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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관계를 얘기하는….”







말끝을 흐리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빙긋이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엘리제 님 편이니까요. 대공님께도 말 안 할게요.”







블레이크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거로 봐선 특훈이랍시고 벌인 야한 행각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문제는 루카스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지였다. 떠보기엔 조금 위험한 화제였다.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 거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엘리제는 로버트 실러라는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팬이라며 얼굴을 붉힌다고 모두 다 팬은 아니다. 수없이 경험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 역시 악마의 계약자인지도 모른다. 중간지대나 윗세계에 소속되지 않은 이상 끝까지 방심해선 안 된다. 루카스가 윗세계 요원이라는 것을 안다고 먼저 내색하기 전엔 이쪽에서도 밝히지 않는 편이 나았다. 불륜으로 오해할지언정.







“고마워. 모른 척해 준다니까 안심이 되네. 사실은 조금 불안했는데.”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그럼요.”







엘리제는 대가 없이 건네는 호의를 의심 없이 덥석 받을 만큼 순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맹한 애처럼 구는 편이 그를 방심하게 만들기엔 훨씬 좋을 것이다.







“알았어.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녀는 몹시도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혹시 당신은 원하는 거 없어? 나 역시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착한 척하며 그를 찔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는….”







잠시간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엘리제 님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 제게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거예요. 말했다시피 생전에 전 엘리제 님의 팬이었거든요.”







그를 믿어도 될지 섣불리 판단할 순 없지만 내건 조건이 어렵지 않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적당히 친근하게 대해 주며 얼마간 지켜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 알겠어. 둘이 있을 땐 얼마든지 편하게 대해도 좋아. 나도 그럴게.”



“고마워요, 누나!”







누나란 말에 엘리제는 움찔했다.







“…나보다 어렸어?”



“죽기 전엔 스물한 살이었어요.”







세상에, 엘리제는 작게 중얼거렸다.







“한창때 죽었네. 아깝게.”



“그래도 지금이 더 좋아요. 누나와 이렇게 가까이 지낼 수 있잖아요. 죽기 전엔 상상도 못했는걸요.”



“겨우 그런 거로 좋아하면 안 되지.”







엘리제의 말에 그는 아하하 웃었다. 험상궂은 얼굴이라도 밝고 쾌활하게 웃으니 나름 귀여워 보였다.







두 사람은 다시금 호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여기 온 걸 보면, 누나도 죽은 거예요?”



“응? 뭐 그렇지.”



“왜요? 어쩌다가요?”







저리 묻는 거로 보아 아무래도 그는 엘리제가 죽기 전에 죽은 듯했다. 아니면 아직 그녀와 카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던가.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엘리제의 어정쩡한 대답에 그는 눈을 끔뻑였다.







“아프시단 얘기는 들었는데…. 세상이 발칵 뒤집혔겠네요.”







아마 그러긴 했을 테다. 얼마나 자극적인 소식인가. 탑배우라 할 만한 두 사람의 동반 자살이라니.







물론 엘리제는 그런 식으로 생을 끝낼 생각이 없었지만,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판단했을 것이다. 계약 탓에 엘리제의 몸 상태에 대해 아는 사람이 꽤 있었던 데다가 여행을 떠나기 전 재산 정리와 유언장 작성도 마쳤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금방 잊히겠지.”







얼마간 떠들다가도 새로운 흥밋거리가 생기면 기억 속에서 묻힐 것이다. 대중들의 관심이란 본래 그런 법 아닌가.







그와 그녀에겐 오래오래 기억하고 애도해 줄 가족이나 연인도, 친구도 없었다. 서로를 제외하면.







“여기부터는 나 혼자 갈게.”







저 멀리 호수가 보이기 시작하자 엘리제가 멈춰 서 말했다.







“조용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아….”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호수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큰 위험이 없으리라 판단한 듯했다.







“네. 그럼 전 여기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무슨 일 있으면 부르시고요.”



“응. 고마워.”







바트를 오솔길에 남겨둔 채 엘리제는 홀로 호숫가로 향했다.







블레이크와 함께 왔던 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검푸른 수면 위, 달빛만이 밝아 고즈넉했다.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준다는 환상 호수였으나 엘리제는 굳이 어딘가를 떠올리려 애쓰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내디뎠다. 어차피 그녀의 목적은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완료하는 것뿐이었다.







발끝이 호숫물에 닿는 순간 주변이 바뀌었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엘리제는 놀라지 않았다.







숲과 호수가 사라지고 익숙한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기에 앞서 약지의 반지를 톡톡 두드렸다. 패널 디스플레이 정중앙에 기다렸던 알림창이 떠올랐다.







『중지된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재개하시겠습니까?』







수락 버튼을 누르자 15퍼센트가량 남은 게이지 바가 화면에 떠올랐다. 확실히 ‘황궁 속 미궁’에 비해 차오르는 속도가 빨랐다. 그대로 화면을 띄워둔 채 엘리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선 곳은 극장이었다. 열넷의 엘리제가 가출 후 지낸 장소였다.







오랜만에 와보는 극장은 기억 속에서보다 작고 허름했다. 엘리제는 텅 빈 객석을 가로질러 무대 위로 성큼 올라갔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무 바닥이 삐거덕 소리를 냈다.







그녀가 전성기에 섰던 무대들에 비하면 이토록 초라하건만, 한때는 이 위에 서 보는 것이 꿈이었다.







엘리제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들의 삶이 화려해 보여서가 아니었다. 성공하여 잘 먹고 잘살기 위함도 아니었다. 극 중에서나마 엘리제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진절머리 날 만큼 그녀는 저 자신이, 제 삶이 지긋지긋했다.







게이지 바를 한 번씩 확인하며 엘리제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옛 보금자리가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했다.







무대의 뒤쪽, 대기실과 분장실을 지나면 창고 겸 소품실이 있다. 크고 작은 소품이 두서없이 쌓여 있어 비좁고 먼지가 득실했다. 열넷의 엘리제는 일 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 카인 리베르토와 함께.







카인은 병원에서 도망쳐 갈 곳 없던 엘리제를 자신의 일터이자 보금자리에 데려왔다. 낡은 모포와 그럭저럭 푹신한 잠자리를 그녀에게 양보했다.







창고 안은 어두웠지만, 문을 비스듬히 열어 두면 밖의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더불어 배우들의 목소리도 아주 잘 들렸다.







꿰맨 상처가 나아 움직일 수 있게 되기까지 엘리제는 꼼짝 않고 누워 배우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카인 역시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인 소년이었다. 지금은 창고에서 숙식하며 극장을 청소하고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잡일꾼에 불과하지만 언젠간 유명한 배우가 될 거라며 큰소리쳤다.







[나는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겠습니다. 천상의 기쁨 속에 그 죄악을 맛보겠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연극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그래서 베르테르의 대사를 외워 따라 하곤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나의 것입니다. 안녕. 안녕, 로테.]







엘리제는 그런 그의 연기를 봐주는 유일한 방청객이었다.







[지랄.]







엘리제가 낮게 중얼대면 그는 와락 인상을 썼다.







[너어.]







카인은 사랑의 환희와 절망을 연기하기엔 너무 어렸다. 간혹 단역 오디션에 도전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차라리 그 나이 또래 소년들에게 어울릴 법한 역할을 연습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뭘까.]







그는 늘 고민하곤 했다. 엘리제는 어깨만 으쓱였다. 카인이나 그녀나 사랑이란 걸 경험한 적 없긴 매한가지였다.







어쨌든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자신의 연기를 봐주고 평가해 주는 게 좋았는지, 카인은 그녀의 상처가 아물고 나서도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내쫓지 않았다. 가져온 빵을 나눠 주고 옷가지도 구해다 주었다.







엘리제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그에게 선심 쓰듯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그가 어디선가 주워 온 대본 쪼가리를 읽어 주고 단어의 뜻을 알려 주었다.







어느 정도 움직일 만해졌을 땐 엘리제도 그를 도와 극장의 잡일을 했다. 서로 다른 이유였지만 함께 배우의 꿈을 키워 나갔다.







“카인 리베르토.”







엘리제는 소년 소녀가 함께 웅크려 누웠던 창고에 우두커니 서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이 뭘까 늘 고민하던 그는 결국엔 답을 찾았다. 한참이나 이상한 방식이긴 해도.







마음이 복잡했다.







카인과 악마가 무엇을 걸고 내기했을지는 빤했다. 아마도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일 터였다. 엘리제가 남편인 블레이크를 사랑하게 되면, 아마도 내기는 카인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녀석이 한심하고 짜증스럽긴 해도 변태 같은 악마 놈한테 지는 꼴은 보기 싫었다. 일단은 이기게 하고 나서, 욕을 하든 두드려 패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사랑이란 거.”







우습게도 그 옛날 녀석이 하던 고민을 저 자신이 하게 생겼다.







“어떻게 하는 건데.”







차라리 어린 소녀였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제는 스물아홉 해를 살았고 사랑이란 것이 제 인생에는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확신했을 때에 죽었다. 그건 아마도 렉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악마는 승산 없는 내기를 하지 않으니까.







엘리제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순조롭게 차오르던 게이지 바가 반짝이다 사라졌다.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었습니다.』







완료를 알리는 알림창이 떠오르자 엘리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단한 건 아니더라도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엘리제는 재빨리 메뉴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타락한 연인(ch21)



▶대본



▷작품소개



▷등장인물 열람



▷지도』







엘리제는 우선 한번도 열린 적 없던 ‘등장인물 열람’부터 확인했다. 역시나 정보 제한 문구 없이 정상적으로 열람할 수 있었다.







『등장인물 열람







시에나 라우디아(S)



나이: 18세



성향: 외유내강형 평화주의자



특기: 회유(S), 중재(S)







루카스 클랜튼(?)



나이: ?세



성향: 냉정한 심판자



특기: ???(측정 불가)







에릭 러셀(S)



나이: 20세



성향: 잔혹한 염세주의자



특기: 검술(S), 마법(A), 통치(A)







렉스 러셀(?)



나이: ?세



성향: 무분별한 쾌락주의자



특기: ???(측정 불가)







블레이크 프로이젠(S)



나이: 24세



성향: 냉혹한 독선주의자



특기: 통치(S), 검술(S)







엘리제 프로이젠(S)



나이: 19세



성향: 영리한 이기주의자



특기: 미혹(S), 임기응변(S)』







“이게 다 뭐야?”







엘리제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등장인물들의 정보를 하나씩 확인했다. 시나리오상에 영향력을 많이 끼치는 사람들부터 우선하여 정보가 등록돼 있었다. 조연들까지 있었기에 스크롤을 내리고 내려도 끝이 없었다.







엘리제는 거의 최하단쯤에서 바트 루오스의 이름을 발견했다.







『바트 루오스(A)



나이: 21세



성향: 집요한 망상가



특기: 검술(A), 해체(A)』







“집요한 망상가는 또 뭐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곰곰이 생각해 봐도 선악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특기라든지 그 외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선 다른 조사관들에게 물어보기로 마음먹고, 엘리제는 여태껏 제일 자주 써먹었던 ‘지도’ 탭을 확인했다.







“어…?”







색이 들어간 점 위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엘리제가 놀란 것은 ‘지도’의 한층 더 유용해진 업그레이드 상태 때문이 아니었다.







“루카스?”







루카스라 표시된 초록색 점이 그녀가 있는 곳에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 밤이 시에나와의 첫날밤이건만 왜 지금 그가 프로이젠 영지에 와 있단 말인가.







‘설마 벌써 끝내고 온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그거야말로 끝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