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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의 인장이 찍힌 서신이 있소. 그중 일부를 내어 주겠소. 나머지는 재판이 끝난 후 넘기도록 하지. 내 아내가 보관 중이니 그녀를 만나게 해 주시오.”
“알겠네. 그리하지.”
선뜻 대답하는 블레이크의 모습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말하지만, 대공. 엘리제가 아무리 대공을 사랑하는 척해도 믿어선 안 되오. 내 말을 명심하시오.”
딜런의 당부에 블레이크는 코웃음 쳤다.
“정략혼에 그리 많은 걸 바랄 정도로 순진하진 않네. 잘 포장하여 서로의 환심을 살 따름이지. 그녀나 나나.”
지극히 계산적인 그의 말에 딜런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블레이크를 쳐다봤다.
날이 저물어가는 시각, 작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낮은 온도의 볕에서 몇 걸음 떨어진 자리. 사랑에 눈이 먼 줄 알았던 젊은 대공의 얼굴엔 냉혹함만이 서늘히 남아 있었다.
연정 따위를 협상의 카드로 사용하였던 후작으로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다음에 만날 땐 조금 더 쓸모 있는 얘길 해줬으면 좋겠군.”
다행히 블레이크는 ‘다음’을 말했다.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였다.
“…알겠소. 대공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다.”
딜런의 대답에 고개를 한번 끄덕인 블레이크가 몸을 돌렸다. 대화를 시작할 때보다 한층 어둑해진 공간에 클랜튼 후작을 남겨둔 채 그는 홀로 감옥답지 않은 감옥을 나섰다.
네프러스 소속 기사가 문을 걸어 잠그는 걸 잠시간 지켜보던 그는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좁은 나선형 계단 끝에서 멜릭과 클로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득이 좀 있으셨습니까?”
멜릭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럭저럭. 엘리제는 지금 어디에 있지?”
“두 시간 전쯤, 의상실로 향하셨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아직 귀가하지 않으셨고요.”
블레이크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졌다. 어젯밤부터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들던 엘리제가 아침 일찍 대공저를 나서서 이 시각까지 귀가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넘겨선 안 될 문제인지도 몰랐다.
회랑을 가로지르는 블레이크의 걸음이 빨라졌다. 마차에 오를 때까지 그는 침묵했고, 멜릭과 클로드 또한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마부에게 알아서 목적지를 지시한 멜릭이 마차에 따라 올라 문을 닫았다.
멜릭은 현재 블레이크의 기분이 몹시도 좋지 못함을 금세 알아차렸다. 이유는 여럿일 터였다. 온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해가 지는 이 시각까지 아내를 보지 못한 것 때문일 수도 있고, 후작과 나눈 대화 중 그의 심기를 건드린 뭔가가 있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하루 동안 모은 정보의 양이 주군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길 빌며 멜릭은 준비한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갈색 봉투에서 종이뭉치를 꺼내 훑던 블레이크가 어느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리며 물었다.
“후작 부인이 임신 중인 건 확실한 정보인가?”
“클랜튼 후작저의 주치의에게 직접 확인한 사항이니 틀림없습니다. 산달이 얼마 안 남았더군요.”
“그렇군. 후작이 투옥돼 의지할 데가 필요할 텐데,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해. 동선 놓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블레이크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리려 할 때였다. 멜릭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저, 주군…. 오늘 클랜튼 경이 라우디아 백작 영애를 만났습니다.”
블레이크의 눈썹이 스윽 올라갔다.
“그 갈색 머리 여자를 또? 약속이라도 잡았던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만남의 성격이 데이트나 다름없더군요. 디저트 카페 직원의 말에 따르면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합니다.”
멜릭의 말에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웃고 떠들었다…라.”
“일단 라우디아 영애에게는 사람을 붙여 놨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클랜튼 경은 워낙에 기감이 뛰어나서 감시가 쉽지 않습니다.”
“그는 내버려 둬. 중요한 시기에 의심을 사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클랜튼에 청혼서를 보낸 변경백이 누군지 알아봐.”
“이런…. 클랜튼 경의 인기가 생각보다 훨씬 많군요.”
“…….”
농담 섞인 멜릭의 말에도 블레이크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머쓱해진 멜릭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주군. 비전하께는 언제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클랜튼 경이 확답을 하면. 그러려면 아무래도 후작의 처우도 확정돼야 하겠지.”
“그가 정말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거부할 수 없게 만들면 돼.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문제야.”
“그럼 무엇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서류의 마지막 장까지 확인을 마친 블레이크가 종이 뭉치를 도로 봉투에 넣었다.
“고민이 돼서.”
눈이 마주치고서야 멜릭은 그의 새파란 눈에 담긴 어둡고 불길한 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뭘 해야 엘리제가 겪은 고통과 모욕을 속 시원히 갚아 줄 수 있을지.”
그건 살의와 분노였다.
후작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 명을 스스로 재촉하였음이 분명하다. 작위를 빼앗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하긴, 그 정도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면 블레이크가 직접 나서서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다만, 놈의 뒤를 봐주는 이가 있다는 게 문제인데. 예상 밖이란 말이야.”
“후작이 그걸 털어놓던가요?”
멜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은 열었지만, 확실치 않아. 이 문제만큼은 섣불리 판단하고 움직일 수 없네. 그러니 후작 부인을 잘 살피라는 거고.”
그녀의 동선을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번에 교체된 클랜튼 저택의 사용인들 대부분이 프로이젠에서 밀어 넣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멜릭이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달리는 마차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니 마차의 속도에 맞춰 나란히 달리는 두 필의 말이 보였다.
갈색 말에는 앨런 루오스가 타고 있었고, 사람을 태우지 않은 흑마는 블레이크의 것이었다. 허가 없이 입궁할 수 없어 황성 밖에서 그들이 나오길 기다린 모양이었다.
마부석 벽을 두드려 마차를 멈추게 한 멜릭이 문을 열었다.
“루오스 경, 무슨 일입니까?”
“어서 외성 밖으로 나가보셔야겠습니다!”
앨런이 이토록 급하게 굴 일이란 대공비에 관한 것뿐이기에 블레이크와 멜릭은 물론 마부석에 타고 있던 클로드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외성 밖엔 왜?”
“비전하께서 제도 상공을 배회하던 용을 쫓아 나가셨습니다!”
“뭐?”
“…지금 용이라 했습니까?”
문답이 끝나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린 블레이크가 앨런이 끌고 온 흑마의 고삐를 낚아채 올라탔다.
“앗, 주군! 혼자 가시면 위험합니다!”
클로드의 외침에도 블레이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달렸다. 거의 전력 질주에 가까웠다.
“이런…. 큰일이군.”
멜릭의 낯빛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용을 잡기 위해선 최소한 열 명 이상의 기사가 필요하다. 그것도 검기를 능숙히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가.
“우린 주군을 따를 테니 크롬벨 경에게 지원 요청 부탁합니다.”
“알겠으니 어서 따라가 보시오.”
멜릭에게 뒷일을 당부한 클로드가 앨런이 타고 온 말에 함께 올라 블레이크를 뒤쫓았다.
“용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불안한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리며 멜릭은 도로 마차에 탔다. 늦기 전에 네프러스의 단장 슈만 크롬벨을 데리고 합류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
이마에 뿔이 두 개 달린 은빛용은 과장 없이 집채만 했다. 용은 유려한 몸을 말고 오만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반들반들한 붉은 눈이 생명체의 것 같지가 않았다. 비늘부터 시작하여 온몸이 보석인 듯한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러니까, 네가 협박해서 데려온 게 아니란 소리니?”
“네. 얘가 굳이 절 데려다준다잖아요. 엘리제 님께도 보여드릴 겸 타고 왔죠!”
‘잘했죠? 기특하죠?’라는 표정이었다. 엘리제는 기가 차 하늘을 올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걸까.
메리는 사라를 찾아 떠난 지 나흘 만에 북부 브론티아 산맥에서 그녀를 만났다고 한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조합해 마력석 광산을 찾으려 했던 사라는 실수로 용의 둥지에 발을 들였고, 수면기에 든 용을 깨워 버렸다.
화가 난 용에게 쫓기던 차에 메리가 나타나 용을 때려눕혔다.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조금 더 늦었다면, 사라는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과정에서 용은 메리에게 호승심을 느끼게 된 듯하다. 재차 겨루길 바라며 졸졸 쫓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다.
용을 타고 온 것은 메리뿐으로, 사라는 마차를 이용해 돌아오기로 했다. 애초에 메리처럼 힘이 세고 튼튼하지 않고서야 용에게 매달려 비행하긴 힘든 일이었다.
사흘이면 올 거리니 사라에 대해서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균열이 가속화되긴 했지만, 그때까진 큰 문제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놈의 용이었다.
“일단 쟤는 어서 돌려보내든가 숨기든가 해야 해.”
엘리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곧 사람들이 들이닥칠 거야. 의도가 뭐였든지 간에 위협적으로 보였을 테니까.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하려 들겠지.”
“어, 그러면 안 되는데.”
제도에서 용과 사람이 싸움을 벌이는 건 굉장한 이벤트다. 시나리오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었다. 메리가 황급히 용에게 다가갔다.
“야, 너 이제 집에 가.”
그러나 붉은 눈을 지그시 내리뜬 용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 안 듣지? 또 얻어터져 볼래?”
그 말에 움찔하는 걸 보니 겁은 나는 듯한데, 그래도 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확 던져 버린다!”
메리는 정말 저 커다란 용을 던져 버릴 기세로 성큼 다가갔다. 그때였다.
“잠깐. 누군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루카스의 말에 엘리제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가 멀어 얼굴은 보이진 않지만, 두 필의 말이 성문을 통과했다.
“블레이크로군. 그 뒤를 클로드와 앨런이 뒤따르고 있고.”
엘리제는 이마를 짚었다.
“이미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블레이크가 봤을 텐데.”
이 상태에서 용이 아무 일 없이 날아가 버리면 이상한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메리가 집어 던지는 것도 안 될 말이다. 일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젠 어쩔 수 없어요. 이 용은 ‘루카스 클랜튼’이 퇴치하는 것으로 하죠.”
“죽이라는 건가?”
“물리치는 척만 하자는 거예요. 말로 내쫓든 집어 던지든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고요. 할 수 있죠?”
그녀의 눈빛엔 그에 대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루카스는 괜스레 가슴이 뿌듯해졌다.
“당연하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루카스가 용에게로 다가갔다.
“이봐.”
그의 부름에 용의 눈동자가 루카스를 향했다.
“이만 가 줘야겠다.”
어이가 없는지 용이 이를 드러냈다. 눈이 게슴츠레해진 것으로 보아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엘리제의 부탁을 들어줘야만 해.”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루카스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용에게 접근했다.
“숫자 셋에 힘을 쓰겠다. 그때까지 남아 있으면 봐주지 않아.”
엘리제는 모르는 듯하지만 본래 이 세계의 용은 ‘루카스 클랜튼’의 힘만으론 쫓아낼 수 없는 강력한 존재였다. 요원으로서의 힘을 사용해야 한단 소리였다.
이에 대한 망설임은 없었다. 눈앞의 생명체가 무고하다 한들 엘리제의 부탁보다 우선하진 않았다. 그녀의 믿음을 저버리느니 500년간 지켜온 원칙을 깰 것이다. 그 정도로 그에겐 그녀가 중요했다.
“하나.”
루카스의 녹색 눈동자가 가장 먼저 변화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수십 수백 개의 빛이 그 안에 고여 기이하게 반짝였다.
“둘.”
재킷이 거세게 펄럭였다. 딛고 선 땅이 우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용은 머리칼이 넘어가며 드러난 카를리아즈의 반듯한 이마에서 ‘표식’을 발견했다. 한 쌍의 붉은 눈이 화들짝 놀라 커졌다.
“셋.”
곧게 뻗은 그의 손이 매끈한 턱에 닿는 순간, 용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