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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러셀은 황궁에서 황태자가 유일하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무슨 일이냐, 이 시각에.”



“연회장에서 일이 생겼습니다.”







렉스는 어쩔 수 없이 시에나를 놔주고 방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혔다.







“대충 네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지.”



“대공비가 크게 다칠 뻔한 일이라 형님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뭐? 어쩌다가?”



“클랜튼 후작에게 공격당해 2층에서 추락했습니다.”







입을 턱 벌린 황태자가 에릭을 지나쳐 황급히 뛰어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에릭이 느긋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렇게 뛰어가 봤자 대공비는 볼 수 없다. 이미 대공과 함께 마차에 오른 걸 확인했으니. 흐릿한 조소가 입가에 머물다 사라졌다.







에릭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문도 닫고 가지 않아, 방 안 전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소파 위에 뒤엉켜 있는 남녀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근처에 멍하니 선 여자는 낯이 익었다.







오늘 루카스 클랜튼과 첫 춤을 춘 백작가의 영애였다. 시에나 라우디아라 했던가. 에릭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음란하게 놀아나려 황태자 궁을 찾은 줄 알았더니 그녀는 덜덜 떨고 있었다. 초점을 잃어 멍한 눈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에릭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복도로 끌어냈다. 문을 닫아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를 차단했다. 괜한 간섭일 수도 있으나, 그냥 보아 넘기기엔 뭔가 불편했다.







흐읍, 흐읍, 하고 불안정하게 숨을 들이마시던 그녀가 기침을 토해냈다.







“영애, 괜찮습니까?”







숨넘어갈 듯 기침을 해대는 모습에 그는 손을 올려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기침을 멈추고 몸을 바로 세웠다. 진갈색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흐릿했던 눈동자가 조금은 또렷해졌다. 그러나 한번 몸에 침투한 미약 성분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단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되도록 해독제를 복용하여 약 기운을 말끔히 씻어 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거기까지 자신이 신경 써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시에나는 제 앞에 선 남자가 누군지 알아보았고 황급히 예를 취했다.







“2황자 전하.”



“인사는 됐으니 옷부터.”







안에 받쳐 입은 슈미즈가 드러날 정도로 그녀의 드레스는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이를 확인한 시에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허둥대며 드레스를 끌어 올렸다.







몸을 비스듬히 돌린 채 그는 그녀가 하는 양을 힐긋 쳐다봤다. 흐트러진 옷차림을 바로 하려 등을 더듬댔으나 리본의 끝자락도 잡지 못했다. 저래서야 온밤이 지나도 불가할 것이다.







잠시간 망설이던 에릭이 입을 열었다.







“안 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 역시 이 밤에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여기서 더 지체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이대로 버리고 가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데리고 나오질 말았어야 했다.







“어, 어딜….”



“그런 차림으로 귀가할 순 없지 않습니까. 도움 줄 이들을 불러 줄 테니 일단 내 궁으로 가지요.”







말하고서 성급히 등을 돌리는데 팔꿈치가 잡혔다.







“저…. 감사합니다, 황자님.”







여전히 덜덜 떨면서도 고개를 푹 숙이며 고맙다고 말하는 모습이 가련했다.







“…….”







잠시간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느리게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환영처럼 스치는 옛 기억들에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고서 에릭은 앞서 걸음을 옮겼다. 종종 따라오는 발소리에 맞춘 느릿한 걸음이었다.











***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엘리제는 입을 꾹 다물고 열지 않았다. 저택에 돌아와서도 그 상태는 계속됐다.







블레이크는 케이트를 비롯한 사용인들을 모두 물렸다. 손수 엘리제의 머리 장식을 빼주고 옷을 벗겼다. 컨트롤러를 조작해 정조대를 느슨하게 하자 그때만 잠시 움찔했을 뿐, 엘리제는 그에게 몸을 맡기고 꼼짝하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점점 초조해졌다. 내내 제 얼굴만 바라보는 그녀가 혹 무언가를 눈치챈 것인지도 모른다.







클랜튼 후작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오늘 그가 루카스에게 한 제안에 대해서일까. 어느 쪽이든 그녀가 알아선 안 된다.







“엘리제….”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그녀의 다리에서 얇은 천을 떼어 냈다. 안에 고여 있던 액이 왈칵 쏟아져 그녀의 허벅지와 그의 손을 적셨다. 평소라면 이 황홀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필요하다면 클랜튼 경을 부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멀어지지 못하도록 그의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그녀의 벗은 몸을 아래 두고 한참이나 가만히 있어야 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블레이크.”







드디어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게 되면, 따라 죽어 줄 수도 있나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엘리제의 질문에 그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엘리제는 내내 궁금했었다. 카인 리베르토가 대체 왜 그녀를 죽이고 저 또한 죽음을 택했는지. 그의 표정과 눈빛에 담긴 것이 대체 어떠한 감정이었는지.







처음에는 카인이 저를 배신했다고 여겨 무작정 분노했다. 그러나 분이 가라앉아 냉정해지자 그리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악마’라는 변수 때문이다.







똑똑하던 녀석이 대체 왜 악마와 손을 잡았을까. 무엇이 카인을 그토록 궁지에 몰아넣었을까. 이성을 흐리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예 감정이 결여된 사이코패스나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십여 년간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미친 사람이 될 조건이 뭐가 있을까.







오랜 시간 쌓여 온 증오심 때문에?







그렇다고 보기엔 카인은 그녀를 데리러 온 순간부터 주삿바늘을 꽂는 마지막 순간까지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잘 지내는가 싶다가도 금세 티격태격하던 평소와 달랐다. 곧 죽게 된다니 동정이라도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마냥 잘해 줬다.







그렇다면 뭘까? 그녀 없인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소중히 여긴 걸까?







생전에 카인에게 이러한 가정을 털어놓았다면 그는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평생의 놀림감이 되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게 저 자신뿐이듯 그 역시 그랬고, 그래서 둘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분명 그랬을 텐데.’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새파란 눈동자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엘리제는 다른 건 몰라도 그의 마음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추락하는 저를 감싸던 순간 블레이크에게서 본 표정과 눈빛이 기억 속 카인의 것과 믿을 수 없도록 흡사했다.







강렬하게 남아 잊기 힘든 그것은 도무지 흉내 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같은 감정, 같은 마음이 아니고서야.







그래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답하지 않는 그를 보며 엘리제는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그것까진 무리인가?’







아무리 누군가를 소중히 여긴다 한들 어떻게 제 목숨을 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이유는 아닐 거라고 그녀도 줄곧 생각해 왔다. 그런데도 혹시 몰라 확인해 본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그라면 혹시 따라 죽어줄 수도 있지 않을지. 그런 사람도, 그런 사랑도 있는 건지.







그러한 괴상한 이유 또한, 카인이 벌인 일의 이유 중 하나로 가정할 수 있는지.







그때,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녀의 시선을 제게로 돌리고서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부인이 나보다 먼저 눈을 감는다면 난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겁니다. 따라 죽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심장이 저절로 멈출 겁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가정은 하지 마십시오.”







일그러진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릴 만큼 괴롭고 슬퍼 보였다.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기에 엘리제는 블레이크가 내뱉은 모든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그녀가 지닌 여러 개의 마법 아이템, 겹겹의 보호막을 하얗게 잊어 몸을 날렸듯, 그는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아끼지 않을 것이다. 몸에 두를 한 줌의 마력조차 없을지라도 제 뼈와 살로 그녀를 보호했을 것이다.







마침내 엘리제를 품에 넣었을 때, 그는 명백히 안도하며 기뻐했다.







[엘리제. 널 외롭게 죽게 하진 않을 거야.]







삶이든 죽음이든 함께해야 한다, 굳게 믿는 얼굴이었다.







[금방 따라갈게.]







그날의 카인 리베르토처럼.







벌어졌던 엘리제의 입술이 도로 다물렸다. 굳게 다물고서 힘까지 준 탓에 볼에 오목한 음영이 졌다.







“블레이크.”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엘리제가 옅은 미소와 함께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저 배가 좀 고픈데.”







어두운 불안감에 잠식되어 가던 그의 눈동자가 화들짝 놀라 커졌다.







“아.”







상체를 일으키고서 여러 번 눈을 깜빡이더니 후다닥 침대 아래 내려선다.







“지금 당장 요깃거리가 될 만한 걸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줄래요?”







그녀의 미소가 그렇게나 반가웠는지, 그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 말하고서 침실을 나서는 걸음이 다급했다. 방문이 닫히는 작은 소음 후, 엘리제는 손을 들어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떠하든 간에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반지를 두드려 패널 디스플레이를 활성화하고 지도를 확인했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회색 점이 보였다. 사용인들에게 명해도 될 텐데 주방까지 직접 갈 모양이었다. 그럴 줄 알고 부탁한 거기도 했다. 블레이크는 그녀에 대한 거라면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으니.







방문 앞 파란색 점은 아마도 앨런 루오스일 것이다. 그리고…….







엘리제는 침대에서 내려와 나이트가운을 찾아 걸쳤다.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서늘한 밤공기가 대충 여민 가운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럴수록 엘리제는 몸을 움츠리기는커녕 어깨를 펴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루카스, 나 좀 봐요.”







나직한 부름 직후, 시커먼 인영이 테라스 난간을 넘었다. 그는 그녀 쪽으로 다가오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우뚝 멈춰 섰다.







“엘리제.”



“마침 가까이에 있었네요. 할 말이 있었는데.”







어두워 보이는 그의 표정을 무시하고 엘리제는 해야 할 말을 먼저 빠르게 읊었다.







“클랜튼 후작 부인의 배 속에 아기가 있어요. 후작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일 후계자로 삼을 예정이었고요. 그리되면 루카스 클랜튼의 위치가 굉장히 불안정해지는 건 당신도 알 거예요.”







원작상에 언급되지 않은 걸 보면 시에나와 루카스가 사랑을 이루는 데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원작의 루카스 클랜튼, 즉 찬란한 외모에 어울리는 다정함과 상냥한 미소를 갖춘 남자 주인공이라서 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지금의 상황에선 결코 안일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후작이 지난번 일로 도움을 청하다가 뜻대로 안 되자 절 납치하려 들더라고요. 차라리 잘됐죠. 덕분에 일이 수월해질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던 루카스가 물었다.







“추락한 건, 네가 의도한 건가?”



“맞아요. 내가 유리를 깨고 뛰어내렸어요.”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블레이크가 호신용 마법 아이템을 여러 종류 사줬어요. 괜찮으리란 걸 알고 벌인 짓이에요.”



“…….”



“이 일로 그가 작위를 박탈당하면 당신이 작위를 승계하게 되겠죠. 전보다 훨씬 상황이 유리해질 거예요. 그러니 혹 증언할 일이 있으면 후작 편은 들지 말아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루카스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엘리제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그에게로 바짝 다가가며 엘리제가 말했다.







“세계의 균열이 시작됐어요.”



“뭐? 어째서?”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죠. 어제 연회장에서 무언가 변수가 있던 건지.”







안 그래도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