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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루카스를 만나 얘길 듣는 게 급선무였다.
패널 디스플레이를 종료하고 환상 호수를 빠져나가려 할 때였다. 그녀를 둘러싼 주변 경치가 갑작스레 바뀌었다. 어두컴컴하던 창고와 허름한 극장이 사라지고 눈부신 백색 공간이 펼쳐졌다.
엘리제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근원적 두려움을 자극하는 장소였다. 숨이 턱 막히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여긴, 대체….’
살갗에 닿는 공기가 다스함에도 몸이 떨렸다. 제 모든 것이 드러나도록 완전히 발가벗겨진 것 같았다. 숨고 싶고 가리고 싶어도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앗…!”
말 그대로 위에서부터 뚝 떨어져 안겨드는 남자로 인해 엘리제는 뒤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부딪힐 충격을 예상하였으나 마치 푹신한 쿠션 위에 누운 것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엘리제의 눈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은청색 머리칼이 보였다.
“…칼?”
엘리제는 간신히 소리를 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그제야 살짝 고개를 들었다. 엘리제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는 마치 빛으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투명하리만치 고운 피부와 옷자락까지 모든 것이 은은히 빛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건 그의 눈동자였다.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그것은 담을 수 있는 모든 색을 머금고선 반짝이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엘리제. 지금 바로 널 만나야 했어.”
가슴이 간질간질할 정도로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분명 아는 얼굴이고 익숙한 목소리인데도 모든 게 낯설었다.
수백 가지 의문이 뒤엉켜, 말문을 잃은 그녀에게 그가 입을 맞춰 왔다. 벌어진 입술을 통째로 머금어 부드럽게 빨아 비볐다. 그녀의 눈과 귓불과 뺨을 연신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손길은, 몹시도 소중한 것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멍한 정신에 겨우겨우 떠오르는 생각의 단편을 붙잡으려 애써 보아도 홀린 듯, 혹은 취한 듯 덧없이 흩어졌다. 그것은 공간이 주는 성스러운 위압감 탓이기도 했고, 눈앞의 존재가 흘리는 아득한 힘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나 너뿐이야.”
더없이 기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네가 내게 가르쳐 주었지. 하나하나 이 손으로 직접.”
한 명만 이성이 흐려도 혼란스러운 마당에 카를리아즈 역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마치 주인 만난 개처럼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드러난 살결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옷을 벗기는 법부터 시작해서 하나가 되는 법까지 전부. 서툰 내게 너는 뭐든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그는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속옷의 리본을 잡아당겼다. 붉은 레이스 속옷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희고 탐스러운 가슴이 드러났다.
“비록 너는 내 것이 아니지만….”
목덜미에서부터 가슴까지 빼곡하게 이어진 붉은 흔적들을 바라보며 슬프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네가 날 받아 주기만 한다면.”
바지가 벗겨져 매끈히 뻗은 다리가 드러났다. 골반의 매듭을 풀자, 밀부를 가리고 있던 속옷마저 간단히 떨어져 나갔다.
그는 그녀에게 배운 것을 실수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냈다.
“엘리제.”
그의 입가에 흐린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나를 허락해 주겠지?”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았다.
그는 엘리제가 제대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말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전혀 모르는 듯했다.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져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는 그녀였다. 거절의 의사가 보이지 않자 그는 그것만으로 허락이라 판단했다. 긍정의 답인 줄 착각했다.
“정말 기뻐. 너와 하나가 될 수 있다니.”
그가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던지며 몸을 겹쳐 왔다. 그녀의 둥그런 무릎에 입을 맞추며 다리를 잡아 벌렸다.
엘리제의 눈이 커다래졌다.
“잠깐…. 카를, 읏…!”
그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싶은데,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공간이 지금도 그녀를 샅샅이 파헤치고 관음하는 듯했다. 초조와 불안에 휩싸여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미약하게 바르작댔다.
갈라진 틈을 오가며 비비던 선단이 정확한 위치에서 멈췄다. 유심히 아래를 살피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흐려진 연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채 조금씩 상체를 기울였다.
“날 받아 준 걸 후회하게 하지 않을게.”
다소 긴장한 듯 입술을 물고 몸을 굳히더니 단번에 파고들었다.
“흐읏…!”
“윽….”
허리와 허벅지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아직 충분히 젖지 않은 몸이 버겁게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를 깊숙이 끌어안은 채 그가 긴 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좋긴 했는지, 그는 삽입 직후 바로 사정했다. 단단하게 부푼 것이 안쪽 깊숙이 토해내는 뜨끈한 액체에, 그녀는 잠깐이나마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칼, 지금은 이럴 때가…. 그러니까, 이것 좀 그만….”
간신히 더듬더듬 말했으나 그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주는 쾌감에 함락된 것이다. 여자를 안은 것이 처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멈추기는커녕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기쁘게 헐떡였다.
“어떻게 해야 네가 좋아하는지, 나도 이제 조금 알아. 열심히 배웠거든.”
한 차례 정액을 쏟아 냈음에도 그의 것은 처음과 다름이 없었다. 허리를 물린 그가 철퍽, 거세게 치받았다. 딸려 나왔던 탁액이 접합부를 엉망으로 적셨다.
“으흑, 아….”
다시 또 빼냈다가 콱 쑤셔 박고, 허리를 돌리다 빼냈다.
퍽, 퍽, 철벅. 젖은 소리가 지독히도 음란했다.
사정이 끝난 게 아니었는지, 그의 것은 계속해서 뿌연 액을 질질 흘렸다.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아, 더운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엘리제, 하아…. 엘리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쉼 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안쪽 깊숙이에 위치한 쾌락점을 연신 찌르고 문지르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흐윽, 윽, 으응….”
엘리제는 정신없이 흔들리며 그가 쏟아 내는 욕망을 받아 냈다. 이제는 온몸이 미끈미끈 축축했다. 입술이 삼켜지고, 가슴이 이지러졌다. 아랫배가, 허벅지가, 발끝이 감각을 잃어 갔다. 그에게 붙들린 몸이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았다.
미칠 듯한 쾌감. 그리고 절정과 절정. 몸을 짓누르는 배덕감. 입을 막는 죄책감.
성스러운 금지에서 엘리제는 범해지고 또 범해졌다.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곤 새까맣게 어두워졌다. 한번 내려앉은 눈꺼풀은 들릴 줄을 몰랐다.
‘이럴 때가, 아닌데…. 대체 시에나는 어쩌고….’
겨우 떠올린 생각을 마지막으로 엘리제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엘리제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카를리아즈를 볼 수 있었다.
“엘리제, 괜찮아?”
그가 다급히 물었다. 그녀는 두어 차례 눈을 깜빡이다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칼…!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다행히 아까의 백색 공간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들은 작고 아늑한 방에 함께 있었다.
“미안하다. 네가 어떠한 상태인지 미처 알아채지 못했어.”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 공간이 외부 세계와 연결된 줄 알았다면 힘을 먼저 갈무리했을 텐데.”
그제야 엘리제는 그의 달라진 외양이 무엇 때문인지 깨달았다. 외부 세계와 연결되며 흘러든 본신의 힘이 원래 모습을 되찾게 한 모양이다. 신비롭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한 카를리아즈의 모습이 낯설어, 엘리제는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신이 한 영혼을 무한히 사랑하여 공들여 빚어낸 완벽한 육신 같았다.
할 말이 수십 가지였으나 엘리제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먼저 물었다.
“시에나와 섹…스는 잘하고 온 거예요?”
전에는 거리낌 없이 말하던 단어를 어쩐지 더듬게 되었다.
“아니. 못했어.”
“네에? 왜요?”
“아무것도 반응을 안 해서.”
“반응을 안 하다니 무슨….”
“몸도 마음도, 내 영혼도 다른 여자에겐 반응하질 않아. 강력한 최음제도 소용없었어.”
엘리제는 당혹스러움에 눈만 꿈뻑였다. 그러다 그가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강력한 최음제도 통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설마, 안 섰어요?”
경악하여 내지른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세상에 그럴 수가. 잘만 서던 게 왜…?”
엘리제의 시선이 그의 그곳을 향했다. 그리고 실시간으로 부풀어 오르는 바지를 볼 수 있었다.
“어디서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로 내 몸은 네게만 반응하는 것 같다.”
“그럴 리가…. 무슨 그런 경우가 다 있어….”
이러려고 그를 교육한 게 아니다.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그의 성욕을 일깨우고 키스를 비롯한 각종 야한 행위를 가르친 건 순전히 필요에 의해서였다. 제게 홀딱 빠져 매달리고 덤벼들라고 가르친 게 아니었다.
“당신이 시에나와 이뤄지지 않으면….”
시나리오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아 임무를 망치면, 세계가 멸망해 버리면.
“이제 어떡해요. 어떡하냐고요.”
아연함에 이마를 짚고 중얼대던 그녀가 돌연 그의 그곳을 삿대질했다.
“섰잖아! 선 김에 어서 가서 덮치고 와요! 이제 실습도 해봤겠다 아주 잘하겠네!”
물론 제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당신, 나와의 약속은 어쩔 거냐고!”
“그건 염려할 것 없다. 나는 네게 넘칠 만큼 도움을 받았고 임무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약속을 지킬 거야.”
마구 흥분하여 내지르던 엘리제는 멈칫했다.
“…정말요?”
“원한다면 계약서를 발급해 줄 수도 있다. 마침 이곳에선 윗세게 인증까지 바로 받을 수 있을 것 같군.”
까맣게 죽어 가던 엘리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좋아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세상이 망하더라도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허공에 손을 뻗자 두루마리 하나가 촤르륵 펼쳐졌다.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나타난 깃펜을 손에 쥔 그가 빠르게 항목들을 적어 내려갔다. 엘리제는 그 모습을 옆에서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그가 적는 그녀의 의무사항들은 대부분 엘리제가 이미 그에게 해준 것들이었다. 하나라도 더 뜯어내려 수를 쓰는 야비한 악마 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장소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블레이크가 우연히 발견했다며 데려와 줬어요. 발을 들이는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 장소를 보여 주는 ‘환상 호수’래요.”
“그래?”
그의 손이 멈칫했다.
“여기와 비슷한 장소가 제도에도 한 군데 있어요.”
“어디?”
“황궁이요. 황제가 기거하는 궁에 들어섰을 때 ‘황궁 속 미궁’이라는 문구가 뜨며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장소에 발을 들일 수 있었어요.”
엘리제의 말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사가 필요하겠군.”
“이런 현상이 흔치 않나 보죠?”
“응. 지금은 괜찮지만, 혹여나 세계의 균열이 심해지면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어떻게요?”
“지금 당장 나 역시도 미약하게나마 본래의 모습을 이 세계에 드러낼 수 있지. 균열이 커질수록 그 틈도 커져. 닫혀 있을 땐 틈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던 존재들이 강림할 수 있게 된단 소리다.”
“그런….”
정말 그렇다면 매우 무서운 일이었다. 규칙을 잘 지키는 윗세계 존재들은 몰라도 악마들은 분명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그나저나…. 환상이긴 해도 이곳에 네가 있다는 게 신기하군.”
카를리아즈의 중얼거림에 엘리제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여기가 어딘데요?”
“내 거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다며 아까 보았던 그 눈부신 백색 공간이 윗세계의 모습이란 소린가.
“와아, 내가 천국을 다 가보다니. 죽고 볼 일이야.”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근데 좀…. 따분할 것 같은 장소네요. 이런 데 혼자 살면 심심하지 않아요?”
“그럼 같이 살아줄 텐가?”
엘리제는 풋, 하고 웃었다.
“이젠 농담도 하네.”
“농담이 아닌데.”
잠시 펜을 멈춘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제. 이번 일이 끝나면 나와 함께 윗세계에 가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