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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마법진은 몰라도 메시지 전송까진 막을 수 없기에 제도의 상황을 보고받는 덴 문제가 없었다. 다만 굳게 닫힌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낱낱이 파악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단장 슈만 크롬벨의 약혼 축하 연회 탓에,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네프러스 기사들이 궁을 비운 상태였다. 유력 귀족들 또한 뒤늦게 일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리라비아 강에 장난질을 친 것도 황태자나 2황자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목적은 아마도 그를 프로이젠에 돌려보내는 데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일을 계획한 게 둘 중 어느 쪽인지였다. 그것이 최우선으로 파악해야 할 문제였다. 집무실에 모인 가신들은 결론 도출을 위한 정보 취합에 쉴 새 없이 매달렸다.
“간발의 차였군.”
초기 타임 라인을 훑던 블레이크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가 제도를 벗어난 후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엘리제가 이동 마법진을 이용했다. 소규모 이동이었기에 황궁에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늦은 밤이니만큼 상단 소유의 마법진을 이용했다.
그녀가 저택을 떠난 직후 네프러스 소속 기사 몇이 프로이젠 타운하우스를 방문했다. 황제의 서신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대공 부부를 찾았다.
멜릭은 대공의 소재에 대해선 솔직하게 말했으나 대공비에 대한 정보는 숨겼다. 몸이 좋지 않아 깊이 잠든 참이니 내일 다시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오래지 않아 그의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급히 파견한 전령을 마지막으로 제도의 모든 이동 마법진이 불통이 됐다. 하마터면 대공비의 안위마저 위험해질 뻔했다. 물론 생각이 있다면 프로이젠을 건들진 않겠지만, 내전 종료 후 좋지 못한 협상의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블레이크의 깊은 애정은 황태자와 2황자 모두 잘 알고 있으니.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분이 치밀어 블레이크는 몇 번이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서성거렸다. 황태자도 2황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다 엘리제를 탐낸 적 있는 사내들이다. 황위를 거머쥐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다.
“다 쓸어버릴까.”
새파란 눈이 매섭게 빛났다. 광기마저 어른거리는 대공의 모습에 가신들은 겁먹은 듯 고개를 숙이고선 눈짓을 주고받았다.
‘클로드 경은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저만 살겠다고 늑장 부리는 거 아냐?’, ‘비전하께선 무사하시겠지? 아니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인데.’ 등의 대화가 소리 없이 오갔다.
다행히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줄곧 창문 쪽을 주시하던 블레이크가 갑작스레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우르르 창가로 몰려간 가신들은 내성 문을 통과하는 검은색 마차를 발견했다. 가문의 문장도 없고 투박해 보이지만 내부의 안락함과 견고함은 비할 데 없는 대공 전용 마차였다.
“그런데… 마부석에 저거, 클랜튼 경 아닌가?”
“어, 그런 것 같은데.”
침묵 속에 서로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이들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공의 심기가 바닥을 치기 전,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했다.
***
클로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엘리제는 가면을 쓴 듯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다른 이들의 시선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지금 그녀가 대면해야 하는 것은 생전의 삶부터 지금의 삶까지를 통째로 뒤흔든 존재였기에.
이제 막 본성의 육중한 문을 열어젖힌 블레이크는 우뚝 멈춰 선 채 꼼짝하지 못했다. 저를 향한 그녀의 눈빛이 싸늘했기 때문이다.
“전하.”
엘리제는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게 예를 취했다.
“…오셨습니까.”
“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제게 내미는 손을 무시하고 엘리제는 그를 지나쳐 본성 안으로 들어갔다. 당혹감에 굳어 버린 그가 가까스로 몸을 틀어 그녀를 쫓았다. 엘리제를 충분히 앞지를 수 있음에도 조용히 따르기만 했다. 그녀가 그에게 이리 구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본성 부부 침실에 단둘이 남게 되었다. 사용인들이 미리 벽난로에 불일 지펴 둔 덕에 방은 따뜻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어쩐지 ‘춥다’고 생각했다. 불안감에 심장이 섬뜩했다.
“엘리제….”
뒤돌아 서 있는 그녀에게 용기 내 다가가려던 블레이크의 눈이 커다래졌다. 홱 돌아선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 때문이었다.
“당신!”
뭉툭한 자루에 달린 여러 갈래의 끈이 흐느적거리며 흔들렸다.
“이러기예요?”
엘리제는 화난 것이 맞았다. 전이라면 화가 나도 내색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블레이크의 정체가 카인 리베르토라는 걸 알게 된 이상 거침없었다. 위협적으로 채찍까지 흔들며 씩씩댔다. 자칫, 때릴 기세였다.
“어디 간단 말도 없이 나를 두고 가다니. 나와의 약속 따위 상관없단 거죠?”
사실 화내고 싶은 부분은 그런 게 아니었다. ‘카인 리베르토, 이 멍청한 새끼!’라고 소리 지르며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 없는 그에겐 할 수 없는 말,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엘리제는 대충 아무 죄나 덮어씌워 분을 쏟아 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제.”
그는 저도 모르게 쩔쩔맸다.
“그저, 너무 곤해 보여서… 게다가 좋지 않은 일인지라 알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위험할지도 몰라서….”
“변명할 것 없어요!”
엘리제는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나쁜 놈, 미친놈!’ 마음속으로 수십 가지 욕을 그에게 퍼부었다. 내전이 일어났고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었다. 머릿속이 포화 상태가 되어 무엇 하나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기필코 비워 내야 했다.
“게다가 오라버니에게 했다는 제안은 대체 뭐죠? 누구 마음대로 정부를 들여요?”
“엘리제, 그건….”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함부로 다른 사람 마음을 떠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에 엘리제는 조금이나마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말했다.
“가서 해명하세요. 실수였다고 말하고 제안을 거둬들이세요.”
맞닿은 시선이 어긋났다. 그가 먼저 피했다. 눈을 내리뜨곤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엘리제는 제 귀를 의심했다.
“내겐 그가 필요합니다. 그를 움직일 방법이 그것뿐이기에 제안을 물릴 수 없습니다.”
필요를 말하는 그가 낯설게 느껴진 순간, 어떠한 가정이 뇌리를 스쳤다.
“혹시 오라버니가 가진 치유력 때문인가요? 그거라면 이제 필요 없어요. 전 건강하다고요. 주치의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아니요, 엘리제.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일시적으로 회복된 걸 수도 있고 지난번처럼 불미스러운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부인은 너무 연약합니다. 나는 그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엘리제는 입을 턱 벌렸다. 설마 정말로 그런 이유였다니 기가 찼다. 한편으론 ‘카인 리베르토’다운 결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안위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나 바람 따윈 조금도 개의치 않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요!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거라고요! 어떻게 그걸 일일이 걱정하고 대비하며 사나요? 내가 이렇게 연약해 보여도 당신보다 오래 살 수도 있는 거예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나는 차라리 그러길 바랍니다.”
마치 벽을 보고 대화하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애써 억누른 화가 도로 치밀어 올랐다. 블레이크에게, 또한 카인 리베르토에게 화가 났다.
“이, 이, 겁쟁이!”
그녀도 이기적이었지만 그 역시 못지않았다. 이토록 이기적이어서 저 자신을 나락에 처박고도 그녀 하나만 바라본다. 그런 그를 보는 그녀의 속이 어떤 줄도 모르고.
“맞습니다, 엘리제. 나는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부인을 잃게 될까 봐 가슴이 조여듭니다.”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허공에 힘없이 머물러 있던 채찍 끝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부를 두는 건 귀족 사회에서 흔한 일입니다. 클랜튼 경은 뛰어난 인재고 그가 프로이젠의 울타리에 들어오는 걸 반대하거나 배척할 사람도 없습니다. 군주인 내가 허락했으니까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뻔뻔스러운 그의 입을 노려봤다.
“부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연인 사이였지 않습니까. 클랜튼 후가 부인의 등을 억지로 떠밀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 관계는 유지되고 있었겠지요. 나와 결혼하는 대신.”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낮고 어둑하여, 엘리제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건 과거일 뿐이에요. 치기 어린 애정이었고 이제 와선 아무 의미 없다고요. 지금 내가 좋아하는 건 당신이잖아요. 날 못 믿나요?”
“그리 말해 주어 기쁩니다, 엘리제.”
엘리제의 손목을 쥐어 내리며 그가 다정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난… 부인이 나보다 그를 더 좋아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못난 남편입니다.”
“그렇다면 제안을 취소하면 그만이에요.”
그는 웃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목덜미 위에 덧없이 흩어졌다.
“클랜튼 경이 말하지 않던가요.”
“무엇…을요?”
“그가 얼마나 부인을 원하는지. 이 입술에 입 맞추고 탐하길 바라 마지않는지.”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는 나의 제안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엘리제는 알고 있었다. 루카스, 아니 카를리아즈가 그녀 곁에 있기를 얼마나 소원하는지. 그에게 묻는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염려치 마십시오. 원치 않으면 그는 부인을 강제로 범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그리 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저 내킬 때, 허락하면 됩니다.”
“당신, 정말… 미쳤어.”
신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당혹스럽고 화가 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지요.”
자신의 결정을 이야기했을 때, 가신들 모두 얼빠진 얼굴을 했다. 대상이 자신들의 군주가 아니었다면 서슴없이 ‘미쳤다’ 말했을 것이다.
“부인을 너무도 사랑한 탓임을 부디 알아주십시오.”
“…정말로, 철회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후회 안 해요? 내가… 당신이 그리도 사랑한다는 내가, 다른 남자 품에 안기는 걸 견딜 수 있나요?”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니까요.”
엘리제는 어금니를 콱 물며 그를 밀어냈다. 그의 가슴팍에 구교묘를 집어 던졌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도 집어 던졌다.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침대 머리맡의 설렁줄을 당겼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에게 명을 내렸다.
“클랜튼 경을 모셔와.”
“네, 비전하.”
하녀는 오래지 않아 루카스를 데려왔다. 그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침실 한가운데까지 걸어 들어와선 그녀 앞에 섰다.
“나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엘리제가 물었다.
“오라버니. 정말로 저의 정부가 되는 삶을 택하실 건가요? 클랜튼의 가주로서, 또한 한 여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남편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살 기회를 저버리실 건가요?”
루카스의 녹색 눈동자에 그녀가 담겼다.
“…허락하신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그 모든 치욕을 감내할 수 있겠어요?”
“기꺼이, 그럴 겁니다.”
엘리제의 차가운 미소를 보면서도 욕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증명해 보세요.”
그는 이것이 시험임을 알았다.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
그의 애정을 그리고 블레이크의 인내를 확인하기 위한 어렵고 잔혹한 시험.
“저기, 내 남편이 보는 앞에서.”
블레이크를 가리키며 엘리제가 녹을 듯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할 수 있겠어요?”
그녀의 질문은 루카스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블레이크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못하겠으면 취소해요. 둘 중 누구라도 참지 못하고 방을 나가면, 모두 없었던 일로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