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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클랜튼과 에릭 러셀. 어느 쪽이든 신랑감으로선 나쁘지 않다. 에릭에 대해선 루카스보다 더 알려진 게 없지만, 노느라 바쁜 황태자 대신 황가의 일을 돌보는 성실한 황자인 것만은 확실했다.
또한, 꽤 미인이기도 했다. 터질 듯한 근육이 취향인 카밀라의 기준엔 별로였으나 객관적으론 루카스 못지않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머릿속으로 루카스와 에릭을 저울질해 보던 카밀라가 재빨리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마음만 급한 시에나를 도와 드레스를 고르고 환복을 도왔다. 성급히 방을 나서려는 시에나를 붙들어 화장을 고쳐 주고 머리칼을 느슨히 땋아 목선과 어깨가 드러나도록 했다.
“아무리 급해도 티를 내면 안 돼.”
“급하긴 누가. 고귀한 분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이러지.”
“무턱대고 방문했으면 기다림은 감내해야지. 황자 전하가 아니라 황제 폐하라 해도 마찬가지야.”
말은 그리해도 시에나의 조급함을 헤아린 듯 카밀라는 빠르게 단장을 끝내 주었다.
“고마워, 카밀라.”
“뭘 우리 사이에.”
빙긋이 웃으며 카밀라가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제 화 푸는 거다?”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치 빠른 카밀라는 그녀가 화난 걸 알고 있었다. 시에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널 어쩌겠니.”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시에나. 널 어쩌면 좋니. 순진해 빠져선.”
맥빠진 웃음을 지으며 그들은 함께 방을 나섰다. 물론 사둔 선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며 시에나는 어쩌다 자신이 2황자를 만나게 됐는지 카밀라에게 말해 주었다. 그의 세심한 도움에 카밀라는 감탄했다.
“괜찮은 사람이네. 예의도 있고.”
한밤중에 미약에 중독된 여자를 데려가 해독제를 구해 먹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훨씬 쉬운 방법이 있지 않은가. 음란한 행각을 벌인다 한들 탓할 사람도 없다.
“그렇지?”
그를 칭찬하는 말에 시에나가 활짝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걸까?”
“네가 보고 싶었나 보지.”
“에이, 설마.”
재잘재잘 떠드는 사이 그들은 1층 응접실 앞에 당도했다.
“난 안 들어간다.”
“어? 왜?”
“뭘 왜야? 잘해 봐, 요것아.”
카밀라는 손수 문을 열고 시에나를 떠밀었다.
“아….”
얼떨결에 응접실 안에 들어선 그녀의 등 뒤에서 빠르게 문이 닫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에릭이 시에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우디아 영애.”
늦은 오후의 불그스름한 햇살에 그의 은발이 온화한 빛으로 반짝였다. 새순처럼 고운 연녹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시에나는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황자님.”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고서,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예고도 없이 방문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귀한 분을 모셔 영광인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보자 하셨나요?”
“이거, 영애 것이 맞지요?”
시에나는 에릭의 손바닥 위에 놓인 귀고리를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카밀라의 말대로 혹시나 저를 보고 싶어 왔을까 기대했던 것이 민망하여,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돌려드리러 왔습니다.”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시에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전하께 번번이 폐를 끼치네요.”
“폐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녀는 에릭에게서 귀고리를 돌려받았다. 그의 손가락이 손바닥을 스치는 순간 시에나는 움칠, 몸을 떨었다. 자르르 퍼진 간지러움에 손을 꼼지락 오므렸다. 귀고리는 그의 체온을 머금어 미지근했다.
귀고리를 한 손에 모아 쥐며 시에나는 오늘 산 선물을 그에게 머뭇머뭇 내밀었다.
“저…. 이거….”
“이게 뭡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에릭이 상자를 건네받았다.
“도와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무언가 보답하고 싶었어요. 보잘것없는 선물이지만 받아 주셨으면 해요.”
잠시간 묵묵히 상자를 내려다보던 에릭이 물었다.
“열어 봐도 됩니까?”
“당연하죠.”
에릭은 시에나가 보는 앞에서 포장을 뜯었다. 안에 든 것은 나무 재질의 자그마한 음악상자였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가 도르륵 도르륵, 태엽을 감자 단조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자장가군요.”
에릭은 대번에 멜로디의 정체를 알아맞혔다.
“네. 밤에 잠을 잘 못 이루신다고 들어서.”
그녀를 데려다주는 마차 안에서, 신경 쓰지 말라며 한 말이었다. 어차피 그녀를 돕지 않았어도 멀뚱히 누워만 있었을 거라고.
“그걸 기억할 줄은 몰랐습니다.”
에릭은 손안의 음악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멜로디가 끝날 때쯤엔 다시 또 도르르, 태엽을 감았다. 가슴에 새겨진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멜로디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누구도 그를 다정히 바라봐 주지 않았던 날에 위로가 되어 준 소녀가 있었다.
골방에 갇혀 홀로 흥얼거리는 소녀의 자장가를 그는 벽 너머로 들었다. 그녀가 잠들어 노랫가락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다 그 역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선연한 노랫가락을 붙들고 눈을 감으면, 좁은 침대에 함께 웅크려 누운 듯해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없었다. 자장가를 흥얼거려 줄 사람도 없었다. 신의 선물이라 여겼던 새로운 신분과 육체로도 그는 그녀를 되찾지 못했고, 매일 밤 괴로움에 허덕였다.
가슴을 쥐어뜯어도 삭이기 힘든 고통이 이 자그마한 음악상자로 달래질 리 없다. 그래도 마음 써준 것이 고마웠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본 상냥함이었다.
“선물, 고맙습니다. 유용할 것 같군요.”
목소리가 낮게 잠겨 나왔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시에나의 얼굴에 봄볕처럼 다사로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그것이 저와는 몹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조만간 다시 만나기를.”
“네. 부디 살펴 가세요.”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그는 저택을 나섰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굳이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크고 화려한 마차가 투리스 저택의 담장을 벗어났을 때였다.
쐐액, 하고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 창밖을 내다보니 거대한 용이 제도의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환각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신전의 예언가들이라면 멸망의 징조라며 호들갑 떨 법한 일이었다.
물론 제도의 군사력으로 용 한 마리 못 잡을 리 없지만.
“이대로 끝장나 버리면 딱 좋겠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제가 듣기에도 음산했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회색빛 잿더미뿐이었다. 그래도 손에 쥔 자그마한 나무 상자만은 불씨처럼 따뜻하여 꽉 움켜쥐고선 피곤한 눈꺼풀을 닫았다.
***
황궁엔 황족이나 고위 귀족을 구금하기 위한 공간이 별도로 존재했다. 작게나마 창문이 있고 침대와 책상, 몇 권의 책과 필기구까지 있었다.
클랜튼 후작가의 가주, 딜런 클랜튼 역시 아직까진 고위 귀족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마력을 제한하는 수갑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들어와 방 내부를 한번 훑어보았을 뿐, 블레이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딜런은 안절부절못했다. 대공은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참고인이었다. 그의 증언이 판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리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대공.”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이어진 심문으로 몹시 지쳤음에도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는 아직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믿었다.
“나를 돕는 것이 대공께도 이로울 것이오.”
그래서 성급히 입을 열었다. 블레이크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지 궁금하군.”
대공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 어디에서도 감정을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딜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 그가 하려는 얘기는 도박에 가까웠다. 대공이 여태껏 보인 모습으로 추론한 ‘약점’이 전제된 베팅이었다.
“엘리제가 어째서 나를 궁지에 몰았는지 아시오? 내가 양자로 들인 루카스 때문이오. 그 애는 오래전부터 제 의붓오라비를 좋아했소. 지금도 마찬가지고.”
초조함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가 빠른 어조로 말했다.
“루카스에게 후작위를 승계하지 않으면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하겠다더군. 뜻대로 되지 않자 날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거요. 그렇게까지 한 이유를 알겠소?”
블레이크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후작.”
“루카스에게 힘이 생기면 그 애는 대공을 떠날 거요.”
“엘리제는 이미 내 아내인데 무슨 수로.”
딜런의 예상과 달리 그의 목소리엔 불쾌감이 서려 있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하단 표정이었다.
“이혼이 불가한 것도 아니지 않소. 클랜튼에서 소송을 돕는다면 어찌 될 거라 생각하오? 루카스는 엘리제를 위해 기꺼이 배상금을 지급할 것이오.”
그의 말대로 배상금을 지급할 경제적 여력이 있다면 이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프로이젠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클랜튼의 재력은 탄탄한 편이었고, 어느 정도 타격을 받을지언정 배상금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글쎄. 설마 그렇게까지.”
“대공이 몰라서 하는 소리요. 그 애들은 오랫동안 서로만을 위해 왔소. 엘리제가 대공과의 혼인을 받아들인 것도 루카스를 위해서였단 말이오. 유언장을 고친 날짜와 내용을 확인해보면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거요.”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지?”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딜런은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벌금형 정도로 재판이 마무리되게 힘 좀 써주시오. 그렇게만 해주면 내가 루카스를 치워 주겠소.”
“무슨 수로?”
“변경백이 보내온 청혼서가 있소. 데릴사위로 보내면 다시는 엘리제를 만날 일이 없을 거요. 성실한 아이니까 혼인 후엔 아내에게 최선을 다할 테지.”
“클랜튼 경이 순순히 따를까?”
“폐하의 주선이면 녀석도 따라야만 하지 않겠소?”
블레이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폐하라니. 설마 황제 폐하를 이름인가?”
“그렇소.”
“병상에 누워 계신 폐하께서 어떻게 후작을 돕지?”
“방법이 있으니 하는 말이오. 애초에 내가 어떻게 연회장에 들어왔겠소?”
본래 황궁 안에선 이동 마법이 불가했다. 이를 일시적으로 해제하려면 황제의 허가가 필수였다. 블레이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공. 엘리제를 믿지 마시오. 지금 그 애가 보이는 모습은 모두 가짜요. 환심을 사서 원하는 걸 얻으려는 것뿐이지. 목적을 이루고 나면 대공을 돌아보지 않을 거요.”
팔짱을 낀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블레이크가 문득 그에게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무엇이오?”
“엘리제는 후작의 하나뿐인 딸이지.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경계하지? 보아하니 클랜튼 경을 아껴서 그랬던 것도 아닌 듯한데.”
“그건….”
그가 머뭇거리며 답하지 않자 블레이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작고한 전 후작 부인에 대한 비밀을 그녀가 알고 있어서인가?”
딜런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슨 말을.”
“뭘 그렇게 놀라나. 증거와 증인의 진술을 확보하긴 했으나 발고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게.”
블레이크의 말에도 그의 얼굴은 창백해진 채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폐하께서 후작을 확실히 도울 거라는 증거를 건네받고 싶은데. 그래야 나도 마음 놓고 후작을 돕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