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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태껏 그 생각을 못 했지?’
그 질문의 답은 그도 알고 있었다. 엘리제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지나치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잊고 있었다.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이 세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할 윗세계 요원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보물찾기’ 당시 엘리제는 루카스 클랜튼, 그리고 자신의 시녀 한 명과 함께 시합에 임했다. 꽤 초반에 고성에 진입했고 상당히 오랜 기간 최음제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 조는 멀쩡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많은 양의 목걸이를 획득했지.’
놀라운 경지의 무위와 치유력. 두 가지를 모두 가졌다는 소리다.
기사와 마법사는 귀부인 보호를 위한 방어만 가능할 뿐 수색팀 공격이 금지돼 있었다. 그렇다면 엘리제나 그녀의 시녀가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목걸이를 빼앗았을 것이다.
‘엘리제에겐 그럴 힘이 없다. 그렇다면 그 시녀가 수색팀을 제압했다는 건데.’
한낱 시녀면서 그 정도의 무위라면 평범한 사람일 리 없다. 윗세계 요원 혹은 중간지대 조사관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 윗세계 요원이라면, 치유력까지 발하여 최음제를 해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녀가 윗세계 요원이 아닌 중간지대 조사관이라면?
치유력은 윗세계 고유의 힘. 중간지대 조사관이나 악마는 발휘할 수 없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남은 한 명, 루카스 클랜튼이 최음제를 해독했다는 소리다.
‘어쨌든 시녀나 루카스 클랜튼, 둘 중 하나는 분명 윗세계 요원이야.’
주인공의 몸을 차지하는 건 거의 불가하기에 배제했던 가능성이었으나, 악마로서의 감이 이를 무시해선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간 루카스 클랜튼에게서 느끼고 있던 묘한 위화감 때문이었다.
가능성을 좁힌 렉스는 시에나에게 사용하고 있던 현혹 마법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럼 영애는 대공비를 어떻게 데려올 생각인데? 혹시 루카스 클랜튼을 이용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판단하여 말하고 있다 착각하던 이전과 다르게 지금부터의 대화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녀를 쉽게 꾀는 황태자인 만큼 반발은 거의 없었다.
“최후의 수단으론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와는 가까운 사이인가? 클랜튼 경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주겠어?”
고개를 끄덕인 시에나가 이제까지 루카스와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첫 춤을 추었던 순간부터 시작하여 데이트하던 날의 대화와 입맞춤. 그리고 최음제를 썼음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던 어젯밤의 일까지.
‘뭐? 루카스 클랜튼이 고자?’
렉스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발정하지 못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쯤 되자 상황이 명료해졌다.
로맨스 비중이 큰 <타락한 연인>에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단순히 마주치는 것만으로 호감도가 오른다. 시에나와 루카스는 원작과 동일하게 첫 춤을 추고 데이트를 했다. 파트너로서 연회에도 함께 참석했다.
그런데도 정상적으로 맺어지지 않고 이야기가 틀어진 이유. 그리고 뜬금없이 2황자 에릭 러셀이 저 혼자 내전을 일으킨 이유.
루카스 클랜튼. 그리고 에릭 러셀. 그들의 영혼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이다.
물론 단정 짓기엔 변수가 많다. 일단 엘리제부터가 원작의 대공비와는 다르다. 그의 정신을 이토록 홀려 놓을 정도로 매혹적이니 남자 주인공이나 2황자 또한 그녀에게 홀려 이상 행동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렉스는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루카스 클랜튼이 바로 윗세계 요원일 것임을.
렉스는 남자 주인공의 몸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으며 모든 감정이 없다시피 한 윗세계 요원을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악마들이 그야말로 치를 떠는 작자였다. 어서 빨리 낙원으로 꺼져 버리길 모두가 바람에도 그는 500년 동안 요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슬며시 짜증이 치밀었다.
‘엘리제는 그럼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던 건가.’
공사가 분명하고 냉정한 ‘그놈’이라면 딱히 엘리제를 돕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렉스는 기분이 나빴다.
‘나는 필요할 때만 찾으면서 여태껏 윗세계 요원과 찰싹 붙어 다녔다는 거지?’
렉스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걸 느꼈는지 시에나가 그를 불렀다.
“전하…?”
그는 시에나가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재빨리 현혹 마법을 중지했다.
“아… 미안해, 영애. 왠지 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공 몰래 대공비를 제도 인근까지 데려와야 한다니.”
“그렇…겠죠?”
“엘리제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겠군. 그럼 이제 바로 프로이젠에 가려는 거야?”
“네. 가서 엘리제 님을 뵙고 부탁드려 보게요.”
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편지를 한 장 써 줄게. 대공비를 만나면 내 편지도 함께 전해 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야.”
직접 가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녀 주위의 중간지대 조사관들과 윗세계 요원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앗…! 감사해요!”
“뭘. 다 카밀라를 위한 건데.”
렉스는 시에나가 준비해 준 종이에 서신을 쓰는 척하다가 악마의 힘을 사용하여 시간을 멈췄다. 그러고는 지하세계의 종이를 꺼내 따로 그녀에게 보낼 편지를 적고 시에나가 준 종이에 덧씌웠다.
다른 이들이 펴보면 구구절절 인정에 호소하는 내용처럼 보여도 엘리제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그가 전하려는 진짜 내용이 드러날 것이다. 악마들이 흔히 사용하는 메시지 전송 수법이었다.
작업을 마친 후, 그는 시간을 본래의 궤도대로 돌려놓았다. 형식적인 서신을 마무리하여 시에나에게 건넸다.
“자, 여기 있어. 부디 조심해서 다녀와. 성공하길 간절히 빌고 있을게.”
“네. 최선을 다할게요.”
다부지게 대답하며 시에나는 렉스가 건넨 서신을 소중히 갈무리했다.
***
조사관들과 논의를 마치고 방에서 나가려던 엘리제는 여전히 제 손을 꼬옥 잡고 있는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단단히 깍지 낀 채라 슬그머니 털어 보아도 떨어지지 않았다.
“루카스…? 나한테 할 말 있어요?”
“할 말?”
잡은 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가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있는 것 같다.”
그녀 역시 그와 대화하고픈 마음이 있었기에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래요, 그럼.”
엘리제는 그를 데리고 테라스로 나갔다. 겨울이 다가와서인지 대낮인데도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살짝 몸을 떠는 그녀를 그가 품에 당겨 안았다. 커다란 이불이 되어 그녀의 몸을 덮었다.
“이러면 안 춥지.”
웃으며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뜻하네요.”
그에게 편안히 몸을 기댄 채로 그녀가 물었다.
“할 말이 뭐예요?”
“응? 아… 그러니까 저기, 네가….”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펴 보인 손바닥 위에 놓인 건 자그마한 꽃반지 두 개였다.
“오,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아요?”
꽃반지를 집어 든 엘리제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자그마한 들꽃 여러 송이를 겹쳐 만든 것이 꽤 솜씨 좋아 보였다. 엘리제는 두 개의 반지 중 더 작아 보이는 것을 제 새끼손가락에 끼웠다.
“고마워요, 칼.”
그녀는 소녀가 아니었고, 이런 것에 의미를 둘 만큼 순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서 더 다른 귀한 보석보다 좋았다. 부담 없이 기쁘게 받을 수 있지 않은가. 블레이크에게 화관을 받을 때 유심히 보는 것 같더라니, 바로 꽃반지를 준비해 온 것도 귀엽고 재밌었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카스가 남은 하나의 반지를 제 약지에 끼웠다.
“우리는 이제 반지를 나눠 낀 사이다.”
“그러게요.”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답하는 그녀의 손을 그가 조심스레 잡아 올렸다. 그러곤 엘리제의 꽃반지 위에 입을 맞춰 자신의 숨결을 실었다.
“내가 네 곁에 있는 한 영원히 시들지 않을 거야.”
그의 눈빛에 서린 깊고 짙은 감정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엘리제는 작게 헛기침하곤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저기, 칼.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응. 뭔데?”
“당신, 블레이크랑 계약서 같은 거 썼죠?”
그녀의 물음에 답하듯 그가 안쪽 주머니에서 잘 접힌 종이봉투를 꺼냈다.
“안 그래도 네가 궁금해할 것 같아서 사본을 만들어 놨다.”
“오. 고마워요.”
그에게서 봉투를 건네받은 엘리제가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종이 다섯 장을 빼곡하게 채운 상세 조항들에 기가 질렸지만, 그녀는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았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엘리제의 미간엔 주름이 잡혔다. 블레이크가 대충 얼버무리며 보여 주지 않으려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거 좀… 불공정 계약 같은데.”
받는 대우는 가족에 상응하지만, 권리보다 의무가 몇 배는 많았다. 권리라 하는 것도 대부분 루카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즉 엘리제와 관계없는 것이 주를 이뤘다. 예를 들면 돈과 권력. 어차피 클랜튼을 계승하여 후작이 되면 부족함 없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가신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계약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부차적인 것만 잔뜩 늘려 놓은 걸 엘리제는 금세 알아챘다.
먼저 시도할 수 있는 스킨십에도 제한을 걸어 놓았고, 스킨십별 주당 최대 횟수도 정해 놓았다. 예를 들면 키스는 7회 이내였다. 그조차도 엘리제가 원하지 않을 땐 즉시 멈춰야 했다.
‘은근히 치사하네.’
섹스 후에 같이 잠드는 것도 금지였다. 관계를 맺고 나면 곧바로 침실을 나가야 했다. 피임약을 매일 블레이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복용해야 하고 체내 사정을 금지해 놓았다. 질 안은 물론 입 안에도 해선 안 된다. 정액이 그녀의 몸에 닿지 않게 하고, 실수로라도 닿는다면 곧바로 깨끗이 닦게 명시해 두었다.
예외는 오직 ‘엘리제가 바랄 때’였다. 계약서의 내용을 비밀에 부친 이상 그녀가 이상하게 여기는 걸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외에도 블레이크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조항들을 여럿 달아 두었다.
루카스가 엘리제 외의 여자와 키스 이상의 스킨십을 하는 것도 금지 조항에 들어가 있었다. 병을 옮아 올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만약 누군가를 마음에 두게 되면 계약 먼저 파기해야 했다.
또한 프로이젠을 떠나게 되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은 방문하여 엘리제의 건강을 살펴 줘야 했다. 만약에 이것을 어기면 영지전의 구실이 됨을 미리 합의 서명했다.
즉, 힘으로라도 루카스 클랜튼의 신병을 확보하여 프로이젠에 귀속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치유의 힘을 사용하려면 생명력을 소진해야 한다고 말했는데도 인정사정없구나.’
아주 인간 치료제 취급이었다.
조금씩 깨닫고는 있었으나, 그녀 앞에선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 탓에 파악하지 못했던 블레이크의 실체가 이번 일을 통해 좀 더 명확해졌다. 그는 저에게만 무르게 굴 뿐, 지극히 냉정하며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아마도 블레이크 프로이젠으로서의 삶과 인격에 카인의 영혼이 흡수된 탓도 있을 것이다. <타락한 연인> 원작대로라면 프로이젠 대공은 냉혹하긴 해도 이기적이지 않았고, 카인의 경우 이기적이긴 해도 다정하며 세심한 사람이었으니까.
엘리제는 계약서 사본을 잘 접어 루카스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그러며 농담 삼아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어떡하나. 손잡는 거 벌써 한 번 했네?”
봉투를 갈무리하려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이건… 네가 먼저 잡으려 한 거니까.”
“난 그냥 손등만 만져 주려 한 건데?”
“…….”
그의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남들이 볼 때는 그게 그거인 얼굴이겠으나 엘리제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농담이에요. 나도 당연히 손잡고 싶었지.”
“…정말인가?”
“그럼요.”
그 한마디에 온 세상이 환해지도록 웃는다. 비웃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리던 사람이 저토록 예쁘게 웃게 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이란 참 대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