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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입을 뻐끔대던 그녀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채 물었다.







“윗세계도 인력난이 심각한가 보죠?”



“글쎄. 그런 건 난 잘 모르겠다. 그저 난…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







살짝 눈을 내리깔자,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 위로 기다란 속눈썹이 드리워졌다. 가슴이 쿵 내려앉을 만큼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네가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모든 게 족할 것 같아. 임무를 망쳐도, ‘문’을 통과하지 못해도, 신께 닿지 못해도.”



“‘문’…이요?”



“응. 진정한 낙원으로 가려면 ‘문’을 통과해야 하거든. 어째서인지 나는 지난 500년간 통과하지 못했어. 무언가 부족한 게 있었던 거겠지. 다들 안타까워하며 도와주려 애썼지만, 결국엔 스스로 깨달아야 하니까.”



“세상에, 정말 쉬운 일이 없네요. 당신처럼 바르게 살아도 들어갈 수 없다니.”







엘리제는 놀란 척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윗세계 얘기나 조금 듣다가 임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상황을 회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도한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조금도 곁길로 새지 않았다.







“엘리제, 너와 함께라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너는 나를 이제까지보다 훨씬 나은 존재로 만들어 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것 따윈 상관없어. 모든 게 실패하더라도 난 너만 있으면 돼.”







그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너로 인해 나는 가슴이 뻐근할 만큼 기쁘고 행복하다. 처음이야. 이런 마음. 그리고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겠지.”







엘리제는 침묵한 채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여태껏 그가 제 감정을 한번씩 표출할 때마다 그녀는 대충 대꾸하고 넘겼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기에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어차피 그도 변하겠거니, 무심결에 생각했다. 500년 만의 첫사랑이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언제나 저 자신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녀였으나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엘리제는 ‘진심’을 나누는 삶을 살지 못했다. 가지지 못했기에 코웃음 치며 무시했지만, 사실은 그것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했었다.







아직은 순수하던 시절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녀에게 ‘진심’을 건넸다면, 분명 뛸 듯이 기뻐하며 받아들였을 것이다. 함께 제 모든 것을 나누고 행복해했을 것이다.







그렇게 상냥함을 배우고, 따스한 온기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냉소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엘리제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당신이 결국엔 알게 될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저 아마 윗세계에 못 들어갈 거예요.”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나를 데려갔다간 당신까지 쫓겨날지도 몰라요.”







눈부신 백색 공간이 그녀에게 불러일으킨 공포감은 그러한 것이었다. 저 자신이 얼마나 못되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지 낱낱이 알게 되는 건 몹시도 끔찍한 일이었다.







“여태껏 당신을 도와준 것도 절 위해서예요. 받기로 한 게 있으니까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속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진심을 얘기하는 눈앞의 사람을 더 이용해 먹자니 찜찜하고 거북했다. 그래서 엘리제는 자신의 바닥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란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못됐거든요. 악마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로요.”







민망함에 귀 끝이 붉어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네가 착하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안다. 선량한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윗세계 주민이 되었겠지.”



“어… 그건 그렇…죠?”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솔직했다.







“너와 함께 낙원에 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해. 소속이 바뀔 뿐, 나의 계약자로서 지금처럼 지내면 된다. 그래도 중간지대 조사관들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마음 편할 거야. 일하기 싫어지면 언제까지고 쉬어도 되고 성과에 대한 압박도 없지.”







렉스가 악마의 계약자로서 사는 것의 장점을 열심히 떠들어댔듯 그 역시 윗세계 요원으로서의 장점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거처도 네 취향대로 꾸밀 수 있다.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어.”



“뭐든지요?”







갑자기 그녀는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다.







“응.”



“사람도?”



“…사람?”



“어… 혹시 누구 한 명 데려갈 수도 있어요?”







굉장히 염치없는 부탁임은 알지만, 그녀에겐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엘리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작성 중이던 계약서로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을 말하는 거군. 네가 처음부터 만나려 했던 사람.”







어차피 그가 곧 알게 될 것을 알기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떤 사람이지? 네게 중요한 존재인가?”







엘리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에게 말해야 할지 잠시간 고민했다. 본래의 습관대로 제게 가장 유리한 쪽으로 계산하여 말하려다가 곧 포기했다.







지금은 상황이 영 좋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한 후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의 호감에 기대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제 친구였어요. 유일했죠. 솔직해져도 괜찮은 하나뿐인 사람이었어요.”







카인 리베르토가 벌인 일의 이유를 생각하느라 그와 보낸 지난 시간들을 곱씹은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함께 배우의 길을 걸어가는 동료이자 경쟁자이기도 했어요. 그가 있어 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악착같이 버텼죠. 다른 무엇보다 녀석한테 뒤처지고 놀림당하는 게 싫었거든요.”







혹독한 비판이 쏟아져도 고작 그 정도로 우울해하고 자빠졌냐며 혀를 차는 꼴을 보면 이가 갈렸다. 오기로라도 일어났다. 어떻게든 녀석보다는 한발 앞서고 싶었다.







“나름 괜찮은 배우가 됐다고 생각했을 때, 전 병에 걸렸어요. 꽤 됐을 거라는데 몰랐죠. 너무 바빴거든요. 뭐랄까, 기분이 이상했어요. 허탈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실감은 나지 않지만 죽을 준비를 해야 했죠. 벌여 놓은 일의 수습도 해야 했고. 그러던 중에 녀석이 찾아왔어요.”







가라앉은 눈으로 저를 보는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엘리제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이야기했다.







“함께 간 여행의 마지막 날, 그가 저를 죽였어요. 안락사에 쓰이는 약을 주사한 것 같아요. 절 죽인 연후엔 그 역시 뒤따라 죽었고요.”



“널 죽이고 나서 자살을… 했다고?”



“네.”







엘리제는 놀란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기다려 주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는, 지하세계에 있겠군. 살인을 저질렀으니.”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내기에서 진다면.”



“내기? 설마….”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악마와 계약했어요. 생전의 기억을 빼앗긴 채 이 세계에서 살고 있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카를리아즈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블레이크 프로이젠…?”



“맞아요. 계약 조건이 그거였나 봐요. 저와 맺어지는 것. 비록 형식적인 관계라 해도 일단은 부부니까요.”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랬던 건가. 이제야 알겠군. 악마가 진명을 일부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내가 대공의 몸을 차지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리고 그가… 그토록 네게 집착하는 이유도.”



“이해되진 않지만, 절 사랑해서 그런 거래요. 웃기죠? 하여간 멍청한 놈이라니까.”



“엘리제.”







그의 나직한 부름에 엘리제는 움찔했다. 담담히 그에 관해 말하면서도 사실 그녀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카를리아즈가 내뱉을 말이 무서웠다. 약점을 잡힌 듯 초라하게 움츠러들었다.







“그를 구하고 싶은 거지?”



“…….”







정곡을 찔린 듯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카를리아즈가 눈을 내리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그가 적어 내려가던 계약서가 그 자리에서 바스러져 사라졌다. 의아해하는 엘리제에게 그가 말했다.







“내가 윗세계의 요원이라 한들 악마의 소유가 된 영혼을 강제로 빼앗아 올 순 없다. 잠시간 빌려오는 형태로 너와 만나게 해줄 순 있지만 네가 원하는 건 고작 그런 게 아니겠지.”







눈을 감고 있어 그가 저를 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내어 ‘그렇다’고 말해 버리면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아랫입술을 꾹 물고 수십 가지 감정을 억눌렀다.







“가장 좋은 건 그 스스로 내기에서 이기는 걸 테지만, 쉽지 않을 거야. 악마들은 애초에 질 것 같은 내기를 제안하지 않을뿐더러 계약 조항에 장난을 쳐 놓는 경우가 허다해.”







닫혀 있던 그의 눈꺼풀이 스르르 들려 올라갔다. 다채로운 색으로 일렁이던 그의 눈동자가 선명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와 함께 활짝 펼쳐진 금빛 두루마리가 그와 그녀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놈들의 방식을 우리가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네가 날 믿어야 해.”







엘리제는 투명하게 비치는 계약서를 바라봤다. 그곳에 적힌 문자를 그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이건 하늘의 언어로 완성된 계약서야. 악마들이 훔쳐내 읽을 수 없지. 엘리제, 여기에 적힌 내용에 동의할 수 있겠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동의하란 소린가요?”



“그래.”







그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를 설득하려 들지도 않았고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엘리제는 그를 한번, 금빛 계약서를 한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걸로 그 녀석을 구할 수 있어요?”



“정확히는 너를 구할 수 있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미간을 살풋 찡그리는 그녀를 보며 그가 옅게 미소 지었다.







“나도 잘 몰라. 이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계약서니까.”



“와아, 정말 도박이네요. 어려운데요.”







엘리제는 이마를 짚고 끙끙거리며 생각했다.







그녀는 카인이 내기에서 이기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으로 ‘판정’받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해볼 테고 그게 불가할 것 같으면 악마 놈을 공략해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실패할 때를 대비해 일종의 보험을 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윗세계의 계약서인데 설마 제게 해가 되겠는가.







“좋아요.”







고민을 끝낸 엘리제가 이마에서 손을 떼며 답했다.







“당신을 믿겠어요.”







무엇보다 카를리아즈의 ‘진심’은 거짓이 아니리라 확신했다.







“여기 적힌 모든 내용에 동의할게요.”







엘리제가 동의 의사를 밝히는 순간 금빛 계약서의 하단에 예의 읽을 수 없는 언어가 한 줄 추가됐다. 아마도 서명 같은 게 아닐까.







“잘 생각했어. 이것은 신께서 허락한 너와 나의 맹세다. 다른 모든 것들에 우선할 것이다.”







환한 빛을 뿜어내던 두루마리가 도르르 말려 올라갔다. 그것이 사라짐과 동시에 카를리아즈의 눈동자도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엘리제는 녹음을 닮은 그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마워요, 칼. 잘은 모르겠지만 당신에게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여태껏 쌓은 공로와 바꾼 거니까.”



“어…. 전부요? 설마 500년치?”



“응.”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다.







“뭘 그렇게까지 해요! 부담스럽게! 이러다 다 같이 망하면 어쩌려고!”



“괜찮다. 말했잖아. 너만 내 곁에 있어 주면 뭐든 상관없다고.”







그의 대답에 그녀는 도르르 눈을 굴렸다.







“어…. 음…. 그거 참, 신기한 마음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카인 리베르토도 이상하지만, 카를리아즈 역시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다 저렇게 이상해지는 걸까. 엘리제는 괜스레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우리 이제 어쩌죠? 뭔가 수습할 방법이 있을까요?”



“글쎄….”



“당신 정말 너무한 거 아녜요? 어떻게 그렇게 대책이 없어요? 지금 프로이젠에 블레이크가 와 있는 건 알아요? 당신과 내가 같이 있는 걸 알면 난리 날 거라고요.”







엘리제의 말에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아직 듣지 못한 건가?”



“뭐를…요?”



“그가 내게 제안한 것.”







멀뚱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카를리아즈는 엘리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정부가 될 수 있게 해주겠다더군. 네 곁에서 널 돌보고 지키는 조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