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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그가 문 앞에 다다르기 직전,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는 비스듬히 몸을 돌려 루카스를 쳐다봤다.
“…경도 일어나지. 아까 한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은데.”
덧붙인 말이 명분일 뿐인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 아침 블레이크와 루카스는 정식으로 정부 계약서를 작성했고, 가신들에게 공표했다. 앞으로 프로이젠에서 루카스 클랜튼은 손님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의 톤이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눈에 띄게 환해진 얼굴에 설렌 기색이 역력한 게,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다.
냉큼 대답하며 일어나는 그를 힐끔 쳐다본 블레이크가 몸을 돌려 먼저 방을 나갔다. 그러든 말든 루카스도 빠르게 그를 따라나섰다.
식당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중앙 계단을 향해 걷던 중 블레이크가 메리에게 물었다.
“레이디 브룩. 지금 대공비의 기분은 어떻지?”
“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메리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웃다가 화내셨다 하셔서….”
“화를… 냈다고?”
“네.”
그러고 보니 메리의 양 볼이 눈에 띄게 빨갰다.
“…맞은 건가?”
무슨 얼토당토않은 짓을 하든 감싸고 도는 시녀의 뺨을 때릴 정도면 얼마나 화가 난 걸까.
“네? 아, 이건… 제 볼이 어디까지 늘어날지 궁금하다고 하셔서요. 별로 그렇게 잘 늘어나는 편도 아닌데.”
발개진 뺨을 문지르며 메리가 수줍게 웃었다.
“…….”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는 자괴감이 들었다. 대체 무엇을 바라고 메리에게 엘리제의 심기를 물은 걸까. 차라리 나뭇잎 한 장에 의지하여 바다를 건너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어쨌든 엘리제의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하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새벽까지 그녀에게 달려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보물찾기’ 중 최음제에 중독돼 이성을 잃은 날 못지않게 절제력을 잃었다.
옛 연인이 눈앞에 있는데도 저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이름을 불러 주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아무리 여러 번 안아도 꽉 다물려 저를 밀어내는 것 같던 그녀의 몸도 평소와는 달랐다. 반갑게 맞아들이는 것처럼 부드럽게 풀어져서는 더한 기쁨을 선사해 달라 졸라댔다.
내색하지 않았던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는 엘리제 앞에 그는 완전히 무너졌다. 루카스고 뭐고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참을 수 없이 탐이 났던 것이다.
독주를 마시고 흥분제까지 섭취한 그녀와 달리 루카스와 그는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 짐승처럼 그녀를 안았다.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 취급했다며 그녀가 화를 낸들 뭐라 변명할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도를 지나친 마음이 과욕을 부린 탓이라고 애원한다면 이해해 줄까.
[말로는 뭐든 못하나요?]
마법사 올리비아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가 가진 많고 많은 것을 조금씩 떼어 엘리제에게 선물하는 것으론 의미가 없다 하였다. 끊임없이 속삭이는 사랑 고백도 지겨워지는 순간이 온다 하였다.
[확신을 줘야죠. ‘나를 사랑하나요?’ 묻게 만드는 게 ■■ 아닌가요?]
고민하던 그는 계단에 다다르기 전, 방향을 틀었다. 같은 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그가 들고 나온 건 공들여 엮은 화관이었다. 어떻게 할지 망설이다가 재킷과 등 사이에 넣어 감추었다. 지그시 바라보는 메리와 루카스의 시선을 무시하며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오랜만에 돌아온 주인 부부를 위해 요리장이 한껏 솜씨를 부렸는지, 열린 식당 문 사이로 맛있는 냄새가 솔솔 새어 나왔다.
잠시간 멈춰 서서 심호흡한 블레이크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식탁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던 엘리제가 그를 보고 빙긋이 미소 지었다.
“블레이크.”
부르는 목소리가 설탕을 녹인 듯 달콤했다. 블레이크의 새파란 눈동자가 잘게 요동쳤다.
“엘리제….”
그녀가 저를 향해 웃어 주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그는 안 그래도 빨리 뛰던 심장이 미친 듯 날뛰는 걸 느꼈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눈이 부셨다.
엘리제는 살결이 거의 드러나지 않도록 목까지 빈틈없이 감싸는 단정한 실내용 드레스 차림이었다. 그러나 밤새 뒹굴며 망막에 새겨진 그녀의 야릇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이 순간에도 그를 발정하게 했다.
실시간으로 부풀어 오르는 아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가 앉으며, 블레이크는 등 뒤에 감추었던 화관을 그녀에게 건넸다.
“선물입니다.”
화관을 건네받은 그녀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엘리제의 맞은편 자리로 와 앉은 루카스도 그녀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담담함을 가장한 채, 그러나 살짝 긴장한 상태로 엘리제를 지켜보던 블레이크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처음 만든 거라 서툽니다. 다음엔 더 예쁘게 만들어 줄게요.”
“당신이 만들었다고요?”
“그렇습니다.”
미묘하게 씰룩이던 입가를 손등으로 가리더니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블레이크의 미간에 살풋 주름이 졌다.
“…엘리제?”
“날 주려고 이런 걸 만들었어? 그 커다란 손으로?”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보다 감각이 월등히 뛰어난 블레이크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귀에 새긴 듯 잘 들렸다. 여러 번 입술을 열었다 닫길 반복하던 그는 제 큼지막한 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별로…입니까.”
“그럴 리가요.”
드디어 엘리제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특히 이건 당신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날 위해 써줄 수 있나요?”
객관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매우 성격 나빠 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에게 푹 빠져 버린 그에겐 마냥 눈이 부셨다. 블레이크는 반쯤 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블레이크에게 바짝 다가간 엘리제가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 주었다. 이리저리 위치를 조정하고 머리칼을 매만져 주고선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환히 웃었다.
“예쁘네요.”
그러고선 그의 뺨을 감싸 쥐고 이마에 쪽, 입 맞춰 주었다.
“……!”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태연히 식사를 시작한 엘리제와 달리 나머지 사람들은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대공비의 독특한 취향, 혹은 짓궂음에 놀란 사용인들이 여럿이었고 기억해 두려 눈여겨본 이가 하나였다.
정작 당사자인 블레이크는 입가에 단단히 힘을 준 채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점잖게 수프를 떠 입에 넣는 그는, 명백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처음엔 미심쩍어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많은 이들이 확신하게 됐다. 엘리제가 블레이크를 괴롭히고 있음을. 그것도 아주 질 나쁜 방법으로 끊임없이. 문제는 블레이크가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는 엘리제가 대놓고 행하는 애정 공세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짓궂은 짓을 해놓고선 행복해하는 엘리제의 모습에 거짓은 섞여 있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매우 즐거운 상태였다.
‘카인이 기억을 되찾게 되면 이걸로 500년은 놀려야지.’
키스하며 묻힌 붉은 염료 탓에 뺨이 발그레해 보이는 블레이크 곁에서 향긋한 차를 홀짝이며 엘리제는 태평히 생각했다.
여전히 황궁은 폐쇄된 채 열리지 않았으나 제도 인근의 이동 마법진은 하나둘씩 복구되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섣불리 군사를 움직여 내전에 개입하기보다는 프로이젠을 지키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든 말든 엘리제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목표를 단순히 한 이후로 그녀는 오로지 블레이크에게만 관심을 쏟았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며 어떻게 하면 그로 인해 더 즐거워질까 고민하고 실천했다. 그래야만 그를 사랑하게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랬던 엘리제가 마지못해 집무실 소파에서 일어난 것은 메리가 전해 온 소식 때문이었다. 오늘 아침 프로이젠에 도착하자마자 거하게 속을 게워낸 후 기절했던 사라가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잠시만 다녀올게요, 블레이크.”
지나쳐 나가다 말고 균형을 잃은 척 그의 허벅지를 짚고 콱, 주무르자 블레이크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됐다. 잘게 흔들리는 새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생긋 웃어 주고선 미련 없이 손을 뗐다.
“미안해요. 드레스가 탁자에 걸려서.”
“괜찮…습니다.”
말과는 달리 그의 그곳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재밌어 죽겠네.’
유혹하는 손길에 일일이 반응하는 남자라니, 얼마나 귀여운가. 자그마치 십오 년을 함께해온 카인 리베르토 안에 저러한 열망이 숨어 있었다는 걸 블레이크를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굉장히 특별한 ‘카인 리베르토의 재발견’이었다.
뿌듯이 차오르는 만족감 속에 엘리제는 몸을 곧게 펴고 집무실을 나섰다.
같은 층에 있는 그녀의 방엔 구불구불 풍성한 갈색 머리칼의 아가씨가 다소곳이 앉아 엘리제와 메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그녀는 이지적이며 차분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엘리제 님. 사라예요.”
“반가워요, 사라. 드디어 이렇게 만나게 되었군요.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들었어요.”
“네, 좀… 그랬죠.”
그들이 하루 만에 프로이젠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메리의 미친 짓 덕분이었다. 메리는 도저히 못 하겠다며 버티는 피터와 사라를 반강제로 옆구리에 끼고서 용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끔찍했는지 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라보다 좀 더 허약한 피터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은 재밌으셨죠…?”
메리가 사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니요, 메리.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어요.”
대충 얼버무렸다가는 또 한번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사라는 힘주어 부정했다. 덕분에 시무룩해진 메리를 모른 척하며 엘리제는 사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사라, 지금 상황이 어떤지 혹시 알고 있나요?”
“네, 어느 정도는요. 피터에게 들은 것도 있고, 제가 지닌 아이템으로 확인한 사항도 좀 있어요.”
대답하며 사라는 블라우스 안에 숨겨진 목걸이를 꺼내 펜던트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엘리제의 것과 달리 40인치는 될법한 패널 디스플레이가 그들 앞에 붕, 하고 떠올랐다.
“오….”
화면에 가득 떠오른 그래프들은 실시간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균열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지금 이 세계에 발생한 문제는 ‘기획 의도’ 손상 때문이에요.”
“‘기획 의도’요?”
“네. <타락한 연인>은 본래 로맨스 비중이 70프로인 시나리오지요. 그런데 여기 보세요.”
사라가 그래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시나리오 진도와 로맨스 달성률을 꺾은선으로 나타낸 것이었는데, 쭉쭉 뻗어 나가는 진도율과 달리 로맨스 쪽은 제자리걸음 상태였다.
“달성률이 30프로 언저리에 머물러 있죠. 이게 가장 큰 문제예요. 로맨스 부분을 강화해야 해요. 그게 균열을 막을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에요.”
“그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어째서요?”
“요원님이 남자 주인공 몸에 들어간 건 들었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봤는데, 여자 주인공과 맺어지는 데 실패했어요.”
“어…. 역시 그랬던 거군요….”
엘리제의 말에 사라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런 일이 생긴 게 처음이니 다들 몰랐겠네요. 별도의 지침이 없어서….”
“무슨 소리예요?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다는 소린가요?”
“여자 주인공 시에나 라우디아와 연결돼야 하는 건 몸만 남자 주인공인 윗세계 요원님이 아니에요.”
“네? 그럼요?”
“쫓겨나 어딘가에 들어가 있을 진짜 남자 주인공과 맺어져야 하죠.”
사라의 말에 엘리제는 입을 턱 벌렸다.
“아니, 무슨 그런….”
“그게 정말인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사라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테라스 쪽으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루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