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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선물한 마법 아이템들 덕에 그녀가 안전하리란 걸 잊기라도 한 걸까. 블레이크는 악착같이 그녀를 품에 당겨 안았다.
추락하기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 엘리제는 그가 떨고 있음을 알았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그만큼이나 필사적으로 엘리제는 블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표정과 눈빛을 확인했다.
그 순간, 눈이 커다래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쿵-!
등부터 떨어진 그가 어느 정도의 충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에게 안긴 데다가 마법아이템의 보호까지 받은 엘리제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 정도의 충격밖에 받지 않았다.
그러나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거세게 동요하여, 단단히 붙들지 않으면 ‘엘리제 프로이젠’이라는 가면이 깨어져 벗겨질 것 같았다.
사방이 소란스러웠지만 엘리제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죽은 이처럼 숨죽인 채 꼼짝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를 블레이크의 품에서 떼어놓았다. 그런 중에도 엘리제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못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충격에 감겼던 그의 눈꺼풀이 다시 들리고, 새파란 눈동자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좇았다.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부딪혀 상해야 하는 쪽은 누가 봐도 사람인데, 마력으로 몸을 보호한 탓인지 대리석 바닥만 금이 가 엉망이었다.
“엘리제.”
제게서 그녈 앗아간 이를 힐끗 쳐다보고선 엘리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요.”
절박함 속에 초조와 불안이 짙게 깔려 어둑한 광기마저 흘렀다. 예상과 달리 엘리제가 제 품에 안겨들지 않자 그는 바닥을 짚고 무릎을 세워 우뚝 일어났다. 그의 검푸른 예복에서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통증이 없었던 건 아닌지, 그는 걸음을 떼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머뭇거리거나 멈추진 않았다. 도리어 덤비듯이 달려들었다. 새끼를 빼앗긴 금수처럼 예민하며 사나웠다.
그 기세에 겁이 나, 엘리제를 부축하던 이가 서둘러 손을 떼고 물러났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황망히 살피며 묻는 그를 여전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엘리제는 고작 한마디 짧은 답을 내뱉었다.
“괜찮아요.”
먼저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살피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얌전히 품에 안겼다.
그러는 사이 클랜튼 후작이 포박되어 끌려왔다. 쓰러져 있던 복도의 기사들을 깨우고 후작을 제압한 것은 뜻밖에도 2황자 에릭 러셀이었다. 후작이 뭐라 악다구니를 썼지만, 침묵 마법 탓에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목격자가 많아 별도의 증언은 필요 없겠군요. 궁내에 조력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데려가 심문토록 하겠습니다.”
황태자라면 모를까 2황자는 클랜튼 후작과 접점이 없다. 이에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여 후작과 관련된 일을 에릭에게 일임했다. 지금 당장 그에게 중요한 건 후작의 처우가 아닌 엘리제의 안정이었다.
“그럼 우린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아내가 많이 놀란 듯하여.”
에릭의 시선이 엘리제에게 닿았다. 그녀는 대공의 품에 안겨 죽은 듯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음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에릭이 힘겹게 답했다.
“…그러십시오. 부디 속히 안정을 되찾으시길.”
블레이크는 짧게 한번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서 연회장을 나섰다. 클로드를 비롯한 대공가 기사들이 그를 뒤따르자, 남은 건 엉망이 된 홀과 넋을 놓은 사람들뿐이었다.
***
시에나는 밤이 늦기 전에 연회장을 나섰다. 긴장한 채 춤을 추다 보니 피로했던 차에 카밀라가 먼저 나가자고 눈짓한 것이다.
나름 얻은 게 많아 아쉽지는 않았다.
일단 첫 춤을 춘 루카스 클랜튼이 워낙에 유명한 인사라 덩달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 후로 영식들의 춤 신청이 줄줄이 이어져 쉴 틈이 없었다.
‘클랜튼 경…. 말수도 없고 무뚝뚝해 보였는데.’
동생을 챙기는 걸 보면 겉보기와 달리 속정이 깊은 사람 같았다. 대공비가 쓰러지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비전하는 괜찮은 걸까.’
우아하고도 당당한 모습 탓에 미처 생각지 못했으나, 대공비에겐 듣기만 해도 괴롭고 슬픈 과거가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건강이 좋지 못한 듯했다. 문병을 갈 만큼의 친분이 없는 게 아쉬웠다.
카밀라에게 듣기론 엘리제 프로이젠 역시 오늘 처음 사교계에 발을 들인 것이라 했다. 스스로 밝히길 친구도 없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대공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지금과 같았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의기소침하여 구석진 곳에 숨어드는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나도 그분처럼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렴풋이 바라고 상상한 미래의 제 모습이 바로 오늘의 그녀와 같음을 시에나는 깨달았다.
“얘! 시에나!”
귀가 아플 정도로 가까이서 외쳐 부르는 소리에 시에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카밀라는 기가 찬지 헛웃음을 지었다.
“넌 대체 몇 번을 불러야 대답하는 거니?”
“응? 불렀어?”
“그래.”
그제야 시에나는 상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마차로 향하는 줄 알았더니, 그들은 어느새 다른 궁 앞에 당도해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셨잖아. 오늘 특별한 경험을 시켜 주겠다고.”
“아….”
그리 말하는 거로 보아 눈앞의 건물이 황태자궁인 듯했다. 제도의 여러 모임에 녹아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며, 오늘 밤 둘이 함께 그녀를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대체 뭘 배워야 한다는 건지.’
카밀라는 익숙하게 시에나를 이끌었다. 복잡한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 도착한 곳은 화려하게 꾸며진 널따란 방이었다. 빛이라곤 초 몇 개가 전부인 어둑한 공간이 다소 뿌옇게 느껴져, 시에나는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어서 들어가.”
카밀라가 뒤에서 그녀의 등을 떠밀곤 방문을 닫았다. 안에 들어서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야릇한 향이 코에 스며들었다.
‘이건 무슨 냄새지?’
숨을 몇 번 쉬기도 전에 피부와 콧속 점막에 끈적하게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머리도 왠지 띵해지는 것 같았다.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시에나와 달리 카밀라는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렉!”
황태자와 연인 사이 아니냐는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만, 카밀라에겐 남자가 또 있었다. 제복 차림의 사내였는데, 울룩불룩한 근육 탓에 셔츠가 터질 것 같았다.
카밀라를 대뜸 안아 올린 남자가 그녀를 매달고 소파로 향했다. 그녀는 깔깔대며 남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고, 그는 서슴없이 그녀의 치마 속에 손을 넣었다.
소파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카밀라의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속옷이 푹신한 카펫 위를 뒹굴었다.
“으으응….”
나른한 신음을 흘리는 카밀라를 소파에 눕히며 남자는 하나둘 그녀의 옷을 벗겨냈다. 드러난 가슴을 빨고 허벅지를 잡아 벌리는 광경이 지독히도 외설적이었다.
시에나는 뒤엉킨 남녀의 몸에서 황급히 시선을 뗐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화끈거렸다. 저토록 음란한 광경을 눈에 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돌아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여지질 않았다.
“잘 봐둬야지, 영애.”
그때, 누군가 그녀의 등에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시에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 뒤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황태자 렉스 러셀이었다.
“보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의 말소리가 뱀처럼 그녀를 휘감았다. 카밀라와 그렉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도록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고정했다. 시각적 자극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시에나는 제 몸을 꽉 죄던 드레스가 매듭이 풀려 느슨해지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저렇게 빨리면, 기분 좋을 것 같지 않아?”
꼿꼿하게 선 젖꼭지를 보란 듯 굴리는 그렉의 혀 놀림에 맞춰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손끝으로 덧그렸다. 닿을락 말락 스치는 손길이 간지러우면서도 짜릿했다.
누군가 보든 말든 소파 위의 남녀는 서로를 탐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기에 더욱 흥분하여 몰두하는지도 몰랐다.
시에나는 제가 점점 이상해짐을 느꼈다. 머릿속이 멍하여 무언가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 게 불가했다. 화끈거리던 몸이 이젠 뜨겁기까지 했다.
“아래는 더욱 그래.”
즐거운 듯, 렉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참기 힘들만큼 기분이 좋아지거든. 혀로 쑤시면.”
그의 말마따나 카밀라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그녀는 그렉이 제 아래를 수월히 빨 수 있도록 한쪽 다리는 등받이에, 다른 쪽 다리는 그의 어깨 위에 올린 채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혀보다 더 굵고 단단한 거면 더할 나위 없지.”
미끄러져 내린 손이 시에나의 아랫배를 지나 허벅지 위를 배회했다. 다리 사이를 슬쩍 슬쩍 건드려 그녀를 안달 나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넣기도 빠듯할 거야.”
야하게 속삭이며 그는 그녀의 귓불을 잘근댔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부러 젖은 소리가 나도록 혀로 그녀의 귓구멍을 들쑤셨다. 시에나는 꼼짝할 수 없어 억눌린 신음만 토해냈다.
“영애는 처음이니까. 천천히 시작해 보면 어떨까?”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이길 기다리며 렉스는 그녀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달구었다.
허락이 떨어지면, 이대로 며칠간 그녀를 잡아두고 약과 섹스에 중독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면 시에나는 남자 주인공과의 평범한 관계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더 크고 강렬한 쾌락을 찾아 제게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음란해지면 음란해질수록 좋았다. 시에나의 선택에 따라 이 시나리오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달라진다. 그가 받을 수 있는 포상 또한 비례하여 커질 것이다.
지금쯤이면 이성이 마비됐을 법도 한데 시에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멍하게 흐려진 동공에 어떻게든 상을 담으려 애쓰며 입술을 달싹일 뿐이었다.
그래도 렉스는 재촉하지 않았다.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시에나는 그에게 있어 부차적인 목표였다.
정작 그가 이 세계에서 필히 삼켜야 할 건 따로 있었다. 그걸 가지게 되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백 년을 지하에 틀어박혀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떠올린 것만으로도 아래가 묵직하게 부풀었다.
“즐거울 거야, 분명.”
흥분하여 몸을 맡겨야 할 건 시에나인데 괜스레 제 몸이 달았다. 눈을 지그시 내리뜨자 연보랏빛 머리칼이 환영처럼 흔들렸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스미는 것 같았다.
동의도 구하지 않고 다짜고짜 박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차올랐다.
엘리제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줄곧 이랬다. 제어가 되질 않았다.
카인 리베르토의 기억 탓일까. 그녀를 눈에 담으면 수십 수백 가지 환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깨어지지 않는 단단한 가면 너머, 울고 웃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화내고 소리치는 갖가지 모습들이 생생했다.
맡아지는 향기는 하나일 텐데, 달콤하고도 씁쓰름했으며 청초하면서도 농염했다. 세계의 모든 게 그녀를 연상케 했다. 그녀로 귀결됐다.
“■■.”
좋지 못한 징조였다. 낮게 욕지기를 내뱉으며 시에나의 허리를 움켜쥐려 할 때였다. 등 뒤에서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2황자 에릭의 목소리에 렉스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