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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는 얼마 전 와본 적 있는 2황자궁 앞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궁 앞을 지키는 병사와 기사들의 따가운 시선을 모른 척하며, 에릭에게 기별하러 들어간 기사를 기다렸다.







난장판인 황궁에 들어와 에릭을 만나려는 건 사촌인 카밀라 때문이었다. 어쩌다 그리됐는지 몰라도, 그녀가 2황자 측에 붙잡힌 것이다.







황태자 측에서 보내온 메시지에 투리스 자작 내외는 다급히 시에나를 찾았다. 얼마 전, 시에나를 만나기 위해 에릭이 직접 저택을 찾았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친분 있는 그녀라면 2황자를 만나 카밀라를 풀어 달라 부탁해 볼 수 있지 않겠냐며 간청했다.







위험한 일임은 알지만, 시에나는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엉뚱하여 장난이 심하기는 해도 카밀라는 그녀에게 친자매나 다름없었다. 에릭이 과연 그녀를 만나 줄지는 의문이었으나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했다.







2황자를 만나겠다는 소식을 전하자 황태자는 매우 기꺼워하며 그녀를 궁에 들여보내 줬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알 수 없어도 마중 나온 그렉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황태자궁이었다.







황태자궁에서 에릭이 머무는 궁으로 향하는 동안 목격한 처참한 광경들에 시에나의 심장은 점점 졸아붙었다. 자신감도 사라져갔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었다. 저보다 훨씬 겁에 질려 있을 카밀라를 생각하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2황자궁에 다다랐고 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기사 하나를 붙들고 늘어질 수 있었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면서도 기사는 일단 에릭에게 말해 보겠다며 궁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의 바람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안에 들어갔다 나온 기사가 따라오라며 그녀에게 손짓한 것이다. 시에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궁 안에 발을 내디뎠다.







엉망인 바깥과 달리 황자궁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깨끗하며 고요했다. 친절히 저를 안내해 준 기사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한 후 시에나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종은 어디 갔는지 직접 차를 우리던 에릭이 그녀를 쳐다봤다.







“황자님.”



“오랜만입니다. 이리와 앉아요.”







보지 못한 사이 그는 살이 더 내린 듯했다. 시에나는 턱선이 날카롭게 드러나 온화함이 사라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잠을 잘 못 주무시나 봐요.”







찻주전자를 기울이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덕분에….”







그의 눈동자처럼 맑은 연녹색 찻물이 조르륵 흘러 둥그런 잔에 고였다. 하나를 그녀 앞에 밀어 주고서 그는 남은 하나를 들어 올렸다.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 투리스 영애 때문입니까?”



“네, 맞아요. 카밀라가 어젯밤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입술을 가볍게 축이며 그가 말했다.







“알고 왔을 거로 생각합니다만, 그녀는 억류돼 있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시에나는 지그시 입술을 물며 말끝을 흐렸다. 카밀라를 붙잡아 두었다고 말하는 그의 어조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단호했다.







“누가 영애를 내게 보냈습니까.”







에릭 모르게 한숨을 삼키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제가 가겠다고 했어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요. 그게 아니라 카밀라가 뭔가 실수했다면… 어떻게든 사죄드리고 싶어요.”



“영애가 왜요. 뭘 잘못했다고.”



“카밀라와 저는 친자매나 마찬가지라서요.”







에릭은 가볍게 웃음 지었다.







“그런 게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내 ‘친’형님을 죽일 생각인데.”







잔인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시에나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터에 영애는 겁도 없이 뛰어든 겁니다. 아무도 만류하지 않던가요.”



“…….”







시에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 누구도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밀라를 구명해 달라며 모두가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시무룩해져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보며 에릭이 냉담히 말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카밀라 투리스는 형님의 애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요한 협상 카드이니만큼 그냥 풀어줄 수 없어요.”



“그 애는 태자 전하의 애인이 아니에요.”



“압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리 생각지 않으니까요. 총애하는 여인을 구명치 않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으려면 형님께선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대가….”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시에나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카밀라와 교환할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뭐가 있을까요? 필요한 걸 제게 말씀해 주실 순 없나요?”



“말하면요. 그걸 내게 가져다줄 능력은 있습니까?”



“말씀만이라도 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구해 볼게요.”



“…글쎄요.”







그는 차게 조소했다.







“영애가 가져다줄 수 있는 것 중에 딱히 갖고 싶은 건….”







느긋이 소파에 등을 기대던 그가 문득 말을 멈췄다. 살짝 달라진 그의 표정에 시에나가 바짝 몸을 기울였다.







“뭔가 생각나신 건가요?”



“…생각나긴 했습니다만, 이것도 영애께는 불가능한 일 같은데.”



“뭔데요? 말씀해 주세요. 네?”







침묵한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로이젠 대공비를 만나고 싶습니다. 대공 몰래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습니까.”



“어…. 그분은 왜요?”



“그냥,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내리뜬 눈동자 위로 기다란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웠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지막이 되니 후회가 남는군요.”



“마지막이라니, 왜 그런 말씀을….”



“사람의 운명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요. 나 역시도 오늘을 예상한 바 없습니다. 바랐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씁쓸함이 서린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 시에나는 어쩐지 가슴이 아파 왔다. 누가 누굴 동정하겠냐마는 이 순간 그가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결연히 그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전해 드릴게요. 비전하를 꼭 만나게 해 드릴게요.”



“그녀와… 친분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다만, 비전하를 모셔 오려면 그분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해요. 대화만 나누고 보내 주실 거라 약조하실 수 있나요? 장소도 되도록 황궁 밖이었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약조하겠습니다. 황궁 밖 어디든 장소를 정해 알려 주면 내가 그리로 가지요.”







아직 성공한 것도 아닌데 벌써 들뜬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시에나는 어떻게든 두 사람의 만남을 성사시키리라 굳게 다짐했다. 어쩌면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목이 타는 듯 미지근하게 식은 찻물을 단번에 들이켠 에릭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영애는 혹, 바라는 게 있습니까?”



“네? 저요?”



“그래요. 오늘 나를 만나러 온 것도 그렇고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도 그렇고. 본인을 위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원하는 게 있다면 얘기해 보십시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 주고 싶군요.”







시에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원하는 거….”







됐다고, 괜찮다고 말하기엔 정말로 간절히 바라는 게 하나 있었다. 그래서 시에나는 염치 불고하고 입 밖에 냈다.







“만약에 황자님이 승리해서 권력자가 되면, 제가 독립할 수 있게 도와주실 수 있나요?”



“독립? 가문에서 나오고 싶다는 소립니까?”



“네. 저는 정말, 떠밀려 결혼하기 싫거든요. 물론 매우 배은망덕한 짓이라는 건 잘 알지만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제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렇군요.”







에릭은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꽤 있었다.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라우디아 백작의 결혼 압박에 신랑감을 구하러 제도에 왔다는 것이나 루카스 클랜튼과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는 것. 사촌지간인 카밀라에게 휘둘려 곤란을 겪을 때가 많다는 것 또한 그가 알고 있는 정보에 속했다.







“알겠습니다. 힘써 보도록 하지요.”



“감사해요, 황자님.”







밝게 웃는 그녀를 보며 에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보면 그녀야말로 안 좋은 상황에 부닥쳐 있으면서 저리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인지 어려운 일을 떠넘기고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프로이젠까지 가는 것만도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이동 마법진을 열 수 있는 상급 마법사 하나와 영애를 호위할 기사 하나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아…. 하지만 황자님도 지금 상황이….”



“고작 마법사 하나, 기사 하나 빠진 정도로 승부가 좌우되진 않습니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생각지 못한 호의에 시에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해요.”



“고맙다는 인사는 내가 해야겠지요. 무사히 다녀오길 바랍니다. 혹여 그녀가 거절한다면 그냥 돌아와도 좋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아니까. 나의 바람을 그녀에게 전해 주는 것으로 영애의 역할은 끝입니다.”







저를 믿으라고 큰소리치고 싶지만 실패할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어, 시에나는 그렇게 하겠노라 얌전히 대답했다.











***











블레이크는 미간을 찡그린 채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툭툭 두드렸다. 밤새 제도에서 보내온 메시지들과 유력 귀족 가문들의 동태를 분석한 자료였다.







“슈만도 전혀 몰랐다는 건가?”



“네, 그렇다고 합니다. 아직도 황궁에 들어가지 못해 사태 파악이 안 된 듯합니다.”



“슈만의 도움조차 받지 않았다면 2황자가 대체 무슨 수로 황태자를….”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문득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곤 물었다.







“경은 혹시 아는 게 없나? 이번 일에 관하여.”







그의 질문에 집무실 안 가신들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눈부신 금발에 아름다운 녹안, 흰색 제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그는 마치 동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왕자님 같았다. 그래서 더욱 대공의 집무실에 어울리지 않았다.







모두의 주목 속에 루카스 클랜튼이 입을 열었다.







“누구의 도움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이번 내전은 2황자의 승리로 끝날 겁니다.”







루카스의 확신에 찬 대답에 모두 놀란 표정이 되었다. 밤새 자료들을 분석해 내린 결론과 그의 주장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리 판단한 근거는?”



“황태자에게 이길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황궁이 폐쇄되어 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루카스는 서류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시간을 끌다가 적당한 때에 물러날 겁니다. 자리를 내어 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안위를 비롯한 몇 가지를 약속받겠지요.”







악마들의 습성을 잘 아는 그이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이기고자 마음먹었다면 벌써 이겼을 테고, 얻을 것을 다 얻었다면 곧바로 항복하여 시나리오를 끝냈을 것이다. 여태 미적대고 있다는 건 원하는 게 남았다는 소리다.







루카스는 엘리제가 어젯밤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녀는 악마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으나 루카스는 흘려듣지 않았다. 악마는 그런 종류의 제안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 엘리제를 포섭하고 싶은 건 놈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악마는 분명 한번 더 접근해 올 것이다. 엘리제와 계약하기 위해 수를 쓸 것이다. 거절하기 힘든 무언가를 손에 쥐고 흔들어 보이며.







살벌하기까지 한 루카스의 표정 탓에 집무실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조용히 루카스를 응시하던 블레이크까지 생각에 잠기자, 묵직이 내려앉은 침묵을 깰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똑똑.







경쾌하기까지 한 노크 소리가 들려올 때까진 분명 그랬다. 블레이크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벌컥 문이 열렸다.







“대공 전하, 식사하시래요!”







귀족 신분이라 한들 어느 사용인이 공국의 군주에게 저리 말하겠는가. 저 정도로 무례하게 굴 수 있는 건 프로이젠에서 오직 한 명뿐이었다. 대공비가 친동생처럼 아끼는 시녀, 메리 브룩이었다.







대체 어떻게 제도를 빠져나온 것인지, 그녀는 오늘 아침 프로이젠의 성문을 두드렸다. 창백한 얼굴의 남녀 한 쌍과 함께.







블레이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리가 제게 와 말을 전했다는 건 엘리제가 깨어났단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