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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실… 처음 뵌 순간부터 비전하를 동경해 왔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크나큰 영광일 것 같아요.”
“동경? 나를 말인가?”
엘리제는 당혹감에 눈을 깜빡였다.
“우리 엘리제 님의 카리스마가 하늘을 찌르긴 하지!”
메리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제가 칭찬을 들은 양 목에는 빳빳하게 힘까지 들어가 있었다. 메리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엘리제는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뭐, 황후 폐하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신분이니 어린 영애의 눈엔 내가 좋게 보일 수도 있겠지. 영애가 내게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원한다면 잠시간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아…!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그래.”
“감사합니다! 성심껏 모실게요!”
시에나는 그야말로 뛸 듯이 기뻐했다. 양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소녀처럼 환히 웃었다. 메리 역시 제 후배가 생긴 것이 기쁜지 웃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오늘 중으로 출발할 것 같으니 둘이 함께 내 짐을 좀 꾸려 주겠니?”
“네, 엘리제 님. 라우디아 양, 날 따라와요!”
씩씩하게 대답한 메리가 시에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네, 저 그럼….”
“그래그래, 어서 가 보렴.”
엘리제는 손을 대충 내저어 그들을 내보냈다.
시에나가 메리와 함께 응접실을 나간 후, 비스듬히 열려 있던 옆방 문을 열고 피터가 들어왔다. 시에나의 속내를 듣기 위해 미리 불러 두어 지켜보게 한 것이다.
“시에나 양은 여전히 겉과 속이 똑같군요. 시녀로 지원한 것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그래요. 그런 것 같네요.”
이토록 친해지고자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워낙에 모든 것이 틀어진 상황이었다.
“당분간은 피터가 시에나를 좀 지켜봐 주세요. 어차피 바트의 경우엔 속내가 읽히지 않는다면서요.”
“맞습니다. 안 그래도 그쪽은 지켜보는 것도 수월하지 않아서 쿤에게 맡긴 참이었습니다.”
“잘했어요. 아,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필요한 게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글로리아 영지에선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힘들 거예요.”
“네, 그러지요.”
피터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제 님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래 봤자 다 망해 가고 있는데요.”
“이보다 심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그냥 넘길 수 없는 피터의 말에 엘리제가 놀라서 물었다.
“이보다 심하다니…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
“네. 세계 멸망은 오히려 다행인 측에 속합니다. 무한 타임 루프에 들어가 완결도 맺지 못하고 조사관이 갇힌 적도 있습니다. 구출하는 데 백 년이나 걸렸지요.”
“…아.”
같은 시간이 무한히 반복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번엔 잘 될 겁니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드는군요. 그러니 엘리제 님도 부디 힘내십시오.”
“고마워요, 피터.”
근사한 미중년의 위로에 엘리제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뭇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황태자와 2황자 모두 협상 제의를 받아들였다. 제도의 이동 마법진은 여전히 불통이었으나 글로리아 영지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아 저녁 무렵엔 도착할 수 있을 거라 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가장 서둘러야 하는 건 프로이젠 측이었다.
마법진을 통해 글로리아 영지까지 간다고 쳐도, 한 개 기사단이 움직이는 대규모 이동인 만큼 준비할 게 많았다.
결국 성을 나서게 된 건 늦은 오후였다.
출발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에 엘리제는 루카스와 함께 본관을 나섰다. 열린 문을 통과하는 순간 백여 명에 달하는 기사들의 시선이 한번에 모여들었다.
프로이젠의 기사단복을 입은 루카스의 모습을 보는 건 그들 역시 처음인지 신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엔 동경과 경계의 시선도 섞여 있었다.
제도의 타운하우스에서 루카스가 블레이크와 겨뤄 호각을 이루었다는 소식은 이미 기사단 내에 알려져 있었다. 여태껏 블레이크와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제국의 검, 슈만 크롬벨뿐이었다. 그러니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실력으로만 놓고 보아도 루카스 클랜튼은 프로이젠의 기사단장들보다 앞선다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후작위까지 승계받을 예정이니 앞으로 그 누구도 그의 자리를 넘볼 수 없을 것이다.
외모마저 눈부신 남매가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루카스 때문이 아니더라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기사단 앞에 서 있던 클로드가 엘리제를 위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글로리아엔 경이 동행하는 건가?”
마차에 오르기 전, 엘리제가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저와 청의 기사단 전원이 주군과 비전하를 모실 것입니다. 비전하의 호위는 클랜튼 경과 상급 마법사 올리비아가 전담하기로 했습니다.”
“상급 마법사?”
엘리제가 반문하였을 때였다.
“네, 저예요!”
마차 뒤에서 여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늘색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아 묶고 로브를 걸친 그녀는 엘리제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비전하. 상급 마법사 올리비아예요. 제가 늘 곁에 있을 테니 안전은 염려 마세요.”
‘올리비아’라는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보던 엘리제는 그녀가 바로 루카스에게 두 번이나 납치당했던 그때 그 마법사임을 깨달았다.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으나, 엘리제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믿음직스럽군. 잘 부탁하네, 마법사 올리비아.”
엘리제의 호의적인 인사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토록 아름답고 상냥한 분을 비로 맞이하시다니. 대공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나야말로 행운이지. 그분 같은 남편도 없다네.”
올리비아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엘리제의 짐을 마차에 실은 메리와 시에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메리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올리비아를 쳐다봤다.
“엘리제 님은 제가 지켜 드릴 거예요. 저야말로 비전하의 최측근 시녀, 메리 브룩이니까요!”
“어머, 그래요?”
올리비아가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놀라는 척했다.
“창칼이라도 날아오면 어쩌려고.”
“까짓 창칼쯤이야 손으로 덥석 잡아서 꾸직…!”
엘리제가 재빨리 메리의 입을 막았다. 꾸직은 무슨 놈의 꾸직인가.
“…그렇게 막아 줄 기사들이 있으니 걱정 없다, 이 말이지?”
맞다고 하지 않으면 손을 떼 주지 않을 눈치였기에 메리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엘리제는 메리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메리는 내 사촌의 처제의 시녀와 육촌지간이라 늘 내 걱정뿐이라네.”
“네? 아…. 그, 그…렇군요.”
“다소 철이 없네만 착하고 순수한 아이이니 혹 실수하더라도 너그러이 봐주게.”
“물론이죠. 우리 잘 지내 봐요, 브룩 양.”
올리비아가 먼저 손을 내밀자 메리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새침하게 손을 맞잡았다. 어떻게든 ‘악역 시녀’라는 본래의 역할에 충실해 보려는 듯했다. 엘리제의 시선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시에나 라우디아 양일세.”
“라우디아 양, 반가워요. 올리비아예요.”
“네, 마법사님.”
옆에 서 있는 루카스가 신경 쓰였는지, 시에나는 올리비아와 짧게 인사를 주고받고선 고개를 푹 숙였다. 저지른 일이 있으니 떳떳하게 그와 마주하기 쉽지 않았다.
반면 루카스는 제가 두 번이나 납치, 감금했던 올리비아 때문에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무를 위한 행동이라도 죄책감은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엘리제는 먼저 마차에 올랐다. 올리비아가 냉큼 올라타 엘리제 곁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이에 질세라 메리도 마차에 올랐다. 망설이던 시에나도 따라 탔다.
여자 넷이 탄 마차 내부를 루카스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강렬한 부러움을 눈치챈 건 올리비아뿐이었다.
“경도 마차에 타고 싶으세요? 자리 좀 마련해 드려요?”
“어떻게 말입니까?”
농담으로 한 말에 루카스가 너무도 반색하자 모두가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클로드가 조용히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러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경. 어차피 저들 모두 쫓겨날 테니까요.”
“……?”
그러는 사이 블레이크가 슈만과 함께 나왔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흑마 고삐를 종자에게 받아 루카스의 두 손에 꼬옥 쥐여 줬다.
“내가 가장 아끼는 말이네. 줄 테니 경이 타도록 해.”
“감사합니다.”
다정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슈만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직후, 내팽개치듯 루카스의 손을 놓은 블레이크가 클로드에게 물었다.
“엘리제는?”
“벌써 마차에 오르셨습니다. 마법사 올리비아와 함께요.”
클로드의 말에 마차 문을 벌컥 열어젖힌 블레이크가 미간을 찡그렸다.
“올리비아, 자네 마차는 저 뒤야. 내려.”
그는 가차 없이 올리비아를 쫓아냈다.
“우와. 굳이 쫓아내시다니. 야박해라.”
“부부는 마차를 함께 타야 하는 법이지.”
“보통은 여자들끼리 타게 두거든요?”
“잘됐군. 자네는 다른 두 레이디와 함께 정담을 나누면 되겠어. 심심할 틈이 없겠네.”
“어휴, 알겠습니다. 힘없는 마법사가 내려야지.”
투덜대는 올리비아를 따라 메리와 시에나도 슬그머니 마차에서 내렸다. 엘리제만 남자 블레이크는 곧장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아 버렸다.
“제 말이 맞지요?”
“…….”
거보라는 클로드의 말에 루카스는 한층 더 우울해진 얼굴로 블레이크의 흑마에 올라탔다. 엘리제와 단둘이 마차에 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블레이크가 몹시도 부러웠다.
한편, 일련의 일들을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심드렁히 지켜보던 엘리제는 블레이크가 마차 문을 닫고 제 앞에 와 앉자 생긋 미소 지었다.
“블레이크.”
달콤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블레이크가 마주 웃어 주려던 순간,
“당신, 여자한테도 질투하나 봐요.”
약한 곳을 쿡 찌르는 그녀의 말에 어색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요?”
“내가 부인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기에 다른 이들을 내보낸 것입니다.”
“아하, 그런 거군요.”
엘리제는 짐짓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괜히 좋아했네요.”
“괜히 좋아했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질투한다는 소리는 그만큼 애정이 있다는 소리니까요. 당신이 절 너무 사랑해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질투하는 줄 알았죠.”
심중을 찌르는 그녀의 말에 그의 동공이 티 나게 흔들렸다.
“그렇다고 해도 질투라니….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반대 상황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친하게 지낸다고 제가 질투하면.”
“전혀 기분 나쁠 것 같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조금, 기쁠 것 같기도 하군요.”
“마찬가지예요.”
엘리제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저는 당신이 솔직하길 원해요. 완벽한 모습만을 보이려 자신을 숨기면 거리감만 생길 뿐이에요.”
“…하지만, 모르는 편이 나은 것도 분명 있지 않겠습니까.”
“평생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엘리제가 그에게 진실한 모습을 밝히라며 종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 시간이 정말 촉박했다. 떠보고 찔러 보기만 해서는 부족했다. 루카스의 조언대로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속내를 확인해야 했다.
15년을 가까이 지냈음에도 엘리제는 끝까지 카인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사람에 대한 관찰력과 통찰력이 대단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파악할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엘리제는 그런 쪽 재능이 별로였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성정 탓도 있었고 깊은 인간관계를 거의 맺어 보지 않아 미숙한 탓도 있었다.
그의 내면을 뒤집어 톨톨 털어 보고 싶었다. 그 안에 분명 해답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당신, 벌써 조금 들켰는데요?”
그녀의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