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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는 입을 턱 벌렸다.







“무슨 그런 미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말이었다.







“당연히 거절했죠? 거절할 거죠?”



“아니. 수락할 생각인데.”



“뭐, 뭐라고요?”







그리고 여기에 미친놈이 하나 더 있었다.







“내가 ‘루카스 클랜튼’으로서 시에나 라우디아와 이어지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세계의 균열이 가속화될 텐데, 곁에서 널 지켜야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했잖아. 나는 네가 좋다.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네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너와 가까워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거고.”







그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보며 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







“내게도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엘리제. 본래 네 남편이 될 사람은 나였잖아.”







그가 살며시 손을 뻗어 왔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끝을 쥐고는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너무 서툴러서 그래? 아까… 사랑을 나누었던 게, 네겐 별로였던 건가?”



“아니, 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답을 듣기 원하는 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엘리제는 으으, 작게 신음했다.







“싫진, 않았어요. 처음인데도 잘하던걸요. 누가 가르쳤는지… 참, 훌륭하네요.”



“그렇지? 나도 네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연기를 제외하곤 그럭저럭 빨리 배우는 편이니까.”







그의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점점 더 잘하게 될 거야. 노력할 테니 믿어 주면 안 되나? 여태껏 그래 주었듯.”







엘리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서 안 된다고 했다간 섹스를 잘하지 못해서 그녀에게 거절당한 거라고 그가 오해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순순히 받아들이자니 미친 짓 같았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삶을 산 그녀라도 양다리를 걸친 적은 없었다.







섹스파트너끼리도 지켜야 할 예의 같은 게 있는 법인데, 연인 혹은 부부 관계에선 어떻겠는가. 비록 가짜라 할지라도 엘리제는 블레이크 프로이젠의 아내이자 대공비였다.







무엇보다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저의를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여태껏 루카스를 경계해 왔다. 그녀와 루카스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보면 급격히 기분이 안 좋아지곤 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블레이크 앞에선 루카스와 거리를 두었다. 부러 서먹한 척했다.







그런데 정부가 되라는 제안을 했다니. 두 사람의 관계를 떠보느라 그런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좋아요. 그러면 일단 제가 직접 블레이크에게 확인해 볼게요. 솔직히 말하자면, 도무지 믿기지 않아요. 당신이 거짓을 말할 리는 없지만, 혹시 의사전달이 잘못됐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그렇게 해. 처음엔 나도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세계의 타락한 성 관념과는 별개로 너에 대한 그의 집착은 정상이 아니니까.”



“그러니까요. 냉큼 받아들였다간 당신을 죽이려 들 수도 있어요.”



“으음…. 그럴 순 없을 텐데.”







어쨌든 아까 한 섹스에 관해 ‘잘했다’며 칭찬받은 것만으로도 몹시 기뻤던 카를리아즈는 엘리제의 뜻에 따라 주었다.







“그가 그러라고 하면, 그때부턴 늘 함께 있을 수 있는 거지?”



“어…. 그건, 그때 가서 결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정부라는 게 어떤 건지 저도 잘 몰라서….”







엘리제는 대충 둘러댔다. 벌써 두 번이나 대답을 미뤘으니 다음엔 방법이 없겠지만, 당면한 일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그녀에겐 나중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설마 블레이크가 진심으로 그랬겠어?’







그가 보이는 애정을 생각하면 그럴 리 없다고 홀로 결론 내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밖으로 나가는 편이 좋겠어요.”







너무 오랜 시간 함께 있다간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바트 루오스가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말하긴 했으나 아직은 그를 믿을 수 없었다.







“잠시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비정상적인 공간들에 대해 먼저 신고하고.”







준법정신 투철한 윗세계 요원답게 그는 환상 호수와 황제궁을 신고했다. 절차가 복잡하지 않아 보고서 작성 후 전송까지 순식간이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사실확인이 끝나면 지금 이 공간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살짝 아쉽긴 해도 남겨 둠으로써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면 닫는 편이 나았다.







“다 끝난 거죠?”







눈앞에 펼쳐진 환상에서 벗어나려 엘리제가 그의 손을 잡았을 때였다.







“저기, 엘리제.”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다면…. 나가기 전에 내게 입 맞춰 주면 안 되나. 한번만.”







잘생긴 얼굴에 면역이 있는 그녀조차 적응 안 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가 바지가 터질 지경으로 아래를 세우고선 수줍게 묻는 모습은 정말, 아찔했다. 아마 생전에 그를 만났다면 먼저 덤벼들어 옷을 벗기는 건 그녀였을 것이다.







“아…. 그, 그래요. 그러죠, 뭐.”







취향 따위 씹어 먹는 미인에게 키스 한번 해주는 게 문제 될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키스 같은 건 한두 번 한 게 아니지 않은가.







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져 갔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지 다른 한 손을 들어 가슴을 꽉 누르기까지 한다.







“응…. 고마워.”







엘리제는 그런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까치발을 들기 전, 그가 먼저 몸을 낮췄다.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대신에 저도 얼굴 한번만 만져 봐도 돼요?”







아까부터 궁금했었다. 저 투명하리만치 고운 피부가 얼마나 탱글탱글할지.







“물론이지. 얼마든지 만져도 된다.”







그의 허락에 엘리제는 더듬더듬 그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예상한 대로 부드러웠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하여 조각상 같기도 했다. 눈두덩이를 더듬던 손을 미끄러뜨리자 그가 살며시 뺨을 기대 왔다.







“엘리제….”







손바닥에 느껴지는 온도가 뜨끈했다. 숨결 또한 그러했다. 지금 그와 입을 맞추면, 제 속까지 뜨끈해질 것 같았다. 저를 담은 눈동자의 온화함과 바보같이 풀어진 표정, 발긋해진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참으로 알기 쉽단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떠한지.







입술이 겹쳐졌다. 살짝 짓눌리다 벌어져 서로를 머금었다. 빨고, 빨리다가 틈 없이 맞물렸다. 험하게 부딪히는 일 없이 녹을 듯 달콤하게 휘감겼다.







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고, 그는 그녀의 뺨과 등을 감싸 안았다. 절로 몸이 달아올랐다. 느껴지는 심장의 박동이 너무도 거세어 제 것마저 빠르게 두근댔다.







가까스로 입술을 떼었다. 더 이어 갔다간 참지 못할 거라 직감했다.







“네가 좋다.”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속삭였다.







“너무 좋아서 기쁘고, 너무 좋아서 괴롭다.”







몸을 옭아매었던 손을 느리게 거두어들이며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너와 닿을 수 없는 모든 순간에 갈증이 일어. 이런 마음을 알게 되는 날이 네게도 오겠지. 그게 나일까 봐 설레고, 내가 아닐까 봐 두렵다.”







엘리제가 감았던 눈을 뜨고 카를리아즈를 올려다봤을 때, 이미 그는 평소의 루카스가 되어 있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담담한 얼굴에 눈빛만이 평소보다 부드러울 뿐이었다.







“…가요.”



“그래.”







‘나가겠다’ 마음먹는 순간 온화한 미풍이 불어왔다. 그녀와 그를 휘감아 돌다 사라졌다.







아직 달이 지지 않은 시각, 두 사람은 호숫가에 나란히 서 있었다. 흩어진 공간에서의 시간이 꿈인 양 아득했다.







자박, 발소리가 들렸다.







“어? 클랜튼 경?”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들은 동시에 몸을 돌렸다. 바트 루오스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아…. 그, 그렇군요.”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는 그를 잠시간 쳐다보던 그가 엘리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비전하,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큰일? 무슨…?”



“제도에서 내전이 벌어진 듯합니다. 2황자가 군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현재, 제도로 통하는 모든 이동 마법진이 봉쇄됐고요.”



“뭐?”







엘리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전이라니. 시나리오 후반부에나 일어나야 할 일이 어째서 당겨졌단 말인가.







시기가 달라졌다면 양상 또한 다를 게 분명했다. 본래는 황태자의 타락과 만행이 도를 지나쳐 2황자를 중심으로 귀족들이 결집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세가 기우는 과정 없이 황태자의 세력과 2황자의 세력이 맞붙게 되었단 소리다.







“전하께선 아시고?”



“그쪽에 먼저 소식을 전했을 겁니다. 어서 본성으로 가시지요. 더 늦어지면 주군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알겠네. 그러도록 하지. 오라버니는 어쩌실 건가요?”



“함께 가지요. 저도 제도 상황을 알아야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였다. 바트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시지요.”







그것은 들꽃들을 모아 만든 꽃다발이었다.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자그마했지만, 색색의 꽃이 어우러져 사랑스러웠다.







“어….”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엘리제는 그가 내민 꽃다발을 받았다. 꽃을 꺾으러 가겠다며 호숫가에 온 만큼, 기사들이나 블레이크에게 보여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엘리제는 그의 세심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잘 쓸게. 고마워, 경.”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그녀의 인사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엘리제는 꽃다발을 든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가까이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쿤을 제외한 나머지 조사관들이 무사히 제도를 빠져나왔을지 걱정됐다.







‘메리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전혀 위안이 되진 않지만, 지금으로선 그녀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











“비전하께선 이미 본성 인근에 와계십니다!”







제도로 통하는 이동 마법진이 모두 불통이란 소리에 무작정 말 몇 필을 끌어와 올라타려던 블레이크는 전령의 다급한 외침을 듣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뭐?”



“전하지 말라고 하셔서 함구하였으나, 제도가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주군을 뵈러 출발하셨습니다.”



“엘리제는 내게 오지 않았다!”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블레이크는 제가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깨달았다. 고삐를 움켜쥔 손이 떨렸다. 아니, 손뿐 아니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짧은 순간 수십 가지 불길한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럼,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지?”



“그게… 비밀이어서요.”



“…….”







이 와중에도 꿋꿋하게 대공비의 비밀을 지켜 주는 전령을 모두가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공기가 쩌정,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전령이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무사하시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군.”







입술을 짓씹던 블레이크가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긴 한숨을 여러 번 내쉰 끝에 입을 열었다.







“클로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음산하기까지 했다.







“네, 주군.”



“기사들을 이끌고 대공비에게 가라. 나는 본성에 가 있겠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모셔오겠습니다.”



“서두를 필요 없어. 안전이 최우선이야.”



“명심하겠습니다.”







클로드가 전령의 인도를 따라 기사들을 이끌고 출발하자 블레이크 역시 말머리를 돌렸다. 횃불을 훤히 밝힌 대공성이 저 멀리 내다보였다. 초조함을 감추려 굳게 입을 다문 그에게 아무도 함부로 말을 붙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