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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대로 다 지킬 거예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긴 뭐, 이 세계에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지키는 척 좀 하다 보면 시나리오가 끝나겠죠.”







엘리제의 말에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어서… 끝났으면 좋겠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요. 난 이미 죽었고, 어느 이야기 속에서 무슨 역할을 맡든 연기일 뿐이겠죠. 모든 이야기엔 끝이 있기 마련이고요.”







한 발 앞에 무엇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온 힘을 다해 내달렸던 삶은 끝이 났다. 이제 엘리제에겐 그때만큼의 열정이 없었다. 타고 남은 숯이 근근이 열기를 이어 가듯 그렇게 남아 있을 뿐이다.







애초에 필립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이번 일을 잘 완수하면 원하는 이야기 속 배역으로 장기 휴가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즐겁고 편하게 놀고먹으며 쉬고 싶다는 마음만 남았다.







목표로 하였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순간에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걸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던 그 순간의 기억들이 그녀를 그리 만들었다.







그저 단 하나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건 카인 리베르토, 그 하나뿐이었다.







분해서, 짜증 나서, 미안해서, 억울해서.







응어리진 평생의 감정이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고 멈춰 서게 했다. 삶은 이미 그날 그때에 끝났음에도.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임무일 뿐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생전에 하지 않던 짓도 할 수 있는 거고.”



“임무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것 맞지만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 그 마법사 납치한 거요?”



“그것도 그렇고.”



“또 뭘 어겼는데요?”



“거짓말도 여러 번 했고, 블레이크를 질투하여 나쁜 마음을 품기도 했지. 사실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치유력’을 핑계 삼아 그를 속인 덕분이잖아.”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블레이크의 정체와 과거 일에 대해 들었을 때, 나의 신념은 너를 욕심내지 말라 요구했다. 그에게 넌… 말 그대로 전부였을 테니까. 겨우 품에 끌어안은 그 하나를 욕심내는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엘리제는 귓가와 목덜미에 쏟아지는 그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괴로움을 느꼈다.







“그런데도 나 역시 너뿐이어서, 빈말이라도 놓아줄까 묻지 못했다. 네가 처음이고, 이후론 그 어떤 기회도 없을 것 같아서… 지금도 이렇게 애정을 갈구하며 매달리고 있잖아.”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절박함이 상황을 흘려 넘길 만한 모든 가벼운 말들을 그녀의 입술에서 앗아갔다.







“엘리제, 이번 일엔 많은 것이 달려 있다. 소속을 바꿀 수 있는 최후의 선택권이 주어질뿐더러 카인 리베르토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해.”



“…….”



“넌 괜찮아 보여. 언제 시나리오가 끝나 버릴지 모르는 지금도 평소처럼 침착해 보이지. 하지만 정말로 그러할까 생각하면 걱정이 된다.”







그가 하는 말엔 그녀만이 눈치챌 수 있는 어떠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악마는 사람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데 능숙하다.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지. 처음엔 약점이 아니었던 것조차 놈은 약점으로 만들어 넘어뜨린다. 그러니 그때가 오면 생각해. 놈이 주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지 말고 새로운 답을 찾아.”







그것은 엘리제가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종류의 염려였으며 신뢰였다.







“그러면 나 역시 온 힘을 다해 널 도울 테니.”







비틀리고 어그러져 원래의 모습조차 알아보기 힘든 카인 리베르토의 사랑과는 다른, 온전함이었다.







“…고마워요, 칼.”







가두듯 옭아맨 그의 팔 안에서 엘리제는 꼬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의 늘씬한 허리를 끌어안고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봤다.







“당신을 만난 건 내게 큰 행운이에요. 당신에겐, 음… 조금 안된 일 같지만.”







그녀의 진심이 섞인 농담에 루카스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런가.”







그는 엘리제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감정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고요히 내려다보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엘리제는 살며시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쿵쿵.







빠르고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에 웃음 짓던 것도 잠시, 해도 해도 너무 빨라지자 표정이 굳었다.







“…저기, 지금 무슨 생각해요?”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언제나 지나치게 솔직한 남자가 무슨 얘길 하려고 허락까지 받나 했더니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었다.







“빨고 싶다고 생각했다. 네 입술이나 목덜미, 팔꿈치, 무릎… 어디라도 허락한다면.”



“…….”



“궁금할까 봐 덧붙이자면 가장 좋은 곳은 역시 네 다리 사이, 윽.”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우리 요원님은 정말 너무 솔직하다니까.”



“그래도 꽤 많이 참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당신이요?’라는 뜻을 담아 올려다보는데, 그가 돌연 미간을 좁히고 시선을 저 멀리에 두었다. 갑자기 왜 딴청인가 싶어 멀뚱멀뚱 쳐다보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손님이 왔다.”



“손님이요?”







엘리제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난간에 붙어 섰다. 그러나 그녀의 시력으로는 외성 문이 누구 때문에 열렸는지 볼 수 없었다. 그런 엘리제를 위해 루카스가 말해 주었다.







“슈만 크롬벨.”







그녀 곁에 난간을 짚고 선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리고 시에나 라우디아.”











***











시에나의 프로이젠 방문은 원작엔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무슨 연유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슈만이 방문했으니 나가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1층에 내려가자 먼저 와 있던 블레이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불청객입니다. 굳이 부인까지 나와 볼 필요 없습니다.”



“당신 친우잖아요. 아내인 제가 함께 맞이해야죠.”







그리 말하며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대자 그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친우…까진 아니지만, 부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말끝을 흐리는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씰룩였다. 그녀가 선택한 ‘아내’란 단어가 몹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수행하여 온 다른 이들은 밖에 머물렀고 본관에 들어온 건 슈만과 그의 부관뿐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단장님.”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엘리제는 문가를 힐끔거렸다.







‘시에나는 왜 같이 안 들어왔지?’







유력 가문은 아니라도 시에나는 백작 가문의 영애였다.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손님으로서 본관에 머무는 게 당연했다. 엘리제가 슬그머니 팔짱을 풀자 블레이크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블레이크. 저는 손님들이 머물 방을 좀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신경 쓸 필요 없다는데도요.”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요.”



“으음….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블레이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슈만을 노려보았다. 슈만은 그의 그런 태도에 기막혀하면서도 엘리제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려는 듯 블레이크는 슈만과 그의 부관을 데리고 층계를 올랐다.







그들의 모습이 중앙 계단에서 사라지고 나자 엘리제는 한편에 대기 중인 하녀들을 손짓해 불렀다.







“공과 함께 온 일행 중에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있을 거란다. 너희들이 가서 살펴 주렴. 원한다면 본관 쪽 손님방을 내어 주고.”



“네, 비전하.”







하녀들에게 명을 내린 후 엘리제는 슈만이 머물 방을 살피는 척했다. 엘리제가 손님 접대에 대해 뭘 알겠냐마는, 그녀가 직접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사용인들이 좀 더 부지런히 움직였으니 무언가는 나아졌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시에나에게 보낸 하녀 하나가 돌아왔다.







“라우디아 영애가 비전하께 인사드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 1층 응접실에서 만나는 게 좋겠구나.”



“그럼 어서 가서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싹싹하며 재빠른 하녀의 뒷모습을 보며 엘리제는 시녀장 케이트를 떠올렸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제도를 떠날 때 데려왔을 것이다.







‘케이트만큼 유능한 비서도 없는데 말이야.’







메리가 치고 다니는 사고들을 티 나지 않게 수습해 주는 것만도 대단한 능력자였다.







‘그나저나 시에나 얘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







시에나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 건 황궁 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루카스 때문에 날을 세워야 하는 역할인데 상황이 영 애매했다.







‘아는 척을 해야 해, 말아야 해.’







글로리아 후작가에서 열린 연회에 루카스와 시에나가 파트너로 참여한 걸 트집 잡아 괴롭히기엔 두 사람 관계가 벌써 끝났지 않나. 게다가 제도에서 벌어진 일이 너무 심각하여 고작 그 정도 일을 화제로 꺼내는 것도 우스웠다.







고민하며 1층 응접실에 들어서자 소파 옆에 서 있는 시에나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번엔 나름 공들여 꾸며 예뻤는데 오늘은 그때보다 수척해 보였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어 여자 주인공으로서 마음고생이 클 법도 했다. 속으론 혀를 차면서도 엘리제는 나름 서늘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오랜만이야. 영애를 프로이젠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시에나가 무릎을 굽히며 공손히 그녀에게 인사했다.







“비전하. 기별도 없이 찾아뵌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제도 상황이 어지럽다는 걸 알고 있으니 개의치 말게. 앉지.”







엘리제는 시에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때맞춰 하녀들이 다과를 내왔다. 테이블에 여러 가지 종류의 케이크와 쿠키, 홍차가 준비되는 동안 엘리제는 마저 생각을 정리했다.







‘아는 척은 하되 책망은 말자. 애초에 상대가 틀렸던 거잖아.’







하녀들이 응접실에서 나가고 나자 엘리제가 먼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께 들었네. 그간 몇 번 만났었다지.”



“네….”







루카스에 관한 얘기가 엘리제의 입에서 먼저 나올 줄 몰랐는지, 시에나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역시 인연이라는 게 달리 있는가 보네. 아쉬워 말게. 영애라면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서 말인데….”







시에나가 무슨 연유로 프로이젠에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왕 만난 김에 슬쩍 운을 띄워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혹시 황자님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나.”



“…네, 네?”



“내가 전에, 아가씨를 소개해 주겠다고 약조한 적이 있거든.”







시에나는 매우 놀랐는지 동그래진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보며 입만 뻐끔거렸다.







“제도가 어지러운데 이런 얘긴 너무 태평한가? 그래도 난 조만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리라 믿네. 무엇보다 두 분은 친형제 간이 아닌가. 뭐, 우리 같이 힘없는 여자들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그저 이렇게 좋은 미래라도 꿈꿔 보는 것이지.”



“아….”







잠시간 머뭇거리던 시에나가 길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2황자 전하를 뵙고 온 참이에요.”



“오? 그게 정말인가?”







엘리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기특한 주인공들을 보았나. 알아서들 만나 주다니.’







마음 같아선 시에나의 손을 잡고 잘했다며 흔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그녀 앞에 케이크 접시를 쭈욱 밀어 주며 엘리제가 점잖게 물었다.







“그 혼란한 와중에 만날 기회가 있었다니 뜻밖이군. 그래서, 그분은 지금 어때 보였나?”



“황자님은… 매우 쓸쓸해 보이셨어요.”



“그렇겠지. 그럴 만도 해.”







시에나와 한창 알콩달콩해야 하는 마당에 혼자서 애먼 짓이나 벌이고 있으려니 얼마나 외롭겠는가. 로맨스가 가장 중요한 이 세상에서.







“그래서인지 제게 부탁을 하나 하셨어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엘리제에게 시에나가 품에서 꺼낸 두 개의 서신 중 하나를 건넸다.







“황자님이 비전하께 전해 달라고 하신 편지예요. 한번만 뵙고 싶으시대요. 마지막으로.”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엘리제가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를? 왜?”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마저 품위 없이 갈라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