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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어차피 당신이 지금 내게 이러는 건 카인에게서 빼앗은 기억 때문이잖아. 안 그래?”
허를 찌르는 그녀의 말에 렉스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 나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는 거, 나 역시 알고 있어.”
“뭐? 정말?”
그는 많이 놀란 듯 보였다. 그녀를 담은 금빛 눈동자가 와르르 흔들렸다.
“당연하지.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엘리제는 태연히 거짓을 말했다. 어젯밤 깨닫게 된 하나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악마는 그녀가 던진 말에 재깍 반응했다.
“대체 언제부터 눈치챈 건데? 왜 모른 척했어? ”
“카인의 기억을 가진 너라면 잘 알 텐데?”
엘리제는 굽혔던 허리를 곧게 펴고 그를 내려다봤다.
“내가 왜 그랬는지.”
렉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동안 엘리제는 조용히 감정을 삭였다.
‘정말이구나. 정말로 그런 거였어.’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카인은 정말 그녀를 사랑했던 거였다.
한편으론 화가 났고 한편으론 우스웠다. 고작 여자 하나에 정신이 팔려 대체 무슨 짓거리인가. 똑똑한 줄 알았던 녀석이 최악의 머저리였다.
엘리제와 카인은 청소년 시절부터 극단의 창고에서 먹고 자며 잡일꾼으로, 엑스트라로, 단역으로 갖은 고생을 다 했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데뷔했고 더럽고 치사한 일들을 겪어 가며 힘겹게 이름을 알렸다.
엘리제는 몇 년 이르긴 했지만, 카인의 경우 주연 자리 하나 꿰차는 데 무려 십오 년이 걸렸다. <타락한 연인>의 루카스 클랜튼이 바로 그가 처음으로 맡게 된 남자 주인공이었다. 엘리제와 나란히 설 만큼 탑배우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랬는데 어떻게 그 모든 걸 한순간에 진창에 처박았나. 좋은 시절 한번 누려 보지 못하고 저 스스로 끝내 버렸나.
만약 지금 제 앞에 있는 악마 놈이 아니었다면 엘리제는 분을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아끼고, 조금 고지식하지만 그 곧은 방식을 존중해 온 만큼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만약 그가 정신을 팔았던 여자가 저 자신이 아니었다면 찾아가 머리채라도 잡았을 것이다. 여우 같은 년이 애 인생 망쳤다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속에서는 천불이 나도 엘리제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고, 렉스는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뭐. 자신이 네 취향의 남자가 아니라는 건 놈이 더 잘 알았던 모양이니까.”
그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엘리제는 렉스가 만들어낸 핑곗거리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에겐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 카인의 기억 때문에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 하지만 내기가 끝나면 그에게 다시 돌려줄 테지. 그러고 나면 좋은 감정은 하나도 남지 않을 텐데 지금 한 약속을 어떻게 믿지?”
엘리제의 질문에 그는 우물쭈물했다.
“아니, 뭐….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엘리제는 미간을 좁힌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악마 놈이 언젠가 카인에게 기억을 돌려줄지, 돌려주지 않을지도 그녀에겐 꽤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놈을 두들겨 패 봤자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은근슬쩍 유도한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몇 마디 내뱉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엘리제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가 제 속내를 눈치채선 안 된다.
그녀는 홱 몸을 돌렸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난 당신이 하는 말을 믿기 힘들어. 당신도 잘 생각해 보길 바라. 녀석의 기억을 계속 갖고 있는 게 과연 도움이 될지. 아무리 봐도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을 마치고 걸어 나가는 엘리제를 그가 다급히 쫓아왔다. 이번엔 그녀가 한 말 때문인지 붙잡진 못하고 뒤만 졸래졸래 쫓았다.
“가? 가는 거야?”
울먹임에 가까운 목소리에도 엘리제는 돌아보지 않았다.
“또 보러 올 거지? 마법은 틀렸지만 다른 걸 가르쳐 줄게. 응?”
“뭘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지하세계에 대해 궁금한 건 없어? 사진이나 영상 자료도 있어.”
그런 것에 딱히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여지는 남겨 두는 편이 나았다. 아예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여 질 나쁜 짓을 벌이면 곤란했다.
“…알았으니까 당신도 생각이 좀 정리되면 연락해. 계속 지금처럼 막무가내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래. 네가 한 말에 대해선 나도 고민해 볼게.”
그제야 엘리제는 속도를 늦춰 그와 나란히 걸어 주었다. 그러는 것만으로도 렉스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헤벌쭉 웃는 모습이 얄미워 엘리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마부는 엘리제의 요청대로 그녀를 중심가에 데려다주었다. 그녀를 에스코트해 내려준 그렉이 물었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귀가하실 때까지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그럴 것 없네. 혼자 갈 테니.”
“하지만….”
엘리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경의 주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닌 내게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네. 어차피 황태자의 거짓 명을 따르는 그대에게 명예 같은 건 별 의미 없는 소리 아닌가.”
담담하나 뼈가 실린 말에 그렉은 멈칫하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에겐 엘리제의 동의 없이 그녀를 호위할 명분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의 인사에 엘리제는 고개만 한번 까닥여 보이곤 몸을 돌렸다. 동행 없이 홀로 걷는 그녀를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이들이 많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대공가로 돌아가 엘리제 프로이젠을 연기할 수 없었다. 답답한 속을 풀고 마음을 가라앉힐 곳이 필요했다. 자연스레 그녀가 향한 곳은 사라의 의상실이었다.
‘데이트가 한창이겠네.’
엘리제는 건물 2층의 디저트 카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아마 저기 어딘가에서 시에나와 루카스가 한창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딱히 중간지대 아이템이 없어도 루카스는 그녀가 있는 장소에 알아서 찾아오곤 했으니, 따로 소식을 보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의상실 앞을 지키고 있던 바트 루오스가 그녀를 보고 후다닥 뛰어왔다.
“비전하! 어째서 혼자 오십니까?”
“황실의 마차가 너무 눈에 띄어 이 앞에서 돌려보냈네.”
“아…. 그렇군요.”
그와 함께 걸음을 옮기며 엘리제가 물었다.
“별일 없었나?”
“네. 명하신 대로 라우디아 영애를 제외한 손님들은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수고했네.”
의상실 앞에 다다라 그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경, 혹시 내게 할 말 없나?”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엘리제가 물었다.
“…네?”
“있을 것 같아서.”
엘리제는 굳어 있는 바트를 잠시간 바라보다 그의 손 위에 손을 겹쳐 올렸다. 움찔하는 그를 모른 척하며 문을 당겨 열었다.
“결심이 서면 언제든 말하게. 들어줄 테니.”
그러고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인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제3의 빙의자들은 이전의 기억과 새로운 몸의 기억을 모두 갖는다. 본래의 루카스 클랜튼이 에릭 러셀의 몸을 차지하며 마법과 검술을 모두 수준급으로 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걸려들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어쨌든 종종 수상한 모습을 보였던 바트 루오스다. 남은 후보가 바트와 블레이크 둘뿐인 상황에서 한 명으로 확정 지을 단서는 ‘기억’뿐이었다.
말을 던져 놓았으니 유심히 지켜보면 될 것이다. 바트가 두 개의 기억을 가졌다면 분명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테니.
“엘리제 님! 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들어선 그녀를 피터와 쿤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에게 다가간 엘리제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시에나가 왔다 갔다면서요?”
“네. 드레스 수선을 의뢰하셨습니다. 그 후엔 클랜튼 경과 만나 2층 카페로 향하셨고요.”
“잘됐네요.”
“그런데 살짝 염려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피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성분께 무엇을 선물하면 좋겠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러며 떠올린 상대가 2황자였습니다.”
엘리제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새 접점이 있었던 걸까요?”
“어젯밤 그분께 뭔가 도움을 받은 것 같더군요.”
그러고 보니 아까 악마 놈이 시에나를 꼬시려다 두고 나왔다는 소릴 했다. 황태자에게 연회장의 상황을 전한 사람이 2황자라면 그가 시에나를 도왔을 것이다.
왠지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제는 새삼 2황자 에릭 러셀의 외관을 떠올려 보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은발에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흔치 않은 미인이었다.
원작과 비교할 때 사람이 조금 삐뚤어지긴 했지만,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다. 게다가 그가 차지한 새로운 몸, 2황자 에릭 러셀은 황태자를 몰아내고 황제가 될 예정이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루카스가 좀 밀리는데.’
저번에 납치당했을 때의 입맞춤을 생각하면 그런 쪽으로도 루카스보다 나을 것 같았다. 안에 든 것이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니 오죽하겠는가.
‘안 되겠네. 빨리 진도 빼야지.’
다행히 시에나와 루카스는 다음 만남에서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때 확실히 연인 관계로 발전하면 될 것이다.
“피팅룸에 있을 테니 클랜튼 경이 오면 들여보내 줘요.”
“네, 알겠습니다.”
엘리제는 이제 그녀의 휴식처나 다름없게 된 제일 안쪽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자마자 대본을 열어 꼼꼼히 확인했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의 시나리오긴 하지만 포르노가 아니기에 삽입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 그래도 대공 부부의 초야보다는 장면이 길고 더 야했다.
‘주인공들의 첫 섹스니까.’
엘리제는 패널 디스플레이를 종료하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려 냈다. 마침 시에나가 그날 입을 드레스는 그들 손에 있다. 어떻게 벗길지 미리 연습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입을 슈미즈와 속옷도 선물하는 편이 좋겠어.’
서툰 루카스가 산통을 깨지 않도록 벗기기 쉬운 걸 골라야 한다.
‘향유는 준비하는 편이 좋겠지? 피임은 안 해도 되나?’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점점 피로해졌다. 어제오늘 받은 정신적 충격에 수면 부족이 더해져 그녀는 이미 한계였다.
그려 내던 시나리오 속 장면과 꿈이 혼몽한 중에 뒤섞였다.
꿈속에서 서로를 탐하며 얽혀든 이들은 루카스와 시에나가 아닌 카인과 엘리제였다. 생전에 여러 번 상상하였던 대로 그들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침대 아래로 옷을 벗어 던졌다.
[안 봐줄 거야.]
[누가 할 소릴.]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눈빛엔 애정이 서려 있었다. 애틋하게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눴다. 그의 금발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헝클어뜨리기 딱 좋았다. 오랜만에 보는 단정한 얼굴이 반가웠다.
미운데도 지나치게 반가워 화가 났다.
[뭐야, 울어?]
[울긴 누가.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약한 모습, 우는 모습을 녀석에겐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생전엔 그토록 뻔뻔하게 저 자신을 포장했건만 꿈에서는 도통 되질 않았다.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끝없이 흘렀다.
[이 멍청이. 형편없는 자식.]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펑펑 우는 그녀를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뭣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
그러게. 왜 이렇게 화가 날까.
[네까짓 게 뭐라고.]
[알았으니까 그만 좀 울어. 해도 해도 너무 못생겨지네.]
말은 그리 밉살맞게 하면서도 그는 그녀를 안아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런 그의 손길이, 다정함이 너무도 익숙했다.
그래서 더욱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