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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역시 그런 그녀의 반응에 당황했다.







“어…. 비전하께서 이유를 아실 줄 알고 미처 묻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엘리제가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니, 뭐.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네. 그저 조금… 뜻밖이어서.”



“아…. 역시 그러시군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간 침묵하던 시에나가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비전하를 뵙고자 한 황자님의 의중은 모르지만, 제가 이것을 전하러 온 이유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그래. 나도 그것이 궁금하군. 어쩌다 영애가 직접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면목 없게도, 제 사촌인 카밀라 투리스 때문이에요.”







시에나는 황태자와 함께 있던 카밀라가 2황자에게 붙잡힌 일부터 시작하여 입궁하여 에릭의 부탁을 받게 된 과정까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투리스 영애 때문이란 말이지.”







엘리제는 작게 중얼거렸다. 렉스가 카밀라를 보호하려 마음먹었다면 그녀가 2황자에게 붙잡힐 리 없다. 이 일에 뭔가 악마 놈의 꿍꿍이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카밀라에게 접근한 이유부터가 이런 때 이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서신을 만지작거리던 엘리제는 시에나의 손에 여전히 남아 있는 다른 한 통의 서신을 눈짓했다.







“그건 또 무언가?”



“이건 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편지예요.”







시에나는 다른 하나의 편지도 엘리제에게 공손히 건네주었다.







“…태자 전하까지 뵌 건가.”







역시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답게 시에나도 보통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치열하게 전투 중인 양측 수장들을 하루 만에 모두 만나고 오다니. 그러고 보니 그녀의 특기에 회유와 중재가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처음 그걸 보고 ‘외교관 하면 딱 좋겠네’ 했더니만 살뜰히도 써먹는다.







‘그럼 난 지금 회유당하고 있는 건가?’







제게 도움 될 거 하나 없는 제안임에도 서신을 펼쳐 보기도 전에 긍정적인 마음이 드는 걸 보면 시에나의 특기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얼떨결에 두 통의 서신을 받게 된 엘리제는 본래의 대공비다운 표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의문을 가라앉혔다.







“…일단은 알겠네. 서신을 확인한 연후에 영애를 다시 부르도록 하지. 그때까지 편안히 쉬도록 하게.”



“네, 비전하. 배려에 감사드려요.”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더 말할 듯하던 시에나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엘리제는 우아함을 가장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나 궁금증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탓에 계단을 오를 때부터는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에릭의 편지부터 펼쳐 보았다. 엘리제 외의 누군가 열어 볼까 봐 염려됐는지, 그의 편지는 간략했다.







‘엘리제. 널 만나 하고픈 말이 있어. 어렵겠지만 제발 거절하지 마. 나는 무력했던 과거와 다르고, 이제 잃을 것이 없어.’







협박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엘리제는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 읽다가 놓아두고 이번엔 렉스의 편지를 확인했다.







처음 펼쳤을 때는 카밀라를 불쌍히 여겨 달라며 인정에 호소하는 내용이 펼쳐지더니 잠시 후 주황색 문자가 스르르 떠올랐다.







그걸 읽는 엘리제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몸은 형제라고, 똑같이 협박질이었다.







“이런 악마 놈을 봤나.”







절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신을 움켜쥔 손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두 개의 서신을 벽난로에 던져 넣어 완전히 재로 변할 때까지 지켜본 연후, 그녀는 빠르게 방을 나섰다.











***











블레이크를 따라 대공의 집무실에 들어온 슈만은 방 한편에 서 있는 루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루카스…?”



“네, 단장님.”







루카스는 마치 황궁에서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에게 인사했다.







“어떻게 된 건가? 자네가 어째서 프로이젠에...”







블레이크를 한번 힐끔 쳐다본 루카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직 준비를 위해 왔습니다.”



“…뭐?”







슈만의 시선이 이번엔 블레이크를 향했다. 친절하지 않은 루카스의 대화 방식을 알고 있는 그이기에 좀 더 말이 통할 만한 사람에게 묻는 편이 나았다.







“이직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블레이크, 자네가 좀 설명해 보지.”



“안 그래도 말하려 했는데 마침 잘 됐군. 클랜튼 경은 오늘부터 프로이젠을 위해 일할 거야. 단장인 자네가 알아서 네프러스 탈단 처리 좀 해줘.”







슈만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아니, 왜 갑자기… 루카스는 차기 클랜튼 후작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프로이젠에 의탁하는 건 말이 되질 않잖나.”







그의 말대로 지금 루카스의 행보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클랜튼 후작이 투옥되면서 제도 귀족들은 대부분 루카스 클랜튼이 작위를 승계할 것이라 생각했다.







차기 클랜튼 후작이 네프러스의 부단장으로서 황가를 수호하는 건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가문에 종속되는 건 얘기가 달랐다.







후작은 제국에 몇 없는 고위 귀족이다. 아무리 프로이젠이 대단하다 한들 차기 클랜튼 후작을 가신으로 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문득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슈만이 멈칫하여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자네 설마, 소문이 사실인….”







블레이크는 작게 혀를 찼다.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나 엘리제와 루카스, 의붓남매에 관한 악질적인 소문은 여전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언젠간 알게 될 일이니 숨길 수 없겠군.”







루카스 클랜튼이 프로이젠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나 지금의 슈만처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명확히 해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오늘 루카스는 나와 정부 계약을 체결했지.”



“정부… 계약? 그렇다는 소리는….”







‘클랜튼 경’에서 ‘루카스’로 사뭇 친근하게 바뀐 호칭이 무슨 의미인가 하여 슈만이 눈을 끔뻑였다. 루카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블레이크가 그의 어깨에 턱 하니 팔을 올렸다.







“서로가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지. 뭘 그렇게 눈치 없게 구나.”



“…그러니까, 루카스와. 블레이크, 자네가.”



“그래.”







가장 가까이에서 대공 부부를 모시는 몇을 제외하곤 그렇게 알리기로 처음부터 얘기가 됐었다. 평범한 남녀관계라면 모를까 엘리제와 루카스는 법적인 남매지간이었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하며 남녀 가릴 것 없이 정부를 두는 일이 흔한 이 사회에서도 법적 친족 간에는 정부 계약 자체가 불가했다.







“와.”







어찌나 놀랐는지 슈만이 넋 빠진 얼굴로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것참, 놀랍군.”







블레이크와 알고 지낸 세월이 꽤 긺에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취향이었다. 물론 블레이크나 프로이젠과 루카스 클랜튼은 둘 다 사생활이 너무 건전해 의혹을 사곤 했으나 정말로 이런 이유일 줄은 몰랐다.







“자네 아내는… 이 사실을 아나?”



“당연하지. 루카스를 곁에 둔다 한들 내겐 아내가 최우선이야. 이건 그저, 여흥일 뿐이니까.”







‘이건’이라 말할 때 슬쩍 루카스를 쳐다보는 블레이크의 눈빛은 싸늘하기 이를 데 없었고 내키지 않는 접촉으로 양측 모두 살갗에 소름이 돋아 있었으나 다행히 슈만은 눈치채지 못했다.







대충 설명을 끝낸 블레이크가 팔을 거두자 루카스 역시 자연스럽게 한 걸음 떨어졌다.







“여흥….”







확실히 슈만이 볼 때도 그들은 사랑이 샘솟는 사이처럼 보이진 않았다. 색다른 취미를 공유하는 정도의 사이인 듯했다. 귀족 사회에선 꽤나 흔한 일이긴 했다.







블레이크가 먼저 소파에 앉고 나자 루카스 역시 그의 곁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슈만은 다소 쭈뼛거리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프로이젠에 들이닥친 이유나 슬슬 말해 보지.”







고개를 끄덕인 슈만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는 짐작했겠지만, 난 중재 역할을 요청하기 위해 온 것이네.”



“중재…라.”







블레이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전이 길어지면 황성은 폐허가 될 거야. 누가 승자가 되던 재건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겠지. 이로 인한 고통은 모조리 백성들의 몫이 될 것이네.”







슈만의 말에 블레이크가 코웃음 쳤다.







“중재 역할을 자처한다 한들, 황태자와 2황자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보나?”



“프로이젠을 적으로 돌리면 지금 유지되고 있는 선이 한쪽으로 와르르 무너지리란 걸 누가 모르겠나.”



“응하지 않을 수 없게 협박하라, 이 소린가?”



“그래.”







블레이크는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글쎄… 별로 내키지 않는데.”



“블레이크. 누군가 개입하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테고, 골은 점점 깊어질 거야. 늦어질수록 돌이키기가 힘들어.”



“그렇다 해도 왜 굳이 내가 나서야 하냐는 말이지. 훌륭한 중립 가문인 크롬벨 공작가와 글로리아 후작가가 있지 않나.”



“물론 우리도 나설 거야. 하지만 중립 가문 몇의 힘만으론 역부족임을 알잖아.”







슈만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블레이크의 표정은 딱히 바뀌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제도나 제국의 안정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블레이크는 황태자와 2황자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측이 괴멸하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블레이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아 보이자 슈만의 얼굴은 점차 어두워졌다. 루카스도 침묵한 채 말을 보태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를 거들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거북한 정적을 깨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들어온 것은 엘리제였다. 다과가 담긴 트롤리를 직접 끌고 오는 그녀의 모습에 루카스와 블레이크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이 일어나니 슈만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부인, 왜 이런 걸 직접….”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계실 것 같아서요.”







쏜살같이 다가간 블레이크가 그녀의 트롤리를 가져다 테이블 앞까지 옮겼다. 찻잔과 다과 접시를 직접 내려놓는 루카스와 블레이크의 모습에 슈만도 놀고만 있을 수 없어 손을 보탰다.







할 일을 빼앗긴 엘리제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 아닙니다. 이제 막 얘기를 다 마친 참입니다.”







블레이크의 태연한 거짓말에 슈만의 입이 턱 벌어졌다.







“저기, 블레이크…?”



“그럼 편히 쉬게, 슈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엘리제를 등진 채 블레이크가 눈으로 말했다. ‘가. 어서 가. 일단 가.’라고.







“…그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고 있겠네.”



“생각해 보지.”







애써 차려 놓은 다과에 손 한번 못 대보고 슈만은 그대로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뭔가 좀, 쫓아낸 것처럼 보이는데….”



“아닙니다. 슈만이 피곤한 것 같아 배려한 것입니다.”



“음…. 그래요?”







블레이크가 다급히 슈만을 내보낸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루카스 때문이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을 티 내도 되는 자신과 달리 루카스는 그래선 안 됐다. 그러나 블레이크가 봐 온 바에 의하면 루카스는 엘리제 앞에서 표정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 한결같이 무표정이던 사람이 갑자기 방긋방긋 웃으면 그 누가 의심하지 않겠는가.







되도록 루카스와 엘리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외부인에겐 보이지 말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