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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조금 어지러울 뿐, 몸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카를리아즈는 엘리제의 침실 테라스까지 들키지 않고 무사히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난간을 넘으려던 순간, 그는 다른 이유로 테라스에서 뚝 떨어질 뻔했다. 닫힌 문 너머로 보이는 침대 위 광경 때문이었다. 엘리제가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벗은 몸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새어 들어온 달빛에 그녀의 매끄러운 나신이 은은히 빛났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 둥그런 엉덩이가 아찔한 곡선을 그렸다.







한계까지 벌어진 다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작고 하얀 발이 시트를 밀어댔다.







그러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는지 몸을 비틀며 도망간다. 그래 봤자 소용없어 금세 잡혀서는 또다시 몸을 떨며 달뜬 신음을 흘렸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연보랏빛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야하고 아름다워, 카를리아즈는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누가 그녀를 탐하고 있는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엘리제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블레이크가 고개를 들었다. 카를리아즈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이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살짝 커졌던 그의 눈이 다시 가느스름해졌다. 엘리제의 등줄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침대 곁 협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꺼냈다.







엎드려 있는 엘리제는 보지 못했겠지만, 카를리아즈는 그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설마, 하였던 것도 잠시 그가 엘리제의 손목을 결박했다. 사실 그저 그녀의 손목과 침대 상판을 기다란 끈으로 연결해 놓았을 뿐이라 결박했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적어도 카를리아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는 안대를 채워 그녀의 시야까지 차단했다.







엘리제에게 몇 마디를 속삭인 블레이크가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곤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이라도 자릴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카를리아즈는 묵묵히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더 매섭게 떠 노려보다시피 했다.







블레이크가 조용히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엘리제와 달리 그는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셔츠 단추 하나 풀지 않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평소의 완벽한 모습 그대로였다.







“뜻밖이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이 시각에 내 아내의 침실을 찾다니.”



“할 말이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







카를리아즈는 떳떳했다. 그래서 고개까지 살짝 치켜들었다. 캄캄한 밤에 기사들 몰래 테라스 난간 좀 넘은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엘리제와 그는 모든 비밀을 공유할 만큼 특별한 사이였다.







“그런가.”







블레이크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약간의 침묵 후, 그가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침대 위 엘리제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곤란한데.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겠군.”







카를리아즈의 시선도 자연스레 엘리제를 향했다. 엉덩이를 치켜든 채 허벅지를 비비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심장이 터질 듯 요란하게 뛰어 귀가 먹먹했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새겨진 강렬한 잔상은 눈을 감았다가 떠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쩐다. 손님을 이리 세워둔 걸 알면 엘리제가 섭섭해할 텐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선 블레이크가 중얼댔다.







“아무래도 경이 들어와서 기다리는 편이 낫겠어.”







그제야 카를리아즈는 엘리제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를 쳐다봤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뭐…?”



“사양하지 말고. 어차피 정인이 될 사이인데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 미리 알아 두면 좋지 않겠나.”







아까보다 한층 짙게 웃으며, 블레이크가 테라스 문을 활짝 열었다.







“…….”







엘리제가 좋아하는 것. 카를리아즈는 그 한마디에 사로잡혀 버렸다.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자신을 받아 줄지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었다. 궁금했다. 블레이크와 함께 있을 때 엘리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지.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홀린 듯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들어가고 나자 블레이크 역시 따라 들어와선 문을 닫았다.







곧장 침대로 향하는 블레이크와 달리 카를리아즈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밀폐된 방 안에 엘리제의 체취가 가득했다. 오로지 그녀 하나뿐인 세상에 갇힌 듯했다. 흠뻑 젖어 다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들리지 않았다. 느껴지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엘리제의 손을 이끌어 침대 상판을 잡게 했다.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몸을 눈에 담는 순간, 카를리아즈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진 마냥 희었던 몸이 울긋불긋했다. 온통 타인이 남긴 흔적이었다.







“블레이크…. 어서, 어서요….”







달콤한 목소리로 재촉한다. 제게는 허락하지 않았으면서. 그러나 그러한 모습조차 그의 눈엔 사랑스러웠다.







향유를 발라 반들반들한 젖가슴이 탐스럽게 흔들렸다. 블레이크의 난폭한 입맞춤에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을 타고 흐르다 맺혀 가슴골에 툭, 떨어졌다. 그러곤 배꼽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를리아즈는 그것을 좇느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마음에 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모습을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집요하게 바라봤다.







가슴 한편이 괴롭게 조여들었으나 그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배역이라 한들, 이 세계에서만큼은 블레이크가 그녀의 남편이다. 직접 보게 된 것은 처음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여러 번 봐 왔던 터였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은 이 와중에도 잘 알았다.







질투에 사로잡혀 분을 낼 정신이 있다면 황홀하게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야 했다. 엘리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나라도 더 배우고 알아 가야 했다.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그녀의 아랫배를 가만히 쓰다듬던 블레이크가 배꼽 아래 어딘가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여기까지, 찔러 넣고 휘저어 줄까요.”



“네, 거기… 으읏…!”



“이렇게요.”



“으응, 더, 더요…!”



“조금만 힘을 빼요. 그렇게 좋습니까.”







블레이크의 속삭이는 말에 그녀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벌어진 입술에서 뜨거운 숨결과 신음이 함께 새어 나와 난잡히 뒤섞였다. 접합부의 질척이는 소리가 점점 더 요란해졌다.







“흐윽…!”







가장 좋아하는 곳을 찌르며 문질러 준 탓일까. 엘리제는 오래지 않아 절정에 올랐다. 극치의 쾌감에 휩싸여 파르르 몸을 떨었다.







고개를 젖히고 가쁜 숨을 내쉬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카를리아즈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침대 상판 바로 앞까지 다가가 멈춰 서자,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아래까지 전부 볼 수 있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가느다란 허벅지가 온통 젖어 번들거렸다.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것 같던 구멍이 버겁게 벌어져 블레이크의 것을 물고 있었다.







잠시 움직임을 멈췄던 블레이크가 다시금 몸을 움직였다. 이번엔 아까보다 짧고 강하게 푹푹 찔러 넣었다.







이미 붉은 흔적이 가득한 목덜미를 자근대며 그녀의 몸이 무너지지 않게 한 팔로 휘감아 붙들었다.







“흐읏, 응, 으응, 읏…!”







그녀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상판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엘리제, 좋습니까?”



“응, 조, 좋아, 흐응, 좋아요.”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눈을 가린 검은 안대는 젖은 지 오래였다. 달콤한 살내가 한층 더 짙어졌다.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던 카를리아즈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를 본 블레이크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으나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두고 엘리제의 얼굴을 덧그렸다. 동그란 이마에서부터 시작하여 눈썹 사이를 지나, 작지만 오뚝한 콧날 그리고 벌어진 입술까지.







떨리는 손끝에 시선도 머물렀다.







목이 마른 듯, 그녀가 혀를 내어 입술을 축였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탐스럽게 젖었다.







그녀가 움켜쥐고 있는 침대 상판을 저도 쥐고서, 그가 허리를 숙였다. 입을 맞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블레이크는 그런 그를 제지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았다.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밖에 남지 않았다. 카를리아즈는 그녀가 흘리는 단 숨을 느릿하게 들이마셨다.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니, 온몸이 덜덜 떨렸다.







‘엘리제’ 하고 소리를 내어 부르고 싶었다. 그녀를 안고 탐하는 게 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약 오늘 낮에 엘리제가 그를 받아 주었다면 이보다는 덜 괴로웠을까.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런데도 도저히 도망갈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입술을 겹쳤다.







다른 이의 것을 머금고 흔들리는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는 평소처럼 호응해 주었다. 그의 혀를 반갑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제 것을 내주었다. 더는 불가할 정도로 깊이 혀를 엮었다. 숨결이 섞이고 타액이 섞였다.







잠시 멈추어도 잠깐일 뿐이었다. 그녀의 목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빼앗아 삼켰다. 집요하게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서슴없이 음란과 배덕을 택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엘리제는 이틀을 꼬박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겨우 깨어나면 다시금 저를 쾌감의 늪에 밀어 넣는 블레이크 탓이었다.







음식조차 침대 위에서 먹었다. 멍한 정신에 그가 입에 넣어 주는 걸 받아먹다 보면 아랫입이 빠듯했다. 말릴 새도 없이 신음하며 흔들렸다. 발정기의 짐승들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않은 건, 블레이크가 어쩐지 이상해서였다. 평소처럼 다정하게 굴어도 엘리제는 속지 않았다. 그가 이러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차피 그가 계속 그녀 곁에만 있을 순 없다는 걸 알기에, 엘리제는 블레이크가 자리를 비우길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하여 셋째 날 저녁 즈음에 메리를 부를 수 있었다.







“엘리제 님! 괜찮으세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메리는 엘리제의 안부를 물었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목소리부터가 가관이었다. 목감기라도 걸린 듯 잔뜩 쉬어 낮게 잠겼다.







“루카스는 잘 준비해서 갔니?”







오늘 밤이 시에나와 루카스가 파트너로서 연회에 참석하는 날이었다. 미리 옷 벗기는 연습도 시키고 섹스하는 법도 가르쳤어야 했는데, 블레이크 때문에 다 어그러져 버렸다.







“어…. 아마도요?”



“뭔가 대답이 시원찮네?”



“그날 이후로 요원님을 한번도 못 봐서요.”



“뭐? 윽…!”







깜짝 놀라서 상체를 일으키려던 엘리제는 침대에 도로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허리와 허벅지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엘리제 님!”







깜짝 놀라 다가오는 메리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엘리제가 다시금 물었다.







“의상실에도 안 나타난 거야?”



“네.”



“그럼 너희라도 찾아갔어야지! 걔를 그냥 보내면 어떻게 해?”







메리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왜요?”







진심으로 몰라서 묻는 듯 천진하고 태평한 얼굴이었다.







“왜냐니….”







엘리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와 엘리제의 관계는 차지하더라도 중간지대 조사관과 윗세계 요원은 협력관계라 하지 않았나. 그녀가 없더라도 다른 조사관들이 당연히 그를 도와줄 줄 알았다.







“알아서 잘하시겠죠. 경력도 저희보다 훨씬 많은걸요? 딱히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은데. 오히려 주제넘게 나섰다간 방해된다고 한 소리 들을지도 몰라요.”







엘리제는 뻐끔대던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메리라면 그렇게 될 법도 했다. 쿤도 사실 그리 미덥지 않았고, 피터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새삼스레 골머리가 아팠다. 중간지대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윗세계는? 이러다 모두 사이좋게 망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