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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뒤처리를 끝낸 루카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프로이젠의 기사단장들이 입는 검은색 제복 차림이었다. 늘 황실 기사단을 상징하는 하얀 제복 차림만 보다가 새까만 옷을 걸친 걸 보니 분위기부터 달라 보였다.







“네가 직접 협상장에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아….”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금발을 멍하니 쳐다보던 엘리제가 뒤늦게 정신 차리고 그의 질문에 답했다.







“시에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어요. 알고 보니 제게 전할 말이 있어서 왔더라고요.”







그녀는 시에나와의 대화 내용을 루카스에게 말해 주었다. 2황자와 황태자가 보낸 편지에 적혀 있던 내용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었다. 에릭의 편지 내용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렉스의 협박까지 듣고 나자 와락 미간을 구겼다.







“결국엔 그런 식으로 나오는군. 하긴, 지금까지가 너무 물렀던 거지.”



“그러게요. 더는 대충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놈은 그럼 슈만이 중재 요청을 하리란 걸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런 것 같아요. 직접 부탁한 건지 어쩐 건지는 모르겠지만.”







심각한 표정인 루카스를 끌어다 침대에 앉힌 엘리제가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그의 앞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그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으려니 새삼 아까의 섹스가 떠올라 속이 더웠다. 잠결에 부들부들한 걸 껴안은 것이 그의 머리였음을 깨달았다.







저녁 식사도 거르고 늦은 밤까지 정신없이 블레이크와 몸을 섞었으면서 루카스와의 섹스로 아침을 맞이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얼마나 방탕한 삶인가.







뜨끈한 목덜미를 문지르며 엘리제는 태연한 척 물었다.







“블레이크는 어디 있어요?”



“그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협상을 글로리아 영지에서 하기로 했다는군.”



“글로리아 영지요? 슈만 크롬벨의 약혼녀 가문?”



“그래. 크롬벨 공작가와 글로리아 후작가는 대표적인 중립 가문이라더군. 글로리아 영지와 제도 간 거리가 가까운 편이라 그렇게 정한 듯하다.”







루카스와 시에나가 파트너로 참석하여 중요한 일을 치르는 연회의 배경이 글로리아 후작가라는 것 외엔 그들 가문에 관한 정보가 없었다. 그래도 슈만 자체가 <타락한 연인>에서 정의로운 편에 속하였으니 약혼자 가문도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블레이크는 너를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세 개 기사단 중 하나를 전원 데려가는 걸 조건으로 걸었어.”



“아…. 다행이네요. 안 데려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될 줄 알고 그를 자극한 거 아니었나?”



“자극…이요?”







엘리제는 멈칫하여 그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저를 향한 그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그에게.”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엘리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들었…어요?”



“문 하나 너머인데 못 들을 리 없지.”







민망함에 그녀는 작게 헛기침했다.







“아니, 자극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요. 악마와의 내기에서 이겨 보려고 고백한 건데? 그럴듯하지 않았어요?”



“내기에서 이겨 보려고 했다고?”







루카스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졌다.







“뭔가 도전하는 말투 같았다.”



“…그랬어요? 진심처럼 들리지 않았어요?”



“…….”



“이상하네. 고백하는 연기도 꽤 많이 해봤는데.”







이렇게 쉽게 진심이 아닌 걸 들키다니 전직 배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엘리제.”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윗세계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이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맡으려는 배역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그런데 너는 아직 스스로에 대한 파악이 덜 된 것 같다.”







엘리제의 입이 턱 벌어졌다.







“당신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본래 저 자신을 아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지 않나. 나 역시 내가 바라는 걸 알기까지 매우 오래 걸렸다. 이조차도 완벽하진 않을 테고.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마.”







언제나 숨겨진 의도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루카스이기에 엘리제는 그의 조언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한 눈빛에 서린 염려와 애정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고마워요, 칼. 스스로에 관해 잘 연구해 볼게요.”



“그래.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도 좋아. 때론 타인의 시선이 더 객관적일 때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편이 좋을 거야. 네 생각과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카인 리베르토가 제 마음을 바랄 것으로 판단하여 찔러보고 있지만, 다른 것이 내기의 조건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럴게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크와 단둘이 있게 되면 그의 심중에 무엇이 있는지 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바트는 좀 어때요? 뭔가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나요?”



“아직까진. 겉보기엔 마치 처음부터 이 세계에 속했던 사람처럼 보여. 본래의 바트 루오스가 가진 기억을 흡수했기 때문이겠지. 쿤과 피터가 교대로 감시하고 있으니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면 말해 줄 거야.”



“감각이 매우 예민하댔어요. 조심하라고 전해 줘요.”



“그래.”







대답하며 그는 제 이마에 닿았던 그녀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에 담긴 갈망이 진득했다. 이를 눈치챈 엘리제가 다시금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손에 사르륵 감기는 감촉이 간질간질했다.







그녀가 편히 제 머리를 만질 수 있도록 그가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무릎 옆을 손으로 짚고선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순한 리트리버 같아서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편집 작업은 진척이 좀 있대요?”



“중반부까지 수정을 마쳤다고 들었다.”



“벌써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무섭게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다. 밤도 샌 모양이더군.”







엘리제는 사라의 집중력에 혀를 내둘렀다. 어쩐지 생전의 그녀 모습이 눈에 그려질 듯했다. 집필이나 편집 등 지금과 비슷한 일을 하지 않았을까.







“메리에 관해선 묻지 않나?”



“…왠지 꼭 물어야 할 것 같은 눈치네요? 걔는 지금 어디 있어요?”



“시에나 라우디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어.”



“네? 시에나한텐 왜요?”



“글쎄… 시녀 후보라나 뭐라나.”



“네에?”







시녀 후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어서 가 봐야겠네요.”







메리가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어서 가서 떼어 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하는 그녀를 그가 졸졸 따라왔다.







“……?”







돌아보자 소매를 척척 걷어붙이며 말한다.







“보필할 시녀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들었다. 내가 시중을 들어 줄게.”



“어… 괜찮은데.”



“나는 널 돕고 싶다. 안 되는 건가.”







거절하려는 순간 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음이 약해진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그에 대한 미안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그럼.”



“응. 열심히 해 볼게.”







그러나 씻으러 들어간 지 불과 5분 만에 엘리제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빨래하듯 머리칼을 벅벅 비비질 않나, 살결에 붉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천으로 문지르는 둥 힘 조절이 전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새빨개진 엘리제의 등을 보며 그는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이, 이 정도는 해야 깨끗해질 텐데.”







그는 서둘러 그녀에게 치유력을 발휘했다. 두피와 피부의 쓰라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피로와 근육통까지 덤으로 사라져 몸이 아주 개운해졌다.







“매일 씻으니까 살살 해도 충분해요.”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엘리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에게 조언했다.







“그렇군. 이번에는 아프지 않게 할게.”







그러자 이번에는 간지러워서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







당장 나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엘리제는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했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저를 씻기려 하는 그의 서투름이 싫지 않았다. 흰색 셔츠가 땀과 물에 흠뻑 젖어 조각 같은 몸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이 매우 보기 좋았다. 게다가 아까부터 터질 듯 발기해 있는 그곳을 어떻게든 가려 보려 허벅지를 찰싹 붙이고 있는 모습은 또 어찌나 귀여운가.







여러모로 참, 싫어하기 힘든 남자였다.







마침내 목욕을 마쳤을 때, 엘리제는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고마워요, 칼. 수고 많았어요.”







잔뜩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우울하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다음엔 더 잘할게.”



“어…. 다음이요? 또 씻겨 주게요?”



“응. 그래도 되지?”







엘리제는 억지로 아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야 고맙죠.”







뭐든 금방 배우는 카를리아즈가 목욕시중에도 재능을 보일진 의문이지만, 저렇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유능한 시녀장 케이트와 하루속히 재회하길 간절히 바랄 따름이었다.











***











루카스의 말대로 메리는 시에나와 함께 있었다.







대공비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녀는 총 다섯 명이었다. 메리를 제외한 네 명은 제도의 타운하우스에 남아 있었기에 임시로 엘리제를 보필할 시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영리한 하녀가 없진 않아도, 귀족 가문 출신 시녀와는 엄연히 할 수 있는 일이 달랐다. 공국의 왕비인 엘리제를 아무나 수행할 순 없었다.







그러한 곤란함을 우연히 듣게 된 시에나는 글로리아까지 가는 동안 자신이 엘리제를 모시게 해달라고 지원했다.







시녀를 들이는 일에 대해선 엘리제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기에, 시종장 버나드는 대공비께 말씀드려 보겠노라 약조한 후 그녀를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했다.







하녀들이 가져다준 다과를 먹으며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녀 또래로 보이는 아가씨 하나가 응접실에 들어오더니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시에나는 의아한 심정에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구냐고 물으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경험은 있어요?”



“네?”



“시녀로 일해 본 경험이 있느냐고요.”



“아, 아니요. 없어요.”



“그럼 내가 선배네?”







쌀쌀맞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입꼬리는 들썩이고 있었다.







“난 메리 브룩이에요. 비전하의 최측근 시녀죠.”



“아…! 그렇군요. 난 시에나 라우디아예요. 혹시 같이 일하게 된다면 잘 부탁해요.”







메리가 콧김을 뿜으며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생각해 볼게요.”







시에나는 메리라는 시녀가 왜 저러는지 몰라 웃는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메리는 뭔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티를 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러나 저를 향한 눈빛이 호기심에 초롱초롱한 데다가 관심을 받고 싶은 듯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 목적이 무엇이든 실패한 셈이었다. 아무리 못된 척해 봤자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메리, 여기서 뭐하니?”



“앗, 엘리제 님!”







엘리제의 등장에 메리가 벌떡 일어나 쪼르르 그녀에게 달려갔다. 시에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최측근 시녀이자 선배로서 라우디아 양을 관찰하고 있었어요.”







입꼬리가 살짝 씰룩이긴 했으나 엘리제는 메리의 말을 정정하거나 괜한 짓이라고 꾸중하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메리 브룩이 대공비의 최측근 시녀인 모양이었다.







“그래, 수고했어.”







메리에게 가볍게 치사의 말을 건넨 엘리제가 시에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앉지.”



“네, 비전하.”







엘리제와 시에나가 앉고 나자 메리는 냉큼 밖에 나가 찻주전자를 새로 가지고 왔다. 향긋한 차향이 그윽하게 퍼질 때쯤,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군. 프로이젠이 내전의 평화로운 종결을 위해 나서기로 했다네.”



“대강의 얘긴 전해 들었습니다.”



“얼마간 나를 보필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네. 맞아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나 역시 전하와 함께 글로리아로 향한다는 것을 아는가?”







엘리제의 질문에 시에나가 그녀를 흔들림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답했다.







“위험한 곳에 가시게 된 데에는 제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력하나마 곁에서 모시며 지켜드리고 싶어요.”



“흐음…. 나를 지켜 준다라.”







엘리제는 힐끔 메리를 쳐다보았다. 소파 곁에 서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는 그녀의 주먹은 이 세계 최강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지키는 것에 무력만이 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