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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아서 잘… 하겠지?”







믿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지난번 황궁 연회와 달리 오늘 글로리아 후작가에서 열리는 연회는 대공비의 참석 여부가 분명했다. 이날 루카스와 시에나가 파트너로 함께 입장한 걸 시녀에게 전해 듣고부터 대공비가 시에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작과 달리 연회장을 기웃거렸다간 내용이 틀어져 버릴 수 있었다.







“사라는 아직 소식 없니?”



“마차로 사흘 길이랬으니, 내일 오전쯤 제도에 도착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당도하는 대로 내게 기별하라고 얘기 좀 전해 주렴.”



“네, 그럴게요!”







사라는 세계의 균열을 보수할 수 있는 유일한 조사관이다. 균열이 가속화된 원인과 해결책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의 사태를 수습하려면 그녀를 만나 상의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나저나 블레이크는 이 밤에 어딜 간 거지?”







지도를 열어 저택 내부를 살피는 엘리제의 혼잣말에 메리가 냉큼 대답했다.







“프로이젠 본성에 가셨다고 들었어요.”



“뭐? 왜 갑자기?”



“성에 남아 있던 기사단이 뭔가를 발견했대요. 클로드 님도 그렇고 굉장히 다급해 보이셨어요.”



“그래?”







엘리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균열이 가속화된 만큼 세계 곳곳에서 뭔가 안 좋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끔찍한 괴물이라도 나타난 게 아닐까.







“이대로 멸망하는 건 아니겠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3퍼센트 상승해 있는 상태창을 보니 불안했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좀비 같은 게 튀어나오면 곤란했다. 그때는 로맨스고 뭐고 끝장이 아닌가.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엘리제 님은 제가 지켜 드릴게요!”







메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비장하게 외쳤다.







“그래. 물론 난 네 주먹을 믿는단다.”







엘리제는 보기에만 앙증맞은 메리의 주먹을 힐끔 쳐다봤다. 그 거대한 용도 때려눕혔는데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운석이라도 떨어지면 강력한 힘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니지. 쟤라면 운석도 주먹으로 박살 낼 수 있…기는 무슨. 나까지 정신이 이상해지네.’







생각 없이 천진한 조사관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점점 물드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래선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당장 가 봐야겠어.”



“네? 어디를요?”



“프로이젠에.”







메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입을 턱 막으며 소리쳤다.







“설마, 대공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아주 좋아. 넌 그대로 입이나 막고 있으렴.”







엘리제는 끙끙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블레이크가 틈틈이 씻겨 주기까지 한 탓에 따로 몸을 씻을 필요는 없었다.







엘리제는 일전에 운동 좀 해보겠다고 맞춘 옷을 찾아 입었다. 장신구 형태의 호신용 마법 아이템을 모두 꺼내 꼼꼼히 착용한 후엔 채찍도 챙겼다. 혹시나 블레이크가 왜 또 위험하게 혼자 돌아다니냐고 무섭게 굴면, 어디 간단 말도 없이 가 버린 그를 찰싹찰싹 때려줄 생각이었다.







‘아주 엉덩이에 피멍이 들게 때려 줘야지.’







자기가 먼저 때려도 좋댔으니 인제 와서 안 된단 소린 못 할 것이다.







대강의 준비를 마친 엘리제가 메리를 돌아보았다. 메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선 말똥말똥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리, 멜릭에게 내가 좀 보잔다고 전해 주렴. 케이트도 불러 주고. 아… 손은 이제 떼도 돼.”



“네, 금방 다녀올게요!”







씩씩하게 대답한 메리가 방에서 뛰어나갔다.







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확실치 않은 지금,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순 없었다. 그녀를 제외하고도 엘리제에겐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







엘리제는 지도상에서 움직이는 점들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다른 탭을 확인했다.







‘대본’과 ‘작품소개’, ‘등장인물 열람’과 ‘지도’. 총 네 개의 메뉴 중 완전한 건 ‘대본’뿐이었다. ‘작품소개’와 ‘지도’의 경우 제한된 정보만 열람할 수 있고, ‘등장인물 열람’은 아예 아무 정보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구성요소가 불완전합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완료해 주세요.』







85퍼센트가량 달성한 업그레이드를 완료한다면 이제껏 확인하지 못한 정보들을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알고 있는 시스템 업그레이드 장소는 두 곳이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궁과 프로이젠 본성 인근의 환상호수. 그중 황성은 허가 없이 멋대로 돌아다닐 수 없으니 제외해야 했다. 물론 악마 놈에게 도움을 청하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영 꺼림칙해서 싫었다.







그래서 엘리제는 지금 바로 환상호수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여태껏 갈 수 있는 명분이 없어 곤란했는데 마침 블레이크가 본성에 갔다 하니 절호의 기회였다. 그에게 가겠다며 이동 마법진을 열어 달라 요청하면 멜릭은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호위 기사들이 문제인데.’







엘리제는 지도 위 점들을 쳐다보며 아랫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아까부터 꼼짝하지 않고 그녀의 침실 앞을 지키고 있는 파란색 점은 분명 앨런 루오스일 것이다. 그리고 파란색 점 두 개, 노란색 점 하나를 뒤따르고 있는 회색 점은 바트 루오스일 가능성이 컸다.







‘어찌한다.’







두 마리 토끼를 노릴 것인가, 아니면 안전을 택할 것인가. 엘리제는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고민에 빠졌다.











***











크롬벨 공작가와 글로리아 후작가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에 속했다. 오늘 밤 열린 연회는 그런 두 가문의 결합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열린 대규모 연회였다. 크롬벨 공작가의 장남이자 스스로의 전공으로 백작위를 수여받은 제국의 검, 슈만 크롬벨과 글로리아의 장녀 바네사 글로리아의 약혼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번 열릴까 말까인 글로리아 후작저의 그레이트 홀이 활짝 열렸다.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단장한 채 손님을 맞았다.







황궁 연회와 달리 분위기는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네프러스 소속 기사들이 상당수 참여했기 때문이다. 실력을 가장 중시하는 기사단인만큼 귀족이 아닌 평민도 몇 속해 있었고, 귀족 가문의 자제라 할지라도 평민과 다름없이 살아온 이들도 꽤 있었다.







홀 어디에서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기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는 축하 인사를 건넨 후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갔다. 그리하여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 연회장에 남은 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이들뿐이었다.







그래서 시에나와 루카스가 함께 연회장을 벗어날 때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처음 파트너로서 입장했을 땐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과 관심이 쏟아졌었다. 어떻게든 말을 붙여보려는 사람들로 주위가 바글바글하여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든 무표정한 얼굴로 ‘예’, ‘아니오’로만 답하는 루카스 탓에 더는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시에나에게 춤을 추자고 한다든지 마실 것을 가져다준다든지 할 일은 다 했는데,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책 읽는 것처럼 어색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에나는 그런 그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와 팔짱을 낀 채 복도를 걷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이미 저질렀고, 이제 곧 저지를 일 때문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제 아침, 시에나는 부친인 라우디아 백작이 보낸 서신을 받았다.







편지는 백작가에 청혼서를 보낸 이들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서 빨리 적당한 상대를 고르지 않으면 이 중 하나와 결혼시켜 버리겠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대부분 라우디아 백작령과 인접한 가문의 사내들로 재취 자리, 12살 연상은 기본이었다. 시에나는 소문만 들어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지는 이들이 백작에게 얼마만큼의 대가를 약속했을지 걱정됐다. 작년에 투자한 사업이 잘되지 않은 탓에 가문의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소리를 최근에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부친은 딸을 팔아 한몫 챙기려는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저 딸들보다는 후계인 아들 하나를 중히 여기고, 영주로서의 체면을 중히 여기는 평범한 귀족 사내였다.







이번 시즌 사교계에 데뷔할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시에나는 부친에게 감사해야 했다.







카밀라의 말대로 그녀는 결정해야만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제 삶이 어찌 되든 순리대로 살 것인지.







방법은 모두 전수받은 후였다. 하겠다고 확답하지 않았음에도 카밀라는 술에 탈 약과 적당한 장소까지 물색하여 시에나에게 주지시켰다. 라우디아 백작이 보내온 편지를 옆에서 훔쳐 읽었던 터라 매우 적극적이었다.







결국, 끔찍한 죄악임을 알면서도 시에나는 루카스의 술잔에 약을 탔다. 그에게 직접 잔을 건네 모두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약기운이 돌 때쯤 밖으로 나왔다.







휴게실 몇 개를 지나쳐 어느덧 복도가 끝나 가고 있었다. 밤은 깊었고 선택은 끝났다. 이미 저질렀기에,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시에나가 먼저 멈춰 서자 루카스 역시 따라 멈춰 섰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어둑함에 잠겨 서로를 잠시간 응시하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겹쳤다. 젖은 소리가 날 때까지 여러 번 짧게 입을 맞추다가 처음으로 입술을 벌려 혀를 엮었다.







점점 뒤로 밀려나던 시에나의 등이 문에 닿았다. 한쪽 팔로 시에나의 허리를 감싸며 그가 방문을 열었다. 들어와선 다시금 입을 맞추며 토독, 톡,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시에나는 자꾸만 고개를 드는 죄책감을 억지로 잠재웠다. 며칠 전, 먼저 입맞춤도 청했었고 파트너 신청까지 했으니 그 역시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 애써 합리화했다.







카밀라가 2황자 운운하긴 했어도 그는 어차피 닿을 수 없는 별과 같은 사람이었다. 제게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인 루카스 클랜튼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했다. 설레거나 마음이 가진 않아도 루카스는 좋은 사람 같았다. 평판도 좋고 책임감도 강하다고 들었으니 결혼하면 그럭저럭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시에나는 벌어진 옷깃 사이로 보이는 그의 탄탄한 가슴을 슬쩍 쳐다보았다. 잠시간 고민하다가 그 위에 손을 올렸다. 놀랄 만큼 뜨겁고 단단했다. 손이 점점 미끄러졌다. 카밀라에게 배운 대로 착실히 단계를 밟아 나가려는 목적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이 그의 중심부에 닿았을 때였다.







‘음…?’







부풀어 단단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여전히 말랑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카밀라가 장담했었다. 이 약을 먹고 1분 안에 서지 않으면 고자라고. 1분이 뭔가. 족히 5분은 지났을 것이다.







‘서, 설마…?!’







시에나는 불안감에 퍼뜩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한 기미를 눈치챈 그가 입술을 떼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여느 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몸은 뜨거울지언정 눈빛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사물을 보는 듯한 무감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