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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럼 속 얘기도 많이 나누세요?”



“그렇습니다.”







만난 후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가 생기를 머금고 반짝였다. 그 극명한 반응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럼 비전하에 관한 얘기를 조금만 들려주실 수 있나요?”







시에나와의 대화에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를 들었던 터라 루카스는 냉큼 답했다.







“물론입니다.”







엘리제에 대한 건 꽤 자신 있는 화제였다.







“어떤 게 궁금합니까?”



“생신은 언제세요? 좋아하는 색깔은요? 보석은 뭘 가장 좋아하세요? 디저트는 뭘 가장….”







시에나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루카스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가 침묵한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시에나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방금 하신 질문의 답을 꼭 알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어색함 속에 루카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친하시다면서요. 그럼 아는 게 뭐예요?”



“그녀는 상냥합니다. 제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시에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매간에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니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매우 똑똑합니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없습니다.”







루카스는 제가 알고 있는 엘리제의 모든 장점을 줄줄 읊었다. 생각보다 많아서 한참이 걸렸다. 그 모든 걸 시에나는 열심히 경청했다.







‘대단한 분이구나.’







듣다 보면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가족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진짜라더니 그녀가 딱 그랬다.







“비전하는 단점이 없는 분이군요.”



“그렇진 않습니다. 매우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앗,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말했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기만 해도 뒤로 넘어가질 않나, 몇 분 걷지 않아도 다리가 움직이질 않습니다. 육체 상태가 형편없습니다.”



“아…. 그, 그렇군요.”



“단련이 필요한 상태라 말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의 모습에 시에나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뚝뚝해 보이기만 했는데 확실히 그는 겉보기와 다른 사람이었다.







“많이 좋아하고 아끼시나 봐요.”







훈훈한 마음에 미소 지으며 말하자 그가 멈칫하여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말씀하시는 것만 봐도 알겠어요. 그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그렇…습니까?”







루카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소중하게 여긴다, 좋아한다, 아낀다. 그중 어떤 것도 그에겐 생소한 단어였다.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나, 가져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제 앞에 놓인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블레이크에게도 아마 그리 보였을 것이다. 어젯밤, 그런 당혹스러운 제안을 한 걸 보면.







[경이 프로이젠으로 오면, 엘리제의 정부가 되는 것을 허락하겠네. 경이 가장 원하는 건 그것일 테지.]







치유의 힘을 곁에서 직접 지켜본 게 어떤 영향을 미친 걸까. 혹은 그가 그녀에게 한 행동들 탓일까.







독점욕이 끔찍할 정도로 강한 블레이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더욱더 당혹스러운 건 저 자신이었다. 당연히 딱 잘라 거절했어야 했는데 한참을 머뭇대다 도망쳐 버렸다.







500년의 임무 수행 중 그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던 자신의 진짜 이름을 엘리제에게 밝힌 것도 그랬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나 후회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루카스는 그녀가 제 이름을 알아주길 바랐고 불러 주길 바랐다.







그녀가 애칭처럼 ‘칼’이라 불러 주는 순간 차오른 감정이 무엇인지는 명백했다. 그건 환희였다. 악마 놈이 블레이크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는 걸 지켜볼 때보다도 더 기뻤다.







‘그런가. 내가 그녀를 많이 좋아하는 건가.’







인지하고 나자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임무에 집중해야 하는 지금 곁길로 새어 버린 감정에 불안해해야 함이 마땅하건만, 마냥 설렜다.







시에나와 데이트를 마치고 나서 엘리제를 만나기로 한 것에 생각이 미치자 더욱 그랬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세차게 뛰었다.







“경, 케이크 더 드실 건가요?”



“아니요. 충분히 먹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갈까요?”



“그러지요.”







루카스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선물을 골라 주고 키스신을 수행한 후 엘리제에게 갈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











“눈 감고 힘 빼.”



“이렇게…?”



“응. 그대로 있어. 곧 끝나니까.”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엘리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깐의 시간이 몹시도 길게 느껴졌다. 몸 안에 스며든 뜨거운 기운이 곳곳을 헤집었다.







“됐어. 눈 떠도 돼.”







손목을 죄던 힘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엘리제는 번쩍 눈을 뜨고 손목을 확인했다.







“뭐야 이게! 왜 아직도 새까매?”







엘리제는 빽 소리를 질렀다.







연회 기간이 끝난 후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던 렉스는 바로 마차를 보내왔다. 정확히는 황후궁에서 보내온 초대장과 마차였으나 기다리는 이가 누구인지 엘리제가 모를 리 없었다.







전부터 마법을 배워 보고 싶었기에 엘리제는 기꺼이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내심 기대했다. 드디어 마법 천재로의 첫걸음을 내딛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달리 현실은 냉혹했다.







“마나 감응도가 제로네. 이래서야 마법을 배워 봤자 소용없어. 마력이 모이질 않으니까.”







렉스가 준비해 둔 손목밴드는 착용자의 마나 감응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마법 아이템이었다. 검은색부터 시작하여 회색, 파란색, 보라색, 빨간색의 다섯 단계였다.







엘리제는 적어도 파란색 이상을 기대했다. 그러나 밴드는 여전히 까만색이었다. 렉스의 말대로 마나 감응도가 아예 없다는 소리였다.







엘리제는 밴드를 신경질적으로 빼서 그에게 넘겼다.







“이거 혹시 고장 난 거 아냐?”



“흐음, 그러게. 어떻게 아무 반응도 없지? 평범한 사람도 어지간해선 회색으로 변하는데.”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그는 엘리제에게서 받은 밴드를 손목에 끼웠다. 그 순간 검은색 밴드는 새빨갛게 변했다. 엘리제는 그 광경을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기, 그 마나 감응도라는 게 없으면…. 검에서 광선 나오게 하는 것도 혹시 안 되는 거야?”



“아아, 검기 말이지?”







렉스는 팔짱을 끼고 그녀를 쳐다봤다.







“여기서 몇 년이나 있게? 내가 볼 때 그 몸뚱이로 검기를 일으키려면 이십 년은 걸릴 것 같은데.”



“…….”







하늘을 자유롭게 날며 광선검을 휘두르는 멋진 모습이 저 멀리 사라졌다. 재능이 조금도 없다는 클랜튼 후작의 말이 증명된 셈이었다.







억울했다. <타락한 연인>의 엘리제 클랜튼은 그렇다 치더라도 중간지대 조사관으로서의 특수능력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원래도 예뻤던 얼굴이 지금도 예쁠 뿐, 도통 특별한 뭔가가 없었다.







“이론이라도 배울래?”



“아니.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날지도 못하는데 마법이 무슨 소용인가. 엘리제는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렉스가 엘리제 옆으로 옮겨 앉으며 그녀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쌌다.







“너무 실망하지 마. 마법이 필요한 일엔 내 도움을 받으면 되지. 네가 원하면 언제든 도와줄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야살스러웠다.







“됐으니까 수작 좀 그만 부려.”







엘리제는 더운 숨결이 가까워지기 전에 손으로 쭈욱 그의 얼굴을 밀었다. 그러곤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벌써 가려고?”







렉스가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얘기 좀 하고 가. 어제 연회장에서 추락했다며. 어디 다치진 않았어?”



“왜 다정한 척이야. 소름 돋게.”



“소름이라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그는 가증스럽게 우는 척을 했다.







“걱정돼서 먹잇감이고 뭐고 달려갔더니 넌 벌써 가고 없고!”



“먹잇감? 뭐 순진한 아가씨 하나 넘어뜨리려고 했나 보지?”







엘리제는 비아냥거리는 척하며 힐끗 그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시에나?”







주황빛이 감도는 그의 금색 눈동자가 움찔하며 흔들렸다.







“아니, 뭐.”



“그러게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담? 시에나한테나 가봐. 당신에겐 걔가 가장 중요할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나한텐 네가 가장 중요해!”



“왜?”



“왜냐니….”



“혹시 날 꼬셔야 카인과의 내기에서 이기는 거야?”







엘리제의 말에 렉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또 그놈 얘기야?”



“혹시 알아? 사실대로 말하면 내가 널 도와줄지. 걔 영혼이 네 것이 되어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며. 말했잖아. 네 편이 되는 대가로 그놈 영혼을 원한다고.”







엘리제는 대답 없이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오늘 새벽, 블레이크의 잠든 얼굴을 보며 엘리제는 생각했다. 악마가 제안하고 카인이 받아들였을 내기의 조건이 무엇일지.







만약 카인이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여 악마의 손을 잡은 거라면, 저를 두고 내기를 벌였을 가능성이 컸다. 이제까지 악마가 보인 행동들을 생각해도 그랬다. 어떻게든 그녀를 유혹하려 애쓰지 않았나.







카인은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기억을 빼앗기며 그는 많은 것을 잃었을 것이다. 쌓인 시간이 사라지는 순간 커다랬던 순정도 목표를 상실하여 방황할 터. 참으로 무모한 선택이었다.







“말해봐, 렉스.”







엘리제는 그를 마주 본 채 허리를 숙였다.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의 거리에서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에게 내가 중요한 이유가 뭐야?”







사르르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이 은밀한 장막을 만들었다. 그녀의 연보랏빛 눈을 홀린 듯 바라보며 렉스가 신음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널 원해. 참기 힘들 정도로.”







그가 카인에게서 빼앗은 것은 엘리제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었다. 분명 평생의 기억을 빼앗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건 오로지 그녀 하나였다. 바라고 욕망하는 것 또한 그녀 하나뿐이었다.







엘리제와 얽힌 일에선 유독 초조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저도 모르게 여유를 잃고 허둥대다 실수를 연발했다.







하기야 카인 리베르토에게서 가져온 기억이라는 게 웬만한 거던가.







피어오른 절망이 어찌나 깊고 어둑하였던지 현실 세계를 떠돌던 무수한 악마들의 이목을 끌었다. 나라를 잃은 왕의 비통함과도 같았고 전쟁통에 홀로 살아남은 고아의 통곡과도 같았다.







여자는 그토록 한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그랬기에 계약은 손쉽고도 어려웠다.







엘리제의 인생이 결국엔 살해당해 끝날 걸 몰랐다면 불가했을지도 모른다. 중간지대와 윗세계의 움직임이 수상하여 주시하다 알아낸 정보 덕에 가까스로 계약이 성사됐다.







그대로 살았다면 윗세계의 부름을 받았을지도 모를 카인 리베르토는 스스로 살인자가 되었다. 세 개의 목숨을 제 손으로 끊어내 지하 가장 깊은 곳까지 추락했다. 생명이 빛처럼 흐르던 육체를 잃고, 지나온 삶의 증거와 다름없는 기억을 잃었다.







뜯어 먹히고 썰려 나가, 남은 건 고작 비루한 감정. 그나마도 온전치 않아 말라비틀어진 흔적뿐일 텐데 다시 또 그녀에게 들러붙는 걸 보면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나를 택하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네게 안겨 주지. 약속할게, 엘리제.”







그렇기에 렉스 또한 그놈의 기억에 휘말려 이토록 호구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