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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들떠 보이는 게, 왠지 쓸데없는 희망을 품은 듯 보였지만 엘리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때가 되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시에나야말로 그의 첫정, 첫 경험이 될 테니까. 손으로 쥐고 흔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쾌감의 정도는 말할 것도 없다. 여자 주인공인 시에나의 몸은 이 세계 최고의 난봉꾼인 황태자조차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로 대단하단 설정이었다.







남자 주인공, 루카스 클랜튼도 시에나와 보낸 하룻밤을 잊지 못해 그녀를 택하지 않았나. 카를리아즈 또한 자연스레 그리 될 것이다. 엘리제가 겪어 온 ‘호감’이란 대부분 그랬다. 참으로 쉽게 옮겨 가곤 했다. 단 한 사람의 것만 제외하고.







“그럼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시에나가 입을 드레스와 속옷이 확정되면 제대로 리허설해 봐요.”



“그래. 그렇게 하지.”







고개를 끄덕인 그가 산뜻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만, 아랫도리 사정은 그리 산뜻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였다. 난감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는 속옷과 바지를 올려 제 것을 아무렇게나 욱여넣었다.







그러는 동안 엘리제는 슈미즈를 벗어 몸에 튄 정액을 대충 닦아 냈다. 어차피 씻지 않고서는 깨끗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뒤처리를 끝낸 그들은 옷차림을 정돈한 후 피팅룸 밖으로 나왔다. 어째 조용하다 했더니, 한창 시에나의 드레스 도안에 매달려 있어야 할 쿤과 피터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루카스가 말했다.







“조사관들을 찾는 거라면 밖에 있는 것 같군.”







그의 가리키는 방향을 좇아 유리 너머를 바라보니 쿤과 피터뿐 아니라 재봉사들 모두 밖에 서 있었다.







“저기서 뭐 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였다. 그녀의 약지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엘리제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밖에서 보이지 않게 문을 등지고서 반지를 두드리자 패널 디스플레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균열이 가속화됩니다.』







빨간빛이 번뜩였다. 어쩌면 예상하였던 대로 경고 창이 화면 한가운데 떠 있었다. 작품소개 탭을 찾아 들어가자 가장 밑, 변동된 내용이 보였다.







『시나리오 완성률: 15퍼센트 / 세계의 균열: 6퍼센트』







엘리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균열이 가속화됐다더니 단번에 3퍼센트나 늘었다. 무슨 현상인지 알 수 없어 속이 답답했다. 시나리오에서 어긋난 부분은 거의 없을 텐데 대체 왜 이 지경이란 말인가.







“엘리제.”







루카스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밖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엘리제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심상치 않다뇨? 무슨….”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가 가까이에 와 있다.”







엘리제는 일단 디스플레이를 종료하고 그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모두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녀 또한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저게 뭐야….”







거대한 무언가가 제도 블럼데일의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무언가 사람 같은 게 그 위에서 손을 흔드는 것 같아, 엘리제는 눈을 비볐다.







“메리가 타고 있군.”



“뭐요?”



“용 위에서 메리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루카스가 덧붙이는 말에 엘리제는 젖혔던 고개를 바로 했다. 용과 메리. 저것은 균열의 이유인가, 결과인가. 세계가 이대로 멸망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널 부르는 것 같은데. 뛰어내릴 기세다.”



“난 저런 애 몰라요.”







중얼거리듯 답하며 그녀는 몸을 돌렸다. 닷새 만에 돌아온 메리가 이 순간만큼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











루카스와 헤어져 저택에 돌아온 시에나가 옷을 갈아입으려던 참이었다.







“시에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카밀라가 뛰어 들어왔다. 환복을 돕던 하녀를 눈짓으로 내보낸 그녀가 시에나에게 달라붙었다. 등에 지어진 매듭을 끌러 주며 질문을 쏟아 냈다.







“클랜튼 경이랑 데이트한 거야? 세상에! 어떻게 만났어? 약속 있단 소리 안 했잖아!”







루카스가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걸 목격한 듯했다. 아니면 사용인 중 누군가가 말해 주었거나.







“우연히 마주친 거야. 데이트라기보다는 피차 도울 일이 좀 있었어.”







시에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시에나가 루카스에게 준 도움이라곤 케이크를 함께 먹어준 것뿐이었고, 그 역시 그녀와 함께 다녀준 것 외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물을 고르러 다니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시에나는 루카스에게 도움받는 걸 포기했다. 소년들이나 좋아할 법한 비단공, 커다란 돋보기, 호미 등등. 그가 관심을 기울인 물품 목록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단추나 타이 등을 보는 눈도 형편없었다.







[경, 솔직하게 말해 줄래요? 지금 입고 있는 옷 누가 골라 줬어요?]







그녀의 기습적인 질문에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혹시 비전하께서…?]







농담 삼아 물어본 거였는데 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슬그머니 몸을 돌려 물건을 뒤적이는 뒷모습이 어색하고 우스웠다. 뭐랄까, 겉보기와는 참 다른 사람이었다.







“의뭉스럽게 굴지 말고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카밀라가 연신 그녀를 닦달했다.







사실 시에나는 카밀라가 연회 날 벌인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한 상태였다. 얄미워서 얼굴도 보기 싫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 있었던 일들은 그녀로서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남녀관계에 무지한 그녀이기에 솔직히 말하고 조언을 구해야만 했다.







“만난 건 우연이 맞는데, 헤어지기 전에 파트너 신청을 받았어.”



“뭐? 진짜?”



“응. 글로리아 후작가에서 열리는 연회에 함께 가재.”







카밀라는 방방 뛰었다.







“굉장해! ‘그’ 클랜튼 경의 파트너라니! 온 제도의 영애들이 널 부러워할 거야!”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파트너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잖아.”







실제로 주변을 보면 매번 파트너를 바꿔 가며 연회에 참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니 겨우 한번 동행하는 것으로 이토록 호들갑 떨 건 없었다.







“얘가 뭘 모르네! 이제껏 클랜튼 경은 단 한 번도! 연회에 파트너를 데려간 적 없다고!”



“어…. 정말?”



“그렇다니까?”







카밀라가 갑자기 목소리를 잔뜩 낮춰 말했다.







“그래서 클랜튼 경을 두고 이상한 소문이 많았어. 특히 엘리제 님과의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지.”



“비전하와는 남매지간이시잖아.”



“그래봤자 의붓남매잖아. 혈연관계가 아닌걸.”



“앗, 그래? 그것까진 몰랐어.”







카밀라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넌 제도 귀족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구나. 최소한 결혼 적령기 남자들에 대한 정보는 꿰차고 있어야지.”







그녀는 엘리제와 루카스에 관한 소문들을 아는 대로 얘기해 주었다.







“물론 헛소문일 가능성도 커. 하지만 그날 봤다시피 두 분 사이가 각별해 보이긴 하더라.”



“맞아. 클랜튼 경도 비전하를 많이 아끼고 좋아하는 것 같았어. 비전하도 마찬가지고.”







결혼 후에도 옷을 손수 골라 줄 정도면 보통 친한 게 아니리라.







“그런 집구석에서 학대받으며 자랐으니 각별할 법도 해. 힘들 때 서로뿐이었을 테니까.”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남매에 얽힌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손가락질하고 싶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은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철벽같던 클랜튼 경이 파트너 신청까지 한 걸 보면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음…. 그런가?”







아니라고 손사래 칠 줄 알았더니 시에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어어? 뭔가 수상한데? 혹시 고백이라도 받은 거야? 교제하재?”



“그건 아니고.”



“그럼? 잤어?”







시에나는 입을 턱 벌리고 카밀라의 등을 찰싹 때렸다.







“어휴, 정말!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원래 교제 전엔 속궁합부터 보는 거야!”







카밀라의 개방적 연애관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에나가 말했다.







“그냥 입맞춤만 했어.”



“어떤 입맞춤? 어디에 했는데? 혹시 온몸에?”



“이상한 상상 좀 하지 말아 줄래? 입술에 쪽, 했을 뿐이거든?”







시에나의 말에 카밀라는 대번 심드렁해졌다.







“애냐? 뽀뽀가 뭐야, 다 큰 어른이. 최소한 혀는 넣어야지.”



“왜? 난 그 정도가 좋던데.”







좋은 사람 같긴 했지만, 가슴이 설레거나 하진 않았다. 더 깊은 관계를 원했다면 조금 꺼려졌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고작 뽀뽀’임에도 그녀에게 정중히 허락까지 구했고, 선택의 여지를 주었다.







[괜찮다면 내게 입맞춤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이유를 묻자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답을 들려주었다.







[영애께서 받아들이면, 우리는 딱 그만큼 가까워질 겁니다. 그래도 될지 허락을 구하는 겁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제 그와 그녀는 뽀뽀할 정도로 가까워진 것이다. 대체 그게 어느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 건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다음엔 그냥 자빠뜨려.”







카밀라의 말에 시에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대단한 기사님을 무슨 수로 자빠뜨리니?”



“얘가 뭘 모르네. 무력만 힘이 아니야. 내가 방법을 찾아 줄게.”



“…또 이상한 짓 벌이려고?”



“아니거든? 그리고 얘, 생각해 보렴.”







카밀라가 시에나의 손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히고서 저도 마주 앉았다.







“딱 한 번 저지르고서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게 낫지 않아? 대안이 있다면 또 모를까. 어물거리다 아무한테나 팔려 가고 싶어?”



“그건….”



“클랜튼 후작이 구금된 건 알고 있지? 작위를 유지 못 할 가능성이 크대. 그러면 후작위는 클랜튼 경이 승계할 거야. 네가 후작 부인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후작 부인이라니. 그런 고위 귀족 가문의 안주인 자리는 꿈도 꿔본 적이 없었다.







“잘생겼지, 능력 출중하지, 난잡하지도 않지. 그런 신랑감 어디서 또 만나니?”



“좋은 사람 같긴 해.”







루카스를 떠올리면 확실히 마음이 따뜻해지긴 했다.







“내겐 과분하지.”



“네가 뭐 어때서? 게다가 경이 먼저 네게 파트너 신청을 한 거잖아. 아무튼, 이 언니만 믿어. 꼭 후작 부인이 되게 해 줄게.”



“아니, 카밀라….”







시에나가 난감함에 그녀에게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택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건 집사의 목소리였다.







“손님? 누구?”



“2황자께서 라우디아 영애를 뵙기 원하십니다.”







카밀라는 입을 턱 벌렸다.







“시에나 너, 정말 인기 많구나?”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시에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서랍장을 뒤져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다.







“카밀라, 나 어때? 아무래도 드레스는 갈아입어야겠지?”







시에나는 허겁지겁 머리를 매만지며 드레스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미적지근하던 방금까지의 모습과 영 딴판이었다. 카밀라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뭐야. 클랜튼 경이 아니라 2황자 쪽인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