열네 살에 첫사랑과 첫 키스를 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극단에 있던 여배우인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건 루카스 클랜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첫 키스를 한 나이와 장소까지 똑같았다.







만약 그러한 원작의 설정이 이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하면, 엘리제 자신의 존재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것도 모르고 나를 이 세계에 보냈겠어?’







중간지대 환상 컨트롤타워의 일 처리가 미덥지 못한 게 사실이라 영 불안하긴 했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제 잘못은 아니니 상관없었다.







‘사라에게 말해 두면 알아서 판단하고 대처하겠지.’







엘리제는 습관적으로 반지를 두드렸다. 여전히 지도에 보이는 회색 점은 블레이크와 렉스, 에릭과 바트뿐이었다.







『시나리오 완성률: 78퍼센트(수정 중) / 세계의 균열: 45퍼센트』







사라의 편집 작업 덕분인지 균열도가 4퍼센트가량 줄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홀로 이 정도까지 막아 내다니, 대단하달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시나리오의 완성이 아니었다. 일을 그르쳐 포상이고 뭐고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손에 쥐어야 할 것이 있었다.









***











이미 늦은 저녁이었기에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만찬장으로 바로 안내되었다.







만찬에 참여한 사람은 성의 주인인 글로리아 후작 부부, 황태자와 2황자, 프로이젠 대공 부부, 슈만과 그의 약혼녀 바네사 글로리아였다.







어제까지 서로의 목에 검을 겨누었던 형제를 초대하여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건 꽤나 큰 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기사들은 만찬장에 따라 들어오지 않았으나 어차피 황태자와 2황자는 마법적인 재능이 특출난 이들이었다. 언제든 만찬장이 전쟁터로 변할 수 있단 소리였다.







그러나 모인 이들 중 긴장한 기색을 보인 건 바네사 글로리아뿐이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한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후작 부부는 다른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네사를 돌려보냈다.







그러든 말든 엘리제는 태연히 관자 요리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당장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맛있는 음식과 질 좋은 포도주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나.







“잘 먹네.”







얼빠진 목소리로 황태자가 중얼거렸다.







“…….”







엘리제는 당연히 모른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