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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열 오른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누르고 있을 때였다.
“대공님도 이것 좀 드세요.”
상급 마법사 올리비아가 따끈한 빵을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블레이크는 얼굴에서 손을 떼고 그녀가 내민 빵을 받아 들었다. 볼이 불룩하도록 빵을 베어 물고 오물거리는 그녀는 걱정 근심이 없어 보였다.
눈 밑이 시커메지도록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는 다른 마법사들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요즘은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모양이군.”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그녀가 하하 웃었다.
“네. 너무 잘 지내고 있죠.”
가장 필요한 순간에 두 번이나 납치당해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어 놓고선 혼자 즐겁고 행복한 것 같아 블레이크는 괜스레 짜증이 났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긴 왜 왔나.”
“우와, 무보수로 일해 드리는데 너무하시네요.”
“자네가 그럴 리 없는데 말이야.”
“저 사실 연애해요.”
작게 소곤댄 올리비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저쪽에 선 기사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르셀 경?”
“오, 단번에 맞추시네요.”
유독 외모에 신경 쓴 티가 나서 모를 수가 없었다. 납치당한 올리비아를 구하는 임무에 매번 마르셀이 자원했던 것이 생각났다.
팔짱을 낀 채 올리비아를 쳐다보던 블레이크가 불쑥 물었다.
“여자는 뭘 해줘야 좋아하지?”
“헉, 지금 제게 연애 상담하시는 거예요?”
올리비아는 너무 놀라 펄쩍 뛸 뻔했다.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대공이 이토록 인간적인 질문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대답이나 하지.”
“글쎄요? 뭐니 뭐니 해도 결국엔 돈?”
“…말고. 그런 데 욕심이 없어.”
블레이크는 절박했다. 엘리제의 마음을 제게 붙잡아 두기 위해선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올리비아의 조언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가까운 가신들은 대부분 미혼이었고 기혼이라 할지라도 그리 참고할 만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다수 남자니 여자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흠…. 혹시 꽃 선물해 보셨어요?”
“꽃? 고작 그런 걸 좋아할까?”
“그럼요! 여자는 의외로 그런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법이거든요. 못 믿겠으면 화관이라도 만들어 쓰고선 만나러 가 보세요. 목에 리본을 달면 더 좋고요. 그러고서 말하는 거예요. 선물이야, 날 가져.”
“…….”
내내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클로드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주군께서 진지하게 묻는데 왜 농담을 하는 거요?”
“어머? 진짠데? 어느 여자가 그런 사랑스러운 남자를 받아 주지 않겠어요?”
올리비아의 확신에 찬 대답에 그는 멈칫했다.
“…진심이오?”
“그럼요.”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가 마르셀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마르셀도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만들 줄 몰라.”
낮고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올리비아와 클로드는 동시에 블레이크를 돌아봤다.
“네?”
“화관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 건 어떻게 만들지?”
“가르쳐 드려요? 어차피 지금 딱히 할 일도 없으신 것 같은데.”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건가?”
“그럼요.”
올리비아의 말대로 지금 당장 블레이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붉게 물든 강물은 마법사 학회와 아카데미에 조사를 의뢰해 놨고 기사들에게도 영지 수색을 명했으니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우두커니 서 있을 시간에 뭐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다간 겨우 떨쳐낸 우울감에 질식할지도 모른다.
“부탁하지.”
“알겠어요. 가요. 마침 저쪽에 들꽃이 많이 피었네요.”
블레이크는 앞서 걸음을 옮기는 올리비아를 묵묵히 따라갔다.
클로드는 들꽃이 핀 언덕에 쪼그려 앉아 꽃송이를 만지작거리는 대공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이들 모두 입을 헤 벌리고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 쪽이 정상이고 어느 쪽이 비정상인지 그는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프로이젠에 들어선 엘리제는 본성이 아닌 환상 호수 쪽으로 경로를 틀었다. 호숫가에서 대공에게 줄 꽃 몇 송이 꺾어 가겠다는 대공비의 요구를 기사들은 군말 없이 따라주었다.
그렇게 하여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 그들은 프로이젠 외성 북쪽 숲에 당도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고 싶은데.”
호수로 향하는 오솔길 앞에서 엘리제가 꺼낸 말에 기사들 모두 사색이 됐다.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관리하에 있는 숲이긴 하지만 지금은 밤입니다. 여우 한 마리도 비전하께는 위험합니다.”
“여우? 이곳에 여우가 산다고?”
대공비가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자 앨런이 끙,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정도의 날짐승은 잡지 않고 내버려 두니까요.”
“지난번엔 토끼 한 마리 못 봤는데. 괜히 하는 말 아닌가?”
“그땐 주군께서 동행하셨잖습니까. 동물들은 사람보다 감이 좋습니다. 알아서 포식자를 피하지요.”
“블레이크가 포식자….”
하긴 곰과 치고받고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남자이기는 하다.
“알겠네. 그럼 바트 경에게 호위를 부탁하지.”
애초에 혼자 갈 생각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말했다. 엘리제의 지목을 받은 바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제가, 단독으로 비전하의 호위를….”
“곤란한가?”
“아니,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모시겠습니다.”
“목숨을 걸 것까지야.”
그는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여 엘리제는 바트와 단둘이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부엉이가 부엉부엉 울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바트가 세 걸음쯤 되었던 그녀와의 간격을 한 걸음으로 좁혔다.
“부엉이도 사람을 공격하나?”
“그렇진 않습니다만, 혹여 가까이 날면 비전하께서 놀라실 것 같아서….”
“사려 깊군. 덕분에 안심이 되네.”
엘리제는 그를 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경이 내 호위가 된 지도 꽤 되었군. 기사로서의 삶에 달라진 게 많을 테지.”
“훈련엔 착실히 임하고 있습니다. 비전하를 모시는 영광스러운 임무에 실수가 있어선 안 되니까요.”
“영광스러운 임무라. 그리 말해 주어 고맙긴 하네만….”
엘리제는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혹,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게. 지루할 것을 모르지 않으니까.”
씁쓸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내뱉은 말에 바트가 깜짝 놀라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요한 숲이 쩌렁, 울릴 정도의 외침에 엘리제는 걸음을 멈췄다. 앞으로 나와 그녀와 마주 선 바트가 절박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전하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제겐 꿈같은 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
엘리제는 그리 말하는 그를 그저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앨런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저는 분명 그렇습니다.”
“내가 뭐라고 경이 그리 생각한단 말인가. 대공비가 되기 전까진 나를 본 적도 없을 텐데. 어쩌면 소문은 들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별로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니겠지만.”
엘리제의 말에 그는 멈칫하여 입을 다물었다. 바트의 머뭇거림을 눈치챈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경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군. 난 그저, 너무 애쓸 것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네.”
연보랏빛 눈동자에 드리워진 길고 가냘픈 속눈썹이 처연했다.
“이만 가지.”
엘리제가 다시 걸음을 옮겨 그를 지나쳐 가려 할 때였다.
“엘리제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바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주군의 아내에게 손을 댄 데다가 멋대로 이름까지 부른 불경을 저지르고도 그는 거리낌이 없었다.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저를 붙든 손에 향해 있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얼굴로 옮겨 갔다. 그는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얼굴이었다.
‘드디어.’
이를 본 엘리제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여기가 <타락한 연인>이란 영화 속 세상이라는 것도, 엘리제 님이 본래 이 영화의 주인공 역에 캐스팅되셨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하였음에도 눈이 부릅떠졌다.
“전 엘리제 님의 팬이었습니다. 운 좋게 같은 동네에 살았고 사인을 받은 적도 있죠. 엘리제 님은 기억 못 하시겠지만….”
바트의 험상궂은 얼굴에 수줍은 홍조가 번졌다.
“이름이.”
“로버트 실러입니다.”
“로버트 실러….”
역시나 바트는 카인 리베르토가 아니었다. 엘리제가 배우였다는 걸 안다는 점이 이를 증명했다. 악마에게 모든 기억을 빼앗긴 카인은 그녀의 전생은 물론이거니와 이 세계가 가짜라는 것조차 모르니까.
이젠 확실해졌다. 그토록 다정하여 엘리제의 마음을 흐물흐물 녹여 버린 그녀의 가짜 남편이 바로 카인 리베르토였다.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악마의 손을 잡은 어리석은 남자. 기억을 빼앗겼음에도 다시금 그녀를 사랑하고야만 그 멍청한 놈을 대체 어찌해야 하나.
새까매진 엘리제의 속을 짐작할 리 없는 바트가 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캐스팅이 무산됐다는 소식에 실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연히 <타락한 연인>의 대본을 줍게 되었습니다.”
“대본을… 주웠다고?”
“네. 자주 가던 클럽에서요. 아무래도 영화 관계자 중 하나가 떨어뜨린 모양입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되돌려 줄 수도, 놓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지고 나왔습니다. 잘못된 일인 줄은 알지만 궁금하기도 했고요. 대본을 주워 클럽을 나온 건 새벽녘이었습니다. 정신없이 읽으며 길을 건너는데 갑작스레 경적 울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입술을 깨물며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낯빛이 창백했다.
“트럭에 치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 죽은 거겠죠.”
“죽고 나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 건가?”
그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낀 엘리제가 물었다.
“네. 깨어나 보니 지금의 이 몸이었습니다. 다행히 바트 루오스의 기억이 합쳐져 의심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죠. 다만, 아직도 힘의 제어가 쉽지 않습니다. 전생의 제 몸과는 너무 달라서요.”
“그래서 그날, 검날을 부러뜨렸군.”
엘리제의 중얼거림에 그가 우물쭈물 변명을 덧붙였다.
“엘리제 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서요. 이 세계에서 엘리제 님을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거든요. 게다가 주인공이 아닌 대공비시라니.”
그런 이유라면 그가 저지른 대형 사고를 이해할 법도 했다. 그녀 역시 이 세계에서 갑작스레 아는 얼굴을 만났다면 깜짝 놀랐을 테니까.
“진즉에 아는 척 하지.”
“전생을 기억하신단 보장이 없어서요.”
“지금은 확신하였기에 말한 거고?”
“네.”
그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엘리제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자신이 한 행동 중에 의심할 만한 부분이 있었을까?
“제어되지 않는 부분엔 감각 또한 포함됩니다. 엘리제 님이 다른 이들과 나누는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여러 번 듣게 되었죠.”
뜻밖의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클랜튼 경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