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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클랜튼 경.”
“네, 영애. 말씀하십시오.”
“왜 제게 입 맞추셨어요?”
강한 최음제에 중독됐을 것임에도 그는 그녀에게 발정하지 않았다. 헉헉거리며 덤벼들지도 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저를 좋아하지도 않으시잖아요.”
시에나는 울상을 지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 답하며 그는 슬그머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좋아하는 게 뭔지, 어떤 마음인지 이미 아시잖아요.”
“…….”
“비전하를 좋아하시잖아요.”
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졌다.
“…영애께서 제게 이런 얘길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몰라서 물어요?”
자꾸만 시선을 피하자 그의 뺨을 덥석 잡아 제게로 끌어당기며 시에나가 말했다.
“이 방엔 왜 들어왔어요? 나랑 뭐 하려고 했어요?”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던 루카스가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섹…스…?”
그의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시에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그래요. 그걸 하려고 했겠죠. 저도 그러려고 했고요.”
“그렇다면 하면 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얘가 반응을 안 하잖아요!”
시에나의 시선을 좇아 제 아래를 내려다본 그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바지 위로 툭툭 건드려 본다. 당연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조물조물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네. 이게 왜 이러지.”
엘리제 곁에선 불끈불끈 잘만 서던 것이 지금은 꼼짝하지 않았다. 500년 동안 그래 왔듯 마냥 얌전했다.
그런 그를 허탈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시에나가 결국엔 제 죄를 실토했다.
“실은 제가 경께 최음제를 먹였어요.”
“최음제?”
“네. 매우 강력한 거로요.”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시에나는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여 입을 다물었고, 루카스는 당혹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얼마 전 그는 ‘보물찾기’ 도중 최음제에 중독됐었다. 해독하기 위해 치유의 힘을 발휘했지만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지금과는 몸의 반응이 전혀 달랐다. 시에나가 말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최음제에 중독된 줄도 몰랐다. 그저 대본에 적힌 대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때는 그토록 괴로웠던가. 어째서 색욕에 휩싸였던가.
그때와 지금,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엘리제가 곁에 없다는 점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날도 엘리제와 헤어진 이후엔 저절로 진정됐었다. 온 성에 퍼진 향을 지속해서 흡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시에나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경이 고, 아니…. 불능인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경도 부디 제가 저지른 짓을 용서해 주세요.”
“불능….”
“네. 혹시 해독제가 필요하신가요? 전혀 그래 보이진 않아서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녀는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오늘 일은 정말 죄송해요. 서로에게 못할 짓을 해버렸네요.”
머뭇거리던 루카스도 그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영애.”
대본과는 전혀 다른 대화가 오갔고, 섹스는 물 건너갔다. 임무를 망치게 생겼는데 이상하도록 마음이 평온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실패했다. 여태껏 저를 믿고 도와준 엘리제에겐 미안하지만, 그녀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을 나누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에나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먼저 가세요. 함께 나가면 안 될 것 같네요.”
관계의 진전이 불가함을 알게 된 이상 그와 함께 있는 걸 타인에게 목격당해선 곤란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귀가하십시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서, 루카스는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어쩐지 그 뒷모습이 홀가분해 보였다. 기분 탓이겠지만.
방에 홀로 남은 시에나는 조금 더 편하게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불편한 구두도 벗어 던지고선 눈을 감았다.
‘망했네.’
못된 마음을 품은 대가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려 했다. 빌붙으려 했다.
“그놈의 결혼!”
빽 소리를 지르고 나니 갑작스레 웃음이 나왔다. 제도의 유명한 인기남이 저에게 마음이 있는 줄 착각하지 않았나. 우습고 민망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최음제를 먹여 자려 한 저 자신이 한심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이것뿐일까. 예쁘게 차려입고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의 눈에 들기만을 또다시 기다려야 하는 걸까. 부친을 설득할 다른 방법은 없을까.
시에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캄캄한 밤하늘에 홀로 고고한 은빛 달이 보였다. 시에나는 그것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어정쩡하게 굴다간 지금처럼 비참해질 뿐임을 알게 되었다. 비열해질 때 비열해지더라도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여야만 했다.
어렴풋이 떠오른 생각들을 잊지 않기 위해 되풀이해 곰곰이 생각하며 시에나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블레이크는 아무 말 없이 서서 대공가의 주치의와 상급 마법사 몇이 논쟁하는 것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얼마 후엔 시종장 버나드와 요리장 커크까지 합류해서 떠들어 댔다.
“온갖 종류의 시약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약에 반응하지 않는 독도 있지 않을까요?”
“가축들에게 먹여 보았으나 아직까지 멀쩡합니다. 독은 확실히 아닌 것 같습니다.”
“마력 반응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저주나 마법도 아니오.”
“그럼 누군가 염료라도 쏟아부었나 봅니다. 아주 예쁜 분홍색 같던데.”
프로이젠 본성 앞 들판을 가로지르는 리라비아 강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는 소식에 다급히 달려온 것인데, 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강 상류에 누군가 독을 풀었다면 적침을 의심해 방비해야 했다. 저주나 마법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두 개 기사단을 추가로 소환하여 본성 인근의 영지를 샅샅이 수색하게 했으니 내일 아침이면 결론이 날 것이다.
“저…. 주군.”
그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클로드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조금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 며칠 블레이크는 잔뜩 날이 서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다. 폭발하기 직전처럼 모든 게 위태로웠다.
“괜찮으니 신경 쓸 것 없어.”
한기가 느껴질 만큼 서늘한 표정과 목소리에 클로드는 재차 권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클로드의 염려대로 블레이크는 지금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며칠 잠 좀 못 자서가 아니었다. 그를 이토록 궁지에 몰 수 있는 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엘리제 프로이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녀로 인해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신혼 초야, 신방 앞을 서성이던 이가 누군지. 루카스 클랜튼은 감히 자신을 기만하고 엘리제를 마차에 끌어들여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그를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 건 오로지 엘리제를 위해서였다. 그녀를 슬프게 하거나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리하지 않아도 블레이크는 엘리제의 마음을 제게로 돌릴 자신이 있었다.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없는 그이기에 그토록 오만했다.
블레이크는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흉포한 본성을 숨기고 다정히 대했다.
다행히 노력은 헛되지 않아, 그녀 역시 그에게 빠져드는 듯했다. 그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엘리제를 믿었다. 그녀의 말을 믿었다. 루카스에 대한 마음이 어느 정도 남아 있더라도 이젠 저를 더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점점 이상해진 건 그녀가 아닌 저 자신이었다. 처음의 자신만만함이 어느 샌가 자취 없이 사라졌다. 엘리제가 눈앞에 없을 때면 끊임없이 불안했다. 그녀가 제 품에 안겨 있어도 견딜 수 없이 초조했다. 마음이 깊어질수록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녹아 사라질 것 같았다. 물거품처럼 흩어질 것 같았다. 영영 잃어 되찾지 못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녀는 몇 번이나 쓰러졌다.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제도의 모든 의사들이 말했다.
결국 그는 엘리제를 살리기 위해 루카스를 불러들였다. 도저히 그녀를 잃을 수 없어서 그렇게까지 했다. 어떻게든 엘리제를 붙잡아 두려 스스로 독을 마셨다.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 그 외엔 그녀를 살릴 방법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예상했었다. 몹시도 괴롭고 화가 날 것임을. 질투심에 이성을 잃을 것이 염려되어 ‘루카스 클랜튼을 죽이라는 명령만큼은 절대 따르지 말라’고 가신들에게 당부해 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제 ‘그 일’이 닥쳤을 땐, 모든 게 각오했던 것 이상이었다.
루카스가 엘리제의 벗은 몸을 눈에 담는 순간, 그의 눈을 도려내고 싶었다. 그녀를 향해 뻗는 손을 잔혹하게 잘라내고 싶었다. 그가 엘리제에게 입 맞추었을 때, 블레이크는 놈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는 상상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분노가 가라앉고 나자 그다음엔 지독한 우울감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루카스는 남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놀랍도록 잘생겼다. 소녀들이 꿈에 그리는 이상형에 가까웠다. 기사로서의 재능 또한 대단하며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저와는 참으로 달랐다.
칙칙하기만 한 검푸른 머리칼에 쓸데없이 커다란 체격, 날카로운 얼굴과 어둑한 목소리. 그 무엇도 루카스보다 나은 게 없었다. 어떤 여자도 저보다는 루카스를 택할 것 같았다.
행복한 얼굴로 루카스의 품에 안길 엘리제를 상상하자 숨이 턱 막혀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클랜튼 후작이 했던 말들이 날카롭게 되살아나 가슴을 찢었다. 옛 연인을 되찾은 그녀가 저를 버리는 악몽이라도 꿀까 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두렵고 슬펐다. 블레이크는 아무것도 모르는 엘리제를 미친 듯이 안다가 그녀가 잠들고 나면 뚝뚝 눈물을 흘렸다. 엘리제를 얻어 다채롭게 빛나던 세상이 다시금 어둡게 변해 가는 것 같았다. 하나뿐인 등불을 빼앗긴 듯 발밑이 캄캄했다.
지금이라도 모든 걸 뒤집어 루카스를 치워 버리면 어떨까. 쇠약해진 엘리제가 숨을 거둘 땐 저도 같이 죽어 버리면 그만이다. 죽어서도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블레이크는 차라리 그편을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와 엘리제가 같은 곳에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착하기만 한 엘리제와 달리 더럽고 추악한 자신은 분명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가장 깊은 곳에 떨어져 영영 그녀를 볼 수도, 그녀에게 닿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안 된다. 그럴 순 없다. 그렇게 헤어질 순 없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덜덜 떨렸다.
블레이크는 피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얼음물을 끼얹은 듯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이성만이 되살아나 사고하고 판단했다.
그에겐 엘리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엘리제에겐 루카스가 필요하다. 루카스를 얻기 위해선 치워야 할 게 있다. 해결해야 할 게 있다. 그저 그뿐이다.
원하는 것들을 모두 안겨 주면, 엘리제는 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오래오래 곁에 있어 줄 것이다. 마음 약한 그녀가 어떻게 저를 버리겠는가. 배신하겠는가.
그럴 리 없다. 절대 그럴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