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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만 해도 어떠한가. 엘리제가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주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줄곧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슈만이 나가는데 인사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슈만이 좀 더 눈치 빠른 인물이었다면 뭔가 이상하단 걸 알아챘을 것이다.







블레이크는 일어난 김에 자리를 옮겼다. 잠깐이지만 루카스와 붙어 앉아 친밀한 척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찻잔을 반대편으로 옮기고서 엘리제의 손을 살며시 잡아끌자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옆에 와 앉았다.







“단장님은 제도에서의 일 때문에 방문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뭐래요? 내전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대요?”







그녀의 목소리엔 희미한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내색하지 않아 괜찮은 줄 알았는데, 엘리제 역시 제도에서 벌어지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여태껏 무심히 넘긴 것을 자책하며 블레이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끝날 테니까.”



“네? 금방 끝난다고요?”







지나치게 놀라는 엘리제의 모습에 블레이크는 멈칫하여 그녀를 쳐다봤다.







“제국의… 차기 주인이 바뀌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쉽게 결론이 날 줄은 몰랐어요.”







변명하듯 말을 덧붙인 그녀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이 본래 슈만의 것이었던 찻잔에 닿으려는 순간, 블레이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찻잔을 들어 그녀 손에 쥐여 주었다. 비록 입도 대지 않은 것이라도 다른 남자의 것에 그녀의 입술이 닿는 게 싫었다.







“…고마워요.”







블레이크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는 동안 엘리제의 머리는 터질 지경이 되었다. 악마 놈의 협박에 내전 종료가 전제돼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제, 전에 말했지? 카인 리베르토의 기억을 그에게 돌려주고 나서도 널 원하면 그땐 나와의 계약을 고려하겠다고. 그렇게 해줄게.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나를 만나러 와. 내전은 곧 끝날 거고 그 후엔 나도 어쩔 수 없어. 카인의 영혼만 챙겨 떠나는 수밖에. 녀석이 지하 세계 가장 밑바닥에 묶여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부디 나를 원망하지 않길 바라. 추신-슈만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날 만나러 오기 수월할 거야. 나의 배려가 놀랍지?’







평소라면 ‘어지간히 급한가보다’ 하며 코웃음 쳤을 것이다. 만나러는 가 주더라도 악마 놈에게서 뭘 더 뜯어낼까 궁리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웃을 여유가 없었다. 놈의 의도를 헤아려 이용해 먹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할 이 시점에 도통 침착할 수가 없었다. 불안감이 치밀며 초조해졌다.







내전이 금방 끝날 거라는 말을 듣고 나자 그러한 증상은 한층 더 심해졌다.







혀를 델 정도로 뜨거운 차를 그 자리에서 한 잔 모두 비우고 나서야 엘리제는 태연함을 가장할 수 있게 되었다. 제가 대체 왜 이러는진 알 수 없지만, 일단 슈만이 무엇을 제안하러 왔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단장님은 그럼 내전 종결 후의 일 때문에 온 건가요?”







<타락한 연인> 원작에서 슈만 크롬벨은 2황자를 도와 황태자를 몰아낸다. 그러니 당연히 승자가 될 2황자를 지지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줄 알고 떠본 것인데 블레이크는 뜻밖의 말을 했다.







“양측을 중재해 달라더군요.”



“중재…요? 내전을 협상으로 끝내자는 소린가요?”



“그런 셈입니다.”







엘리제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는 렉스와 2황자를 각자 한 번씩은 만나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협상을 핑계로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접촉할 기회를 만들기 수월할 것이다. 게다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투가 중지될 테니 시간을 끌어야 하는 엘리제 입장에선 일거양득이었다.







“승낙하실 건가요?”



“아직 확답하진 않았지만, 굳이 그래야….”



“제도의 백성들이 모두 당신을 칭송할 거예요!”







엘리제는 그의 손을 덥석 감싸 쥐고 눈을 빛냈다.







“…겠군요. 그렇지요. 고통받는 백성들을 모른 척할 순 없습니다.”







슬그머니 말을 바꾸는 블레이크의 모습에 엘리제는 안도했다. 저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그라면 ‘내가 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번거로운 일을 한번 감수하는 것으로 아내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 아닌가.







“어머, 어쩜! 훌륭하세요. 그렇죠, 오라버니?”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훌륭한 결정 같습니다.”







아까 슈만과 대화할 때는 아무 말 않더니 엘리제의 말에 곧장 맞장구쳐 주는 루카스의 태세전환에 블레이크가 스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도 데려갈 거죠?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될 장면을 꼭 가까이서 보고 싶어요.”



“하지만 엘리제….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제도 인근 중립 가문의 영지에 가야 할 텐데, 그리되면 프로이젠의 병력을 많이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던 거였다. 엘리제를 프로이젠에 남겨 두고 가자니 혼자 있을 그녀가 걱정됐고, 동행하자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망설여졌다.







“그럴 리가요. 당신이 있는데. 오라버니도 함께 가실 테고요.”



“그렇습니다. 비전하는 제가 지킬 겁니다.”







루카스가 턱을 치켜들며 당당하게 말했다.







“…….”







할 말을 잃은 블레이크에게 엘리제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거듭 졸라댔다.







“한순간도 떨어지기 싫어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네?”







살며시 팔짱까지 꼈다.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빚은 훗날 카인 리베르토에게 꼭 받아 내리라 마음먹으며 예쁘게 눈웃음을 쳤다.







“부부는 한 몸이니 언제 어느 때든 함께해야지요.”







루카스가 그런 그녀를 재빨리 거들어 주었다.







“…….”







블레이크는 엘리제가 한마디 할 때마다 열심히 맞장구치는 루카스가 짜증났다. 엘리제의 환심을 사려고 저러는 게 분명했다.







“경.”







엘리제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루카스가 뒤늦게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좀 나가 있지.”



“…….”







낮은 목소리로 명령하는 그를 루카스와 엘리제가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분명 잘돼 가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블레이크의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루카스로서는 그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곧바로 나가는 대신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블레이크가 저를 잡아 죽일 듯 싸늘하게 노려보든 말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따 봐.”







그는 대공비가 아닌 친밀한 연인에게 하듯 존칭조차 생략한 채 다정히 속삭이고는 방을 나갔다.







막상 루카스를 쫓아내고도 블레이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엘리제도 시무룩한 얼굴로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데려가 달라는 말에 확답을 듣지 못했으나 지금은 더 졸라 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의심만 사게 될 것이다.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그가 괜스레 얄미웠다.







“이렇게 질투할 거면서.”







중얼대는 말에 그가 움찔하여 변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 부인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내보낸 겁니다.”



“아…. 할 얘기. 마침 잘됐네요. 저도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그렇…습니까?”







약간의 불안감이 깃든 목소리였다. 엘리제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블레이크. 나를 사랑한댔죠?”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본 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이에 엘리제는 생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둥글게 휘어져 반쯤 감춘 눈동자로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사랑해요.”







그 한마디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제, 지금 뭐라고….”



“엘리제 프로이젠이 당신, 블레이크 프로이젠을 사랑한다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랑 고백을 한 후 엘리제는 유심히 그를 관찰했다.







블레이크는 몹시 놀란 듯 보였다. 말을 잇지 못하며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반응은 엘리제가 원했던 것과는 달랐다.







‘소용없나.’







생전에도 해본 적 없는 사랑 고백을 갑작스럽게 그에게 한 이유는 단순했다. 혹시 이런 방식으로 내기에서 이길 순 없을까 하여 시도해 본 것이다.







악마 놈의 협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엘리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카인과 악마의 내기를 끝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궁지에 몰린 것 같은 이 생소하고 불편한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서 뭐든 해야 했다.







불행히도 회심의 카드는 먹히지 않았다. 진심이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내기의 기한이 다 되지 않아서인지 블레이크는 여전히 블레이크였다. 매우 놀랐을 뿐, 다른 특별한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원래 이런 걸 수도 있어. 먹히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이것저것 시도해 봐야 해.’







엘리제는 거의 굳어있다시피 한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충격에 흔들리는 그의 새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외모가 참 마음에 들었다. 외꺼풀의 길고 짙은 눈매와 날카롭게 뻗은 코, 일자를 그린 입술이 하나하나 제 취향이었다. 어떻게 보면 금욕적으로 보이고 때론 관능적으로 느껴져, 이면의 감춰진 모습을 상상케 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다정하면서도 차갑고 이기적인 면이 있는 것도 좋았다. 어차피 저에게만 잘하면 되는 일 아닌가. 마냥 착해서 이용당하고 휘둘리는 것보다는 적당히 이기적인 남자가 좋았다.







외모, 성격, 섹스 스타일 모두가 맞춘 듯 제 스타일이었다. 엘리제는 생전에도 이토록 자신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빈말이 아니라 그녀는 블레이크가 카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가 정말 마음에 들었었다.







‘이 정도 좋아하면 사랑이지. 안 그래?’







엘리제는 살짝 몸을 일으켜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의 장점들을 떠올리며 ‘진심’이라 할 만한 것을 끌어모았다. 그러고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사랑해요, 블레이크.”







그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갑작스레 높다란 천장이 보이자 엘리제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어느 샌가 소파에 눕혀져 블레이크 아래 깔려 있었다.







“엘리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 그가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이 정도 했으니 어쩌면 내기에서 이긴 건지도 몰랐다. 엘리제는 기대감을 품고 그를 바라보았다.







“블레이크…?”







깊고 어둑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나를 미치게 만들고 싶습니까.”







그 한마디를 내뱉은 직후 그가 집어삼킬 듯 난폭하게 입술을 겹쳐 왔다.







“……!”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 단숨에 파고들더니 호흡이 힘들어질 정도로 헤집었다.







‘이, 이게 아닌데…?’







미치게 만들고 싶냐니. 여기서 어떻게 더 미친단 말인가. 당황한 엘리제가 그의 가슴을 꾸욱 꾸욱 밀었으나 그의 커다란 몸은 꿈쩍도 안 했다.







얇은 실내용 드레스 너머 그의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래쪽 어딘가에 닿는 그의 것은 이미 단단했다. 갑자기 허벅지가 휑해졌다. 드레스 자락을 배까지 걷어 올린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