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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하지 말아요.”
네가 뭘 아냐며 손이라도 탁, 쳐내고 싶었지만 괜한 화풀이란 걸 알기에 치밀어 오르는 걸 삭였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여 쩔쩔맨다고 함부로 상처 줘도 되는 건 아니다. 이기적일지언정 엘리제는 그 정도로 최악인 사람은 아니었다.
“블레이크, 저 자요.”
그래서 감정을 억누른 채 말했다. 잘 거니 말도 시키지 말고 건드리지도 말라는 의미였다.
“그렇군요. 벌써 자는 거군요.”
그의 중얼거림에도 엘리제는 꿋꿋하게 꼼짝하지 않았다.
“부인이 좋아하는 청포도 크림치즈 타르트를 가져왔는데.”
엘리제는 한쪽 눈만 살짝 떴다. 어쩐지 달콤한 냄새가 솔솔 난다 했더니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가 쟁반 위에 있었다. 크림치즈에 빼곡하게 박힌 연녹색 청포도가 포동포동했다.
“한 입만 먹고 자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면 분명 잠도 더 잘 올 겁니다.”
그가 달래듯 말했다.
“…….”
직접 음식을 가져온 그의 성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제는 할 수 없이 고개를 조금 들고 입을 아, 벌렸다.
작게 자른 타르트 조각이 입 속에 쏙 들어왔다. 엘리제가 오물오물 씹어 꿀꺽 삼키자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홍합찜도 있습니다.”
홍합찜이라니, 도저히 사양할 수 없는 음식이 아닌가. 엘리제는 홍합살도 날름 받아먹었다.
“스튜가 속을 달래 줄 겁니다.”
그의 말대로 뜨끈한 스튜를 한 모금 마시자 속이 편해졌다.
계속해서 그렇게 음식을 받아먹다 보니 포만감이 들며 점점 나른해졌다. 예민하게 날 선 감정들이 조금씩 무뎌져 뭉툭해졌다.
“이젠 정말로 자는 중이에요.”
배가 불러 더는 들어갈 데도 없었다. 엘리제의 중얼거림에 그가 낮게 웃었다.
“그런 것 같군요.”
뺨에 와닿는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의 촉감. 아까와 달리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그녀를 그가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침대로 데려가 살며시 눕혀 주었다. 화장은 그대로에 씻지도 않고 야식 후 바로 잠드는 건 굉장한 짓이다. 가짜 몸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만행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져 주고 이불을 덮어 가만가만 다독이는 그의 손길은 몹시도 애틋했다.
“사랑합니다, 엘리제.”
잠에 빠져들려는 순간 그가 속삭였다.
“좋은 꿈 꾸십시오.”
그런 연후에도 그는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 떠나지 않고 곁에 머물렀다.
***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의 겨울은 그리 춥지 않았다. 해가 쨍할 날은 민소매 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날, 종일 흐리더니 찬바람이 쌩하니 불었다.
연말 할리데이 시즌이라 사방이 축제 분위기였다. 엘리제는 어느 호텔 뒷골목에 웅크리고 앉아 주변의 소음을 흘려들었다.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양부가 휘두른 깨진 술병에 스친 것 같더라니, 아랫배가 축축했다. 오한에 이가 부딪히며 딱딱,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경쾌한 음악과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지독한 부조화였다.
이러다 죽으면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엘리제는 생각했다. 그리 착하게 살아온 건 아니지만, 신이 있다면 불쌍해서라도 저를 지옥에 처박을 것 같진 않았다. 그만큼이나 웃을 일 없는 인생이었고 그늘진 나날이었다.
그래도 엘리제는 아직 살고 싶었다. 고작 열네 살에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둑한 곳에서 쓸쓸히 죽는 건 싫었다.
‘누군가 지금 날 구해 준다면, 이제부터라도 신을 믿을 텐데.’
어렴풋이 그리 생각했을 때였다.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제는 흐린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에 찬란한 금발이 아른거렸다.
[괜찮아? 어디 아파?]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눈이 부셔, 천사가 데리러 온 줄 알았다.
그것이 카인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그녀를 업어 두 블록 떨어진 병원에 데려갔고, 상처를 소독하고 꿰매는 동안 곁을 지켜 주었다.
문제는 그 역시 겨우 열네 살이라는 데 있었다. 그는 엘리제의 보호자가 될 수 없었다. 병원에선 기절한 척하고 있는 엘리제의 보호자를 찾기 위해 경찰에 연락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서 잠시 떨어진 사이 엘리제는 굴러 떨어지다시피 하여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그를 잡아끌어 도망 나왔다. 처음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그도 어느 순간부턴 사정을 눈치채 필사적으로 함께 달렸다.
2004년 12월 28일. 그날의 카인은 엘리제의 공범이었고 구원자였다.
***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시에나는 고민을 거듭했다.
어젯밤 그녀는 2황자의 도움을 받았다. 옷차림을 정돈할 수 있게 시녀를 불러 주고 해독제도 구해 주었다. 황가의 마차로 저택에 직접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그 정도의 도움을 받았으니 뭐라도 보답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연회에서 마주치길 기다려야 하나?’
이왕 외출한 김에 선물을 사기로 마음먹었으나 뭘 사서 어떻게 전달할지가 문제였다.
오래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드레스들이 든 상자를 먼저 꺼낸 후 그녀 역시 마부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저택에서부터 동행한 하녀가 상자를 들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젠 골목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널찍한 길에 들어서자 며칠 새 더욱 근사해진 건물이 보였다.
‘옆 건물에 레스토랑이 생긴 모양이네.’
오찬 직후 나왔음에도 입 안에 침이 고일 만큼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의상실 근처에 다다른 그녀는 문 앞까지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입구에서 벌어진 실랑이 때문이었다.
“아니, 테더 후작가 몰라요? 후작 가문의 차녀인 내가 출입하지 못하면 대체 누굴 손님으로 받는다는 거죠?”
“송구합니다, 영애. 오늘은 부득이하게 사전에 예약하신 분만 출입하실 수 있습니다.”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답게 우아하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저를 가로막은 사내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는 본래 신분이 기사나 용병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체격이 건장했다.
“좋아요. 그럼 오늘이라도 예약하고 갈게요. 언제 다시 방문하면 되죠?”
“글쎄요. 한 달 후쯤…?”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의 언행은 퉁명스러웠다.
“뭐라고요?”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시에나는 멈칫했다. 그녀 역시 따로 예약을 잡아 놓지 않았다.
‘너무 대책 없이 나왔나?’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싶어 머뭇거릴 때였다.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발견했다.
“아! 혹시 라우디아 백작 영애십니까?”
“네. 그렇긴 한데….”
시에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봐요!”
앞에 선 테더 가문의 영애가 빽 소리를 지르든 말든 그는 문을 열고 시에나와 그녀의 하녀를 의상실 안에 들여보내 줬다. 소란도 잠시,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나자 다시금 사방이 고요해졌다.
“어서 오십시오.”
사라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상담실장인 피터 갤로그 남작이 입구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에 그녀 역시 마주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피터 실장님. 오늘도 드레스 수선을 의뢰하러 왔어요.”
“그러시군요. 잘 오셨습니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지요.”
피터를 따라 들어가며 시에나는 힐끗 유리 너머를 쳐다봤다. 테더 가의 영애 말고도 다른 아가씨 몇이 들어오지 못해 실랑이 중이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몹시 운이 좋았던 듯했다.
시에나는 이번에도 긴 시간 상담을 했다. 의상실 입장에선 드레스를 새로 맞추는 게 훨씬 이득일 텐데도 피터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며 수선해 입는 것을 추천했다.
디자인을 어떻게 보완할지 논의하는 건 몹시 재밌었다.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그리도 잘 아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덕분에 시에나는 오늘도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아, 실장님. 남자들은 어떤 선물을 좋아하는지 혹시 아시나요?”
그녀의 말에 피터의 눈썹이 스윽 들렸다.
“글쎄요. 지위와 나이, 기호에 따라 모두 다르니 어려운 얘기입니다만….”
“하긴, 그렇죠?”
“제 생각엔 비슷한 연령대의 남성분께 도움을 받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아….”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피터 님.”
“별말씀을요. 그럼 드레스가 완성되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 시에나는 하녀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어떻게든 잘 달래 보냈는지 영애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찬란한 금발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뜻밖에도 낯이 익은 인물이었다.
“클랜튼 경?”
어젯밤 연회에서 그녀에게 첫 춤을 청했던 남자, 루카스 클랜튼이었다. 검은색 셔츠에 암녹색 정장을 걸친 그는 오늘도 몹시 근사했다.
“라우디아 영애.”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쪼르르 다가간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디저트 카페 2인 무제한 이용권을 선물 받았는데 혼자 들어갈 수 없어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디저트 카페 무제한 이용권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다 있단 말인가. 시에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네에? 저요?”
데이트 신청이라고 하기엔 표정에 설렘이 드러나지 않았다.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쪽인 듯했다.
“으음…. 좋아요. 그럼 저도 경에게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뭔지도 묻지 않고 루카스는 대뜸 수락부터 했다.
“…뭔지 안 물어보세요?”
“무엇입니까?”
그제야 되묻는다.
“선물 고르는 걸 도와주시면 돼요.”
“선물….”
“네. 고마운 분께 자그마한 선물을 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몰라서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도 귀족의 표본처럼 완벽한 그라면 분명 좋은 선물을 골라 줄 것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시에나는 루카스와 함께 디저트 카페로 향했다.
무제한 이용권이라더니, 정말로 원하는 건 뭐든 골라 먹을 수 있었다.
케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시에나는 한동안 루카스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기다란 막대 과자를 입에 물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 뵙게 되면 여쭤 본다는 게…. 대공비께선 좀 어떠신가요?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경도 많이 놀라셨죠?”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놀랐습니다.”
그의 딱딱한 대답에 시에나는 어색하게 아하하, 웃었다. 뭐라도 물어보라는 듯 그가 빤히 쳐다보고 있어, 대화를 이어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다행히 그들에겐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
“비전하와는 친하신가요?”
“친하다…?”
루카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네. 얼마나 가깝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서요.”
고개를 갸웃대던 그가 이윽고 자랑하듯 답했다.
“우리는 몹시 가까운 사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