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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가 잠에서 깼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화사한 금발이었다. 확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며 눈을 비비자 카인과는 다른 이목구비가 차차 선명해졌다.







“…언제 왔어요?”



“방금.”







소파 옆 바닥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루카스였다. 상체를 일으키자 암녹색 재킷이 무릎으로 툭 떨어졌다. 엘리제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당신이 덮어 준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누군가를 이토록 세심히 챙길 줄 알게 되었다니. 삭막함 그 자체였던 처음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눈부신 발전이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재킷을 받아들며 그가 물었다.







“엘리제, 무슨 일 있었나?”



“응? 왜요?”



“자는 내내 울던데.”







엘리제는 와락 미간을 구기며 눈가와 뺨을 더듬었다. 물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보니 그의 손에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옆에 앉아 내내 눈물을 닦아 준 모양이다.







“안 좋은 꿈을 좀 꿔서 그래요.”







그녀의 말에 그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안 좋은 꿈?”



“아껴 먹으려고 남겨 둔 내 아이스크림을 누가 홀랑 먹어 치운 거 있죠.”







루카스가 입을 턱 벌렸다. 기가 막힌다는 듯 눈까지 치켜떴다. 그래 봤자 순한 눈매 탓에 별로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누군진 모르지만 아주 못됐군.”



“그러니까요.”



“그걸 가만두었나?”







그의 쓸데없이 심각한 반응에 엘리제는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저를 대신해 화를 내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때려 줬죠.”



“잘했다. 네 솜 주먹에 맞아 봤자 별로 아프지도 않겠지만.”







엘리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고, 덕분에 드물게 정수리가 살짝 보였다.







아침만 해도 멋을 부려 완벽했던 앞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이마를 가렸다. 엘리제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살짝 넘겨 주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감촉이 부들부들했다.







“데이트는 잘했어요?”







아직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나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배우의 개인적인 일을 배역에 끌어들였다간 그날의 촬영이 엉망이 돼 버린다. 더불어 평판이 바닥에 처박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제는 생전에도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럭저럭. 대사나 지문은 빼놓지 않고 완수했다.”



“그럼 됐죠. 수고 많았어요.”







별거 아닌 칭찬에 그의 녹안이 생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엘리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선물은 잘 골라 줬고요?”



“그녀가 그런 부탁을 할 거란 걸 넌 알고 있었나?”



“아니요. 저도 피터가 얘기해 줘서 알았어요. 어젯밤 2황자에게 뭔가 도움을 받은 모양이더라고요.”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꽤 고심해서 선물을 고르더군. 추천해 달라기에 몇 가지 추천해 줬는데 결국엔 혼자 알아서 샀다.”







평범할 리 없는 루카스의 선물 추천 목록에 떨떠름했을 시에나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뭘 사던가요?”



“태엽을 돌리면 멜로디가 나오는 자그마한 장난감 같은 걸 사더군.”



“아…. 음악상자를 골랐군요.”







제게서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그가 아쉬운 눈초리로 힐긋 쳐다보았다. 엘리제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했다.







“잘 샀네. 좋아할 것 같은데.”







의미가 있는 특별한 선물이니만큼 그걸 볼 때마다 2황자는 시에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저기, 엘리제.”



“파트너 신청은 어떻게 됐어요?”







거의 동시에 말을 내뱉은 탓에 둘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엘리제가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자 머뭇거리던 그가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받아들였다.”



“고민하는 기색이 있던가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하긴, 그에게 그런 눈치가 있을 리 없다.







“안 되겠어요. 빨리 진도를 나가야지.”







며칠 후 글로리아 후작가에서 열리는 연회가 결전의 날이었다. 그날 일을 잘 치르느냐 망치느냐에 따라 시나리오 성공 여부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부터 특훈이에요.”







그녀의 결연한 말에 루카스도 덩달아 결연해졌다.







“알겠다. 그럼 뭐부터 하면 되지?”



“섹스 연습이요.”







그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섹스…연습.”



“그래요. 시에나와 그날 섹스해야 되잖아요. 자신 있어요?”



“…아니. 하지만 그걸, 대체 어떻게 연습하지?”







아마도 그의 머릿속엔 ‘보물찾기’ 도중 보았던 난잡한 정사밖에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시에나와의 섹스는 그것과는 달리 정석대로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내가 도와줘야죠.”



“네가…?”







낯빛 하나 바뀌는 일 없이 무표정하던 얼굴이 어쩐지 화륵, 붉어졌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소파에서 일어난 엘리제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드레스를 벗었다.







“문제는 시에나 역시 처음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그녀에게 리드를 바랄 수 없다는 소리예요. 당신이 확실히 배워 리드하기로 해요.”







따라 일어난 그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옷 벗기는 연습은 시에나의 드레스 수선이 끝나면 그때 하도록 해요. 속옷도 우리 쪽에서 선물할 거니까 그걸로 하면 되고요. 안 보고도 벗길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해야 해요.”







엘리제는 슈미즈와 속옷은 남긴 채로 드레스만 벗어 의자에 걸쳐 두었다.







“자, 봐요. 일단 드레스를 벗기고 나면 지금처럼 슈미즈와 속옷만 남죠. 당신은 어떡할 거예요? 아예 다 벗고 시작할 거예요, 아니면 하면서 벗을 거예요?”



“모르겠다. 나는…. 어떡해야 할지.”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충격이 생각보다 큰 듯했다.







“알겠어요. 그럼 셔츠 좀 벗어 볼래요?”







엘리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베스트를 벗어 재킷 위에 올려놓은 후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녀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그의 상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남자 주인공답게 꽤 근사한 몸매였다. 늘씬한 상체를 뒤덮은 밀도 높은 근육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잠깐 만져 볼게요.”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엘리제는 그의 가슴과 복부의 근육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부분적으로 가려 보기도 하고 뒤로 돌아가 등 근육을 살펴보기도 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는 사정없이 움찔댔다.







“좋네요. 완벽한데.”







근육이 과한 걸 싫어하는 아가씨라 할지라도 이 정도면 좋아할 법했다. 게다가 설정이 그러한지, 살결이 곱고 흰 편이었다.







“처음부터 다 보여 주는 것보다는 아슬아슬 노출하는 편이 좋겠어요. 우선 단추 세 개만 풀도록 하죠.”







엘리제의 말에 루카스는 도로 셔츠를 입고 아래서부터 단추를 몇 개 채웠다. 벗을 때와 달리 아주 재빨랐다.







“이 정도면 되나?”



“네. 딱 좋아요.”







만족스러운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 상태에서 시작하면 돼요. 방에 들어가기 전에 셔츠 단추 한 개 정도는 미리 풀어 두고, 안에 들어가며 베스트와 재킷을 한 번에 벗어 던져요. 그 후, 셔츠 단추를 마저 풀면서 시에나에게 밀착하는 거예요.”







웃음을 한껏 머금은 그녀를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문엔 둘 다 취해서 일을 치른다고 돼 있지만, 술은 적당히 몇 모금만 마셔요. 너무 많이 마셨다가는 제대로 못 할 수도 있으니까. 당신, 주량이 얼마나 돼요?”



“취할 만큼 마셔 보지 않았다.”



“그럼 그건 저택에 돌아가서 테스트해 보도록 하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루카스에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발끝이 닿을 정도로 밀착하자 그가 숨을 흡, 들이마셨다.







“자, 이 상태까지 왔다고 치죠. 이제 어떡할 거예요?”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엘리제가 물었다.







“옷을… 다 벗겨야 하나?”



“그래도 되긴 하지만, 옷 벗기는 데 집중하다 보면 자칫 분위기가 깨질 수 있어요. 상황을 봐서 결정하도록 해요. 슈미즈를 남길 땐, 어깨끈만 끌어 내려서 속옷을 벗기면 돼요. 한번 해볼래요?”







그는 잔뜩 긴장한 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까스로 어깨끈을 하나 끌어 내리자 가슴을 가린 속옷이 반쯤 모습을 드러냈다.







“가슴 사이에 리본이 있죠? 그걸 잡아당겨 풀면 돼요. 시에나 것도 앞쪽에 리본이 있는 형태로 맞출 생각이에요.”







벌써부터 발딱 일어나 복부를 쿡쿡 찌르는 그의 것이 느껴져, 엘리제는 내심 흐뭇했다. 한창때의 남자답게 매우 건강하단 증거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리본을 풀었다. 옥죄던 천이 느슨해지자 눌려 있던 그녀의 가슴이 봉긋한 모양새를 회복했다.







“칼?”







그녀가 내뱉은 애칭에 그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응?”



“숨 좀 쉬어요. 왜 이렇게 긴장했담? 내 몸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의 대답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녀의 말이 조금쯤 도움이 되었는지 숨을 한 번 길게 내쉬더니 똑바로 응시해 왔다.







“엘리제. 입 맞춰도 되나?”



“좋은 생각이에요. 입은 어느 때든 쉬지 않는 편이….”







말을 끝마칠 새도 없이 그가 입술을 겹쳤다.







놀란 것도 잠시, 입을 벌려 받아들이자 단번에 입 안까지 침입해 들었다. 집어삼킬 듯 입술을 빨아들이며 혀를 옭아매 비볐다. 정신없이 휘저어지며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턱을 타고 흘렀다.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야하며 농도 짙은 키스였다.







다소 조급하게 느껴졌으나 나쁘진 않았다. 본래 어느 정도의 미숙함은 남아 있는 편이 좋은 법이다. 너무 능숙해도 수상하지 않은가.







그의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슴을 감쌌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부드럽게 밀어 올려 애무하다가 곤두선 정점을 짓눌러 뭉갰다. 찌릿한 쾌감이 등줄기를 관통했다.







“흐응, 응….”







엘리제는 루카스의 목에 팔을 감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안정적으로 받쳤다. 점차 기울어지던 몸이 소파에 안착했다. 집요하게 엘리제의 입술을 탐하며 루카스가 그녀 위에 올라탔다.







며칠 전의 행위를 이어서 하는 모양새였다. 다른 것은, 이번엔 중도에 멈추지 않을 거란 점이었다.







입술이 떨어진 사이 엘리제가 헐떡이며 말했다.







“아래쪽은, 양 사이드에 리본이 있어요.”







그녀의 지시대로 루카스가 손을 미끄러뜨렸다. 무릎까지 내려갔다가 허벅지 안쪽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래를 감싼 자그마한 속옷에 손에 닿자 그가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봐도 될까?”



“그렇게 해요.”







엘리제는 그를 위해 배꼽까지 슈미즈를 걷어 주었다.







몇 번 스치듯 봤던 그녀의 몸이지만 이토록 자세히 관찰하는 건 처음이었다. 근육이라곤 조금도 있을 것 같지 않은 뽀얗고 가느다란 다리. 그 사이에 자리한 삼각지를 눈에 담는 순간, 루카스는 온 정신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진즉부터 뻐근했던 아래가 아플 지경인 건 물론이거니와 눈을 깜빡인다든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쉽게 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숨 쉬는 것도 어색하고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