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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블레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표정만 다소 어두워졌을 뿐 놀란 기색도 없었다.
엘리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네, 정말.”
어깨에 걸쳤던 재킷을 벗어 의자에 던져두고 진열장에서 위스키를 한 병 꺼냈다. 개봉하자, 달짝지근한 살구 향이 독주 특유의 향과 어우러져 넘실댔다. 병째 기울이는 모습에 블레이크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붉은 입술이 젖어 들었다. 혀를 내어 입술을 훑고는 빈손으로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보란 듯이 하얀 살결을 드러내고선 또 다시 독주를 한 모금 머금어 삼켰다.
바지의 버클을 풀어 흘러내리도록 두고선 바닥에 버려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씻고 올 동안 결정해요. 돌아왔을 땐 부디 아무도 없길 바랄게요.”
손에 든 위스키병을 느릿하게 흔들며 그녀는 욕실로 들어갔다.
“…….”
“…….”
문이 닫힌 이후에도 한참 동안 미동 없이 서 있던 블레이크와 루카스는 동시에 힐끔 서로를 쳐다봤다.
“인제 와서 도망가면….”
블레이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경을 정말 죽일지도 몰라.”
엘리제의 원망까지 사 버린 지금, 루카스가 발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도구로서의 가치를 잃는 순간, 그에게 루카스는 아내의 마음을 훔치려 드는 좀도둑일 뿐이었다. 엘리제에게 조금 더 미움받게 되더라도 제거하는 편이 나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선명하게 드러난 살기를 직시하며, 루카스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는군요. 오히려 전….”
루카스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대공께서 견디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잃을 게 없는 저와는 다르시니.”
블레이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리를 굽힌 그가 바닥에 나뒹구는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꺾인 꽃대를 바로 세우고 구겨진 꽃잎을 매만져 모양을 잡았다.
“아내가 무엇을 귀애하든 존중해 주는 게 남편의 도리지. 걱정 마시오, 경. 나 역시 약속을 지킬 거요.”
그는 문 앞에 대기 중이던 클로드를 불렀다. 어차피 이동 마법진이 정상화되기 전까진 내전에 개입할 수 없다. 적어도 반나절은 걸릴 터, 기사단 전원 휴식을 취하라 명했다.
“해가 뜨면 곧바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게. 슈만 쪽에서 연락을 취해 올 때까진 움직이지 않을 거야. 명은 그때 다시 내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홍, 백 기사단에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명을 전달받은 후 물러나려던 클로드는 침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루카스를 쳐다봤다.
“저, 그런데 클랜튼 경은….”
“신경 쓸 것 없어. 그는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클로드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군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주군!”
답할 새도 없이 그는 쾅, 문을 닫고 나갔다.
“…….”
그 후에 남은 것은 깊은 정적뿐이었다.
***
렉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황태자 궁을 둘러싼 전투가 한창이었으나 그는 방 안에 틀어박혀 나가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탓이었다.
시나리오 진행이 빨라지다 못해 폭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악하기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일단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가 심하게 틀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본래대로라면 시에나 라우디아와 루카스 클랜튼은 오늘 밤 맺어져야 했다. 그것은 <타락한 연인>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에나는 아무 일도 없이 자정 근처에 귀가했다. 이 시각 루카스 클랜튼은 어디로 갔는지 소재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이야기가 틀어진 데에는 렉스의 탓도 조금쯤 있었다. 시에나 라우디아를 타락시켜야 하는 순간에 대공 부부의 사고 소식을 들었고, 그녀를 내팽개쳤다. 나중에라도 신경 써야 했는데, 다른 데 정신이 팔려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갈등의 씨앗을 심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걸 염두에 두더라도 지금의 진행 속도는 말이 되지 않았다.
2황자 에릭 러셀이 왜 지금, 이 시점에 내전을 일으켰는지가 문제였다. 한낱 조연 주제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본래 에릭 러셀은 <타락한 연인>에 이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온건한 성향일뿐더러 루카스 클랜튼과 슈만 크롬벨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지원 없인 승리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를 알면서도 내전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이길 수도 없고, 질 수도 없고. 정말 미치겠군.’
세력이 비등한 상황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이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만약 2황자를 패퇴시킨다면 세계 멸망의 주범이 돼 버린다. 결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황태자 측이 승기를 잡는 순간 분명 균열이 가속화될 것이다. 그리 되면 렉스는 시나리오 종료 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다고 바로 물러나자니 이대로 이야기가 끝나 버리게 생겼다.
본래대로라면 조기 종료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균열의 주범이 아닌 이상 자신이 어긴 몇 가지 규칙에 대해서만 값을 치르면 될 터, 얻을 보상에 비하면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았다.
다만 이토록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건, 엘리제 때문이었다. 이대로 내기가 종료되면 그는 카인 리베르토의 영혼만을 손에 넣게 된다. 처음엔 분명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엘리제의 영혼이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그 하나를 위해 다른 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탐이 났다.
‘아직은 안 돼. 이렇게 끝낼 순 없어.’
그녀의 영혼을 손에 넣으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면 그녀는 새 이름을 부여받을 테고, 지하세계 계약서로 빼내 올 수 없게 된다.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진행 속도를 늦추지?’
이미 내전은 발발했다. 본래 2황자에게 무너지는 것이 황태자의 운명인 만큼 버티면 버틸수록 짊어져야 할 페널티가 커진다. 황태자가 아닌 2황자 측에서 공세를 중지하도록 수를 써야 한다.
‘그리고 엘리제를 만나야 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던 그의 눈에 문득 카밀라가 들어왔다. 그녀는 창가에 달라붙어 그렉의 자취를 쫓고 있었다. 웃음기 없이 불안한 표정이었다.
렉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애초에 카밀라에게 접근한 이유는 시에나 라우디아 때문이었다. 그녀는 시에나를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열쇠였다.
‘그렇다면 사용해야지. 놀릴 필요 있나.’
남자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이 세계의 가장 큰 권력자는 시에나 라우디아였다. 그녀만이 시나리오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얼마간이라도 2황자를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렉스는 카밀라에게 성큼 다가갔다.
“카밀라.”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가벼운 어조로 제안했다.
“구경만 하기 지루하지 않아? 우리 술래잡기 안 할래?”
“술래잡기요?”
“그래. 아주 재밌을 거야.”
카밀라의 어깨를 감싸 안는 렉스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
따끈한 물에 몸을 푹 담근 채 엘리제는 독주를 홀짝였다. 취기가 올라 어질어질해지자 끓는 속이 그나마 조금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이 세계에 들어온 후 그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비록 가짜 몸이긴 해도 다짜고짜 신혼 초야를 지내야 했고 열심히 가짜 남편의 비위를 맞췄다. 중간지대 조사관들을 대부분 구해 냈으며 카를리아즈를 도왔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러나 이제 와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게 엉망이었다.
마차 안에서 확인하였을 때, 균열은 자그마치 40프로였다. 지금은 그보다 더 커졌을 것이다.
악역 조연에 불과한 엘리제에게 시나리오의 흐름을 바꿀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내전 이후 출연 분량이 있기나 하던가.
블레이크나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다. 시작된 내전을 멈추게 할 방법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이미 늦은 것이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내전이 끝나고 나면 <타락한 연인> 또한 끝이다. 약간의 뒷이야기만 남을 뿐.
‘망한 거지 뭐.’
엘리제는 웃음을 흘렸다. 지금의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자책하며 우울감에 젖는 성격이 아니기에 엘리제는 이번에도 다른 데서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모든 비틀림의 시작점인 카인 리베르토가 어째서 악마와 계약을 맺었는지 생각해 보면 결국 원인은 그녀였다.
‘아, 정말. 기분 더럽네.’
엘리제는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써 생각을 멈췄다.
이 와중에 술맛은 최고였다. 잔뜩 푼 최고급 향유도 마음에 들었다. 얼마만큼 고생하든, 잠을 설치든 티 없이 곱고 매끄러운 피부도 마음에 들었다.
‘알 게 뭐야. 어차피 내 임무는 조사관 구출이잖아. 그럼 내 할 일은 다 한 셈이지.’
억류돼 있던 메리와 피터를 풀어주었고 비둘기 쿤을 발견해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사라의 경제 사정 또한 해결해 주었다. 나머지 일들이야 망하든 말든 그녀 책임이 아니었다.
‘칼과의 약속도 나름 성실히 지켰으니까.’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서지 않던 걸 서게 해준 것만으로 어딘가. 동정 딱지도 떼 줬다. 카를리아즈의 말대로 그와 그녀는 악조건 속에서 피차 최선을 다했다.
‘그럼 나는 <타락한 연인>이 끝나기 전에 저 멍청이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세계 따위 멸망하든 말든.’
그렇게만 된다면 이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챙겨가는 셈이다.
어차피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곱씹고 후회해봤자 제 손해다.
결론을 내리고 목표를 단순히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독한 술을 반병이나 비운 탓인지 엘리제는 평소보다 배는 낙천적이었다. 남들 다 하는 사랑, 저라고 못할쏜가.
‘저놈 덕에 만족하면 그게 사랑이지. 뭐 특별할 거 있어?’
그녀의 바람 따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군 카인 리베르토의 이기심도 사랑이라 한다면, 저 역시 그리하면 된다.
‘실컷 괴롭혀 줄게, 카인 리베르토. 무척 재밌을 거야. 그렇지?’
몸을 일으키자 출렁거리던 물이 촤르르, 쏟아졌다. 엘리제는 욕조에서 나와 가운만 대강 걸쳤다.
욕실 문을 열고 나가자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반쯤 예상하였던 바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었던 건 루카스를 위함이었다. 어떤 짓까지 할 것인지 경고함으로써 그가 생각을 달리하길 바랐다. 루카스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블레이크를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많았기에.
그러나 굳이 이 미친 짓에 동참하겠다면, 더는 말릴 생각이 없었다.
‘한번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도망가겠지.’
엘리제는 그들을 본체만체하며 침대로 걸어갔다. 한 손엔 여전히 술병이 달랑거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협탁을 열자 가지런히 놓인 유리병들이 보였다. 정략혼이 흔한 귀족 부부의 결합을 위한 흥분제였다. 그중 하나를 꺼내 들고선 한 병을 고스란히 입에 털어 넣었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미쳐 볼 생각이었다.
“오라버니. 결정한 거 맞죠? 후회 안 해요?”
아까와는 달리 마냥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슬며시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리 와요.”
엘리제의 부름에 가까이 다가간 루카스가 무릎을 꿇어 몸을 낮추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이었다. 그녀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우리 오라버니, 술 좋아하시던가.”
“뭐든 잘 먹습니다.”
“그럼 이것도 마셔 볼래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엘리제가 가운을 활짝 벌리곤 제 몸 위에 술병을 기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