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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인 건가. 내가… 제대로 해내질 못해서.”







루카스가 내뱉은 자책의 말에 엘리제는 태연히 답했다.







“당신은 잘했어요.”







균열이 시작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그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괜히 긴장하여 연기를 망치면 큰일이지 않나.







“뭔가 우리가 놓친 게 있을 수도 있고, 황태자 탓에 일이 틀어졌을 수도 있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으니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어차피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그래.”



“어쨌든 균열이 시작되었으니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놀라지 말고 잘 대처해요.”



“알겠다. 너도 조심하도록 해. 되도록 혼자 다니지 말고, 오늘처럼 위험한 짓은 하지 마.”







엘리제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요원님의 잔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농담하는 게 아니다.”



“알아요. 조심할 테니 염려하지 말아요.”







루카스가 걱정하는 건 유능한 조력자의 부재일 터였다. 죽지만 않으면 치유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처럼 적당히 몸을 사리면 문제 될 건 없다.







엘리제는 그 후로도 황태자와 카밀라의 관계, 은밀히 열리는 수상한 파티 등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녀는 움직임에 제한이 많지만, 루카스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니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데이트 준비는 잘 돼 가요?”



“사전 조사는 끝냈는데, 무슨 얘길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시에나가 묻는 것에 최대한 성실히, 구체적으로 대답하도록 노력해 봐요. 그녀가 말할 땐 잘 들어주고요. 누구나 자기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니까.”



“알겠다. 명심하지.”







솔직하며 순수한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답답한 속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엘리제는 꾸밈없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늘 못한 춤 연습은 다음에 해요.”







그녀의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가 눈을 내리떴다. 기다란 속눈썹이 그의 녹안 위에 드리워져 그늘을 만들었다.







“엘리제, 아까… 내가 널 곤란하게 했다. 사과하마.”







엘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자리에서 네 팔을 잡아끄는 게 아니었는데.”







그가 그리 생각할 줄은 몰랐다. 사전에 약속했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할 줄 알았다. 그녀가 보아온 루카스라면 그러는 것이 마땅했다.







“알면서도 그런 거예요? 왜?”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책망하려는 의미가 아닌 정말로 의아해서 한 질문이었다.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화가 났고, 나도 모르게 고집을 부렸다.”







엘리제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심리가 이해될 듯 이해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하든 우리의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게 나의 최우선 목표예요. 모두 당신을 위해서인 거, 잘 알고 있죠?”







물론 첫째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 안락한 사후 생활을 위해선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그에게 받아낼 아주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은가.







“나를 위해서….”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전부터 넌 나를 위해서 몸을 던지길 주저하지 않았지. 후작가에서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는데도.”



“당연한 일이죠. 우리 요원님이 얼마나 소중한데.”







VIP 고객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엘리제는 방긋 웃었다. 그래야 일이 조금 허술하게 끝나도 순순히 값을 치르지 않겠는가. 균열도 시작된 마당에 이 정도 말치레는 당연히 필요하다.







‘당신은 날 배신하면 안 돼.’







악마 놈을 밟을 수 있는 건 루카스뿐이다. 내기가 어찌 되든 카인의 영혼을 그녀 앞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도 루카스뿐이다. 엘리제는 그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블레이크가 당신을 불러냈죠. 둘이 무슨 얘길 했어요?”







그녀의 질문에 그의 입매가 움찔했다.







“혹시 저택에서 나가래요? 아니면 날 만나지 말라든가….”



“아니.”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요?”



“…….”







그의 침묵에 엘리제는 어리둥절해졌다. 무신경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 말이나 툭툭 내뱉던 이가 비밀이라도 생긴 듯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얘기다.”







엘리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알겠어요. 나와 상관있는 거면 나중에라도 꼭 말해줘야 해요. 그래야 대처를 하니까.”



“…그래.”







불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채 서 있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거리감이 느껴졌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대체 무슨 얘길 했기에?’







왠지 꺼림칙했으나 몰아붙인다고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블레이크가 방에 돌아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그린 듯 웃어 보이며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훌륭한 요원님.”







줄곧 바닥 어딘가를 향했던 그의 눈동자가 비로소 그녀를 향했다. 어둑한 밤에 유독 아름답게 일렁이는 녹안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대답 없는 그에게서 손을 거두고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그가 제게서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카를리아즈.”



“…네?”



“그게 내 진짜 이름이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가상 세계에 깃든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작중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었다.







천사와 악마는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은 사람들은 모두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는 각자가 가진 능력의 근원이자 정체성이었다. 이를 온전히 드러내는 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엘리제의 경우엔 새 이름을 부여받기 전에 파견되었기에 예외였지만 그녀 외의 중간지대 인물들은 모두 작중 이름을 사용했다.







이름을 드러내어 사용할 때의 장점이 없진 않았다. 예를 들자면 황태자의 몸에 깃든 악마가 그러했다. 꽤 긴 편일 이름 중 일부를 따와 ‘렉스’라 명명하는 순간 악마는 자신의 권능을 폭넓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정체를 들킬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을 이익이 크다고 판단하여 작중 이름, ‘베일롯’을 버린 것이다.







중간지대에서 설명을 들었기에 엘리제는 누구에게도 진짜 이름을 묻지 않았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작중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고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루카스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힌 건 매우 뜻밖임과 동시에 위험한 일이었다. 당장에 악마에게 달려가 그의 이름을 대가로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을 만큼.







“너는 알았으면 해서.”



“음…. 그래요. 기억하고 있을게요. 그러니까….”







특별한 힘이 담겼을 이름을 그대로 내뱉으려니 조금 부담스러워, 엘리제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짧게 줄여 불렀다.







“칼…?”







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기쁨에 가까운 감정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 변화가 너무 급작스러웠던 탓일까. 치유의 힘을 발할 때처럼 환한 빛무리가 그를 둘러싸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래. 그거면 돼.”







엘리제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가 성큼 다가섰다. 훅 끼쳐 오는 체향과 함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갈게. 잘 자, 엘리제.”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한순간에 그녀 앞에서 사라졌다. 그대로 굳은 채 서 있던 엘리제가 손을 들어 이마를 매만졌다.







‘뭐야, 뽀뽀했어? 진짜?’







현실감이 없었다. 만약 정말이라면 놀랍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작업성 언행이라니. 여자의 마음을 흔들기에 매우 적절하지 않은가. 웬만해선 심드렁할 뿐인 그녀조차 방금은 조금 설렜다.







이름을 말해준 데 이어 다정한 입맞춤까지. 고개를 기울이고서 뺨을 톡톡 두드리던 엘리제는 오래지 않아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한 행동의 의미가 뭐든 간에 당장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모든 계획이 엉클어져 마지막 순간 그의 호감과 이름을 이용할지언정 지금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에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루카스를 불러 말을 전했을 뿐, 머릿속은 카인과 블레이크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테라스 문을 닫아 등지고서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블레이크가 아직 식당 근처에 있는 걸 확인하곤 설렁줄을 당겼다.







“비전하, 부르셨나요?”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는지 케이트가 금세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본성에서 가져온 포도주들 있지? 그중 아무거나 한 병 가져다주게.”







그녀가 내린 뜻밖의 명에 케이트는 잠깐 멈칫하였다가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늘 그렇듯 케이트는 그녀의 명을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했다.







덕분에 블레이크가 몇 종류의 음식을 손수 쟁반에 받쳐서 돌아왔을 때, 엘리제는 벌써 포도주를 두 잔이나 비운 상태였다.







엘리제는 그가 방에 들어오든 말든 병을 기울여 글라스를 채웠다. 그러곤 여지없이 단번에 비웠다.







지금은 맨정신으로 그를 마주해선 안 된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피해 버릴 테고, 그러면 그는 그녀를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블레이크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필 그가 한 행동이 카인 리베르토를 생각나게 했고, 가슴을 술렁이게 했을 뿐이다.







블레이크가 카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건 차지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를 단순히 작중 인물로만 대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연기를 하다 보면 상대를 향한 말과 행동이 진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될 때가 간혹 있지만, 엘리제는 그때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이다. 미친 것 같은 그의 애정 또한 이용하기 편한 조건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엘리제?”







풀풀 풍겨 오는 술 냄새에 그는 놀란 듯했다.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선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 와중에도 엘리제는 부지런히 잔을 채웠다. 아직 알딸딸함이 부족했다. 좀 더 정신이 해이해지고 눈이 풀려야 했다. 그의 잘난 껍데기만 보며 헤벌쭉 웃을 수 있어야 했다.







“왜 이렇게 술을….”







그가 뒷말을 흐렸다. 짐작할 만한 이유가 한두 가지겠는가. 오늘 그녀에게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이 나이에 사교계 데뷔를 한 것부터 시작하여 황태자의 집적거림, 창피한 연회장에서의 기절, 친부의 공격과 추락. 무엇하나 사소하게 넘길 수 있는 게 없었다.







핑곗거리가 있다는 게 엘리제에겐 몹시 다행인 일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엘리제는 따라 놓은 잔을 비웠다. 주량이 상당한 그녀지만 워낙에 급하게 마신 탓에 그녀의 뺨은 이미 벌겠다.







엘리제는 그가 뭐라 하기 전에 탁자에 엎드려 버렸다. 덕분에 블레이크를 보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했다.







‘뭣 같아.’







어떻게든 남 탓으로만 돌리고 싶은데 화살이 제게 콕콕 박혀와 신경질이 났다. 동료요 라이벌이라 여겼던, 그래서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카인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다. 마주했던 시간 동안 그를 제대로 보려 노력한 적이나 있었나. 좋을 대로 생각해 버린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를 궁지에 몬 게 아닌가. 악마의 손이라도 잡고 싶을 만큼.







‘아니야. 내 탓일 리 없어.’







짜증이 치밀어 주먹을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블레이크의 커다란 손이 뒤통수에 닿았다. 쓰다듬는 손길이 더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다 잘될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