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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제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엘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궁에 간다더니, 벌써 다녀온 거예요?”
“응. 네 곁을 오래 비울 순 없으니까.”
“여긴 별일도 없는데요. 메리도 곁에 있고.”
“내가 힘들어서 그래.”
사라와 메리를 지나쳐 엘리제에게 다다른 그가 그녀의 어깨를 뒤에서 포옥 끌어안았다. 그리곤 엘리제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적댔다.
“고작 몇 시간인데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괴로웠어.”
루카스의 충격적인 행동에 메리와 사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어, 어….”
“웬일이니, 웬일이야.”
그들이 어찌 보든 엘리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같이 지내다 보면 자신과 그의 관계에 대해 모두들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너무 솔직해서 탈인 윗세계 요원이 아닌가. 특별한 계약으로 묶인 이상 앞으로도 그녀는 그를 받아 줄 생각이었다.
‘그것 외에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니까.’
물론 뜻밖에 보게 된 카를리아즈의 진짜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던 탓도 없지 않았다. 아름다운 외모란 역시 최고의 개연성이 아니겠는가.
“고생했어요, 루카스. 이러고 있지 말고 앉아요. 사라는 하던 얘기 좀 계속해 줄래요?”
그를 도닥여 옆자리에 앉히는 엘리제의 모습을 번뜩이는 눈으로 관찰하던 사라가 안경을 스윽 추어올렸다.
“궁금한 게 많지만, 일단은 얘기부터 마무리 지을게요.”
“허어어….”
“메리, 집중 좀 해 주겠니?”
“흐어…?”
얼이 빠진 메리를 포기하고 사라는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겉모습이 어떠하든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끌리게 돼 있어요. 이건 로맨스 비중이 압도적인 이 세계의 가장 큰 흐름 중 하나죠. 그 둘이 자주 만날 수 있게 상황을 조정해 줬다면 로맨스 수치도 자연스레 올라갔을 텐데… 아쉽네요.”
엘리제는 기가 막혀 이마를 짚었다.
“왜 그걸 아무도 몰라서는….”
“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불가능하다고만 알고 있었다.”
루카스의 말에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남자 주인공의 몸을 차지하는 건 본래 불가능에 가까워요. 대응책도 이론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죠.”
“처음 있는 일이란 소리예요?”
“네.”
헛웃음을 지으며 엘리제가 루카스를 쳐다봤다.
“우리 요원님은 역시나 대단하네. 역사의 한 획을 긋다니.”
“특별하단 소리는 윗세계에서도 많이 듣는 편이다.”
“당연히 그렇겠죠.”
엘리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동조해 주었다. 메리든 루카스든 분명 각자의 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비슷한 이들이 몇 명 더 있었다면 윗세계고 중간세계고 진즉에 망해 버리지 않았을까.
“그럼 이제 어쩌죠? 지금 남자 주인공은 2황자 에릭 러셀 몸에 들어가 있는데.”
“네에? 에릭 러셀이요? 세상에….”
그것까진 피터에게 듣지 못했는지 사라는 경악한 얼굴을 했다.
“지금이라도 시에나와 에릭을 만나게 해 줘야 하는 건가요?”
“그러는 편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쉽지 않겠죠.”
“그래. 아직 황궁은 폐쇄돼 있어. 무슨 연유인지 전투는 소강상태지만 양 진영이 대치 중이다. 시에나 라우디아와 에릭 러셀이 이어질 만한 환경이 못 돼.”
“으음… 그렇군요.”
시에나가 지금 황궁 안에 있을 리도 없으니 내전이 끝나기 전까진 만나기조차 힘들 것이다.
“어차피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긴 틀렸어요. 이제는 균열 수치를 어떻게든 낮추면서 세계 멸망 전에 이야기를 끝내야 해요.”
“로맨스와 상관없이 균열을 막을 방법은 있어요?”
엘리제의 질문에 사라가 다른 그래프 하나를 확대하여 보여 줬다.
“<타락한 연인>에는 로맨스 말고도 또 하나의 키워드가 있어요. 바로 권선징악이죠. 이걸 완벽히 실현하면 30퍼센트를 확보할 수 있어요. 로맨스가 그나마 30퍼센트가량 달성돼 있으니 ‘기획 의도’를 50퍼센트까지 달성할 수 있는 셈이에요.”
“권선징악….”
원형의 그래프는 선과 악, 두 가지 항목의 비율을 표시하고 있었다.
“악 성향이 지금으로선 훨씬 높네요.”
“그건 내전 때문이다. 원작과는 다르게 황태자와 2황자 측 세력이 비등한 상태라 살인, 폭력이 훨씬 더 많이 발생했지.”
“이걸 어떻게 반전시키죠? 내전이 종료되면 시나리오도 끝나 버릴 텐데….”
“지금과 같은 대치 상태가 이어지도록 유도하고, 악 성향 인물들을 징벌해야겠죠.”
사라의 대답에 엘리제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조연급이긴 해도 프로이젠 대공비 역시 <타락한 연인>의 악역 아니던가. 어쩌면 징벌의 일부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마지막까지 부족하면 그때 가서 수를 쓰지, 뭐.’
다행히 사라가 생각한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 특수능력이 균열을 메우는 데 조금쯤 도움이 될 거예요.”
“사라의 특수능력이라면….”
엘리제는 ‘등장인물 열람’에서 확인했던 사라의 정보를 떠올렸다.
『사라 맥스웰(A)
나이: 28세
성향: 낭만적 예술가
특기: 편집(A), 제작(A)』
“저에겐 ‘대본’을 어느 정도 범위 안에서 편집,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균열을 수리할 수 있다고 한 모양이다. 캄캄하기만 했던 앞날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시나리오를 끌어 나갈지만 정하면 되겠군.”
루카스 역시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정신을 차린 피터가 부엉이를 안고 들어왔다. 부엉이 쿤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느라 약간의 소동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비로소 중간지대 환상 컨트롤타워의 모든 조직원이 모인 셈이었다.
사라를 제외하고 하나씩 놓고 보면 다들 불안한 구석이 많았는데 이렇게 모여 있으니 꽤 든든하게 느껴졌다.
“저도 보여 줄 게 있어요.”
엘리제는 이번에 업그레이드를 완료한 자신의 중간지대 아이템을 열었다. 달라진 줄거리가 반영된 ‘작품소개’와 모든 주 조연 캐릭터들의 정보가 표시된 ‘등장인물 열람’, 기능이 확장된 ‘지도’ 탭을 하나씩 열어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마스터급 정보인데요.”
“필립이 직접 엘리제 님께 준 거래요.”
“보급형 아이템이 아니었군요.”
쿤과 사라는 그녀의 자그마한 패널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며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내 특기는 대체 뭐죠? 미혹이랑 임기응변이라니, 애매하게.”
투덜거림에 가까운 엘리제의 말에 피터가 답해 주었다.
“아무래도 전생의 재능이 특기로 표시된 것 같군요. 아직 ‘진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셨지요? 이번 임무가 끝나면 이름도 새로이 부여받고 특별한 능력도 얻게 되실 겁니다.”
“오오, 정말요? 기대되네요.”
메리의 괴력에 버금가는 대단한 능력들을 머릿속에 그리며 엘리제는 눈을 반짝였다.
“그나저나 다른 이들은 얼추 파악되는데 바트 루오스, 이 사람이 문제네요. 특기도 그렇고 뭔가 굉장히 수상한데.”
“설마 얘도 렉스의 계약자는 아니겠지?”
“계약은 한 번에 한 명밖에 못 하는 게 원칙이라서요. 이중 계약은 위법이라 계약 자체가 무효 처리돼요.”
“그럼 악마가 하나 더 이 세계에 들어왔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엘리제가 던진 질문에 다들 표정을 굳힌 채 생각에 잠겼다.
“지도에 또 다른 회색 점이 표시된 적은 없나? 악마가 하나 더 있다면 회색 점도 하나 더 있을 텐데.”
루카스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었어요.”
연회장을 가든 어디를 가든 지도를 한 번씩은 확인했었다. 그러나 에릭 러셀과 렉스 러셀, 블레이크와 바트 외엔 또 다른 빙의자가 없었다. 등장인물 목록을 훑어보아도 여태껏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인물은 없었다. 작품에 아예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면 모를까.
“그러면 정말로 사고로 빙의된 사람인 건가.”
“생각이라도 읽히면 파악이 됐을 텐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더군요. 엘리제님처럼요.”
피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의상실에 있는 동안 바트를 볼 때마다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할 수 없죠. 미끼를 던져서 알아내는 수밖에요.”
“전생의 널 알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려. 그와 단둘이 있는 일은 되도록 피하도록 해.”
“알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제는 빙긋이 웃으며 그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녀는 경계심이 많은 편이었다. 환상 호수에 가는 동안에도 쿤을 부엉이로 변신시켜 지켜보게 하지 않았나. 이 세계에서 그녀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중간지대 조사관들과 루카스뿐이었다.
제 손등에 닿은 엘리제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그녀의 손을 덥석 쥐었다. 그러더니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바짝 옭아맸다.
맞닿은 손바닥을 타고 뜨끈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져, 엘리제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한동안 그녀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카스도 고개를 돌려 다시금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떤 식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할지 대강의 틀을 정하고 나자 사라는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허공에 키보드를 띄워 두고 무서운 속도로 두드리는 그녀의 모습에 쿤을 제외한 모두가 조용히 물러났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그녀를 방해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잘 되겠죠?”
메리가 속닥거리며 물었다.
“그래야지.”
『시나리오 완성률: 75퍼센트(수정 중) / 세계의 균열: 49퍼센트』
불길한 색으로 번뜩이는 정보창을 종료하며 엘리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지금은 시간을 벌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
프로이젠으로 향하기 전, 시에나는 투리스 저택에 들렀다. 여정이 길어질 수도 있기에 갈아입을 옷을 몇 벌 챙기기 위해서였다. 딱히 하녀들의 도움은 필요 없어 홀로 자그마한 가방에 짐을 싸던 중이었다.
문득 시에나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홱, 뒤를 돌아보자 지척에 서 있던 적발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시에나. 오랜만이야.”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황태자 전하?”
시에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예를 취하려는 그녀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럴 것 없어. 오늘은 황태자가 아니라 카밀라의 친구로서 여기에 온 거니까.”
“어… 일단 앉으세요. 차라도 드릴까요?”
“괜찮아. 짧게 얘기하고 가야 하거든. 알다시피 내가 지금 좀, 상황이 그래서.”
그는 시에나가 권해 준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에릭과 만났다며?”
“네.”
“뭐래? 카밀라를 돌려보내 준대? 뭔가 조건을 걸었겠지?”
다다다 쏟아지는 질문에 시에나는 머뭇거리며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게… 그러니까….”
“뭐라도 돕고 싶어서 그래. 카밀라가 이렇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자니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
그리 말하는 그에게선 진심이 느껴졌다. 오죽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을까 싶었다. 고민하던 시에나는 오래지 않아 마음을 굳혔다. 2황자가 조심하라고 한 건 프로이젠 대공뿐이었다. 그러니 황태자에겐 말해 줘도 되지 않을까. 그가 돕는다면 제가 계획한 것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대공비를 모셔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밀라의 안위가 달린 이상 최선을 택해야 했다.
“대공비님을 만나고 싶으시대요.”
“뭐? 엘리제를?”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공비의 이름을 너무도 친근하게 부르는 그의 모습에 시에나가 반문했다.
“그분과 친분이 있으세요?”
“어어, 그런 편이지. 내 동생이 뭐라고 말했는지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어쩌다 그런 얘기가 나온 건지 알아야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의 요청에 시에나는 에릭과 나눈 대화를 생각나는 대로 그에게 들려주었다. 시에나가 하는 말을 렉스는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들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선 여태껏 흐릿했던 무언가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