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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목소리에 엘리제는 움찔 굳어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열렸다 닫히며 새어 들어온 희미한 빛이 언뜻 남자의 얼굴을 그려냈다.
“클랜튼 후작…?”
“이런 때조차 그리 부르는 게냐? 내가 네 아비라는 걸 잊은 것 같구나, 엘리제.”
엘리제는 침묵한 채 그를 바라봤다. 연회장에서는 분명 그를 보지 못했다. 여태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블레이크가 그녀를 홀로 뒀을 리 없다. 곁을 떠나며 기사들을 방 근처에 두어 지키게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사실은 너와 내내 얘기를 하고 싶었단다. 그런데 대공이 허락하질 않더구나.”
“그랬나요?”
엘리제는 후작가의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날 붙잡힌 사용인들이 황궁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것까진 메리에게 들었으나 그 후론 관심이 없어 묻지 않았다. 그녀가 묻지 않으니 굳이 말해 주는 이도 없었다. 아마도 엘리제에겐 괴롭고 가슴 아픈 일이라 여겨 모두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 풀 기회가 필요했다.”
그는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나는 너와 루카스가 사용인들에게 그런 대우를 받는 걸 전혀 몰랐다.”
엘리제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졌다. 이 사람이 이런 얘길 왜 제게 와서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들이 법정에서 증언한 건 모두 거짓이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게 분명해.”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엘리제는 후작이 저를 찾아온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감옥에 갇힌 사용인들이 클랜튼 후작 부부를 물고 늘어진 모양이다.
“비록 내가… 그래, 조금 과하게 널 보호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너와 우리 가문을 위해서였다. 어차피 네겐 가문을 이끌 만한 그 어떤 재능도 없지 않느냐. 부족한 역량으로 과중한 짐을 지느니 좋은 가문의 사내와 결혼하여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는 게 백배 낫다.”
그의 말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엘리제 클랜튼에게 가문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던 후작이 그녀를 가문 안에 가둬두다시피 한 모양이다. 세력을 만들지 못하도록 일찌감치 조치한 것이다.
“네가 대공비가 되어 높은 지위와 호화로운 삶을 누리게 된 것이 누구 덕이더냐.”
거리가 꽤 가까웠기에 엘리제는 그의 표정과 눈빛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엘리제를 향한 후작의 눈빛은 남을 보는 듯 서먹했다. 한편으론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부모가 제 자식을 보는 눈빛이 어떠한지 직접 겪어 보지 못한 그녀였으나, 정상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배우로서 엘리제에게 가장 어려웠던 연기는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이었다. 몇 번의 파양 끝에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 양부모를 만나 학대까지 당했던 엘리제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든지 ‘모성애’ 혹은 ‘부성애’ 같은 걸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많이 관찰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여인의 눈빛, 공원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젊은 부부, 딸을 결혼시키는 아버지의 표정, 아이의 장례식과 부모의 장례식.
그건 배우로서의 호기심이기도 했으나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래?’
엘리제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그의 말대로 재능 없는 엘리제 클랜튼에게 실망을 거듭하다 보니 저리 되었나?
‘그럼 안 되는데. 설마 검술이고 마법이고 진짜 아무 재능도 없는 건 아니겠지?’
클랜튼 후작이 어찌 되든 말든, 과거에 딸을 감금해 놓고 괴롭혔든 말든 어차피 지금의 엘리제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지 않나. 지금 당장 그녀에게 손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모른 척 넘어가 줄 수 있다.
그런데 왜 나타나서 귀찮게 굴까. 덕분에 대공비가 되어 잘살게 되었으니 뭘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네가 나서서 해명을 좀 해달라는 거다. 사용인들의 증언이 거짓이라는 걸.”
“싫어요.”
엘리제는 단칼에 거절했다.
“…뭐?”
후작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제가 좀 바빠서요. 그런 일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요.”
그녀의 말은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다.
애써 평정심을 찾긴 했으나, 균열이 시작된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이제 곧 3퍼센트에 달하는 멸망의 징조를 보일 것이다.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알 수 없으나 더 커지면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사라를 찾아 의상실을 정상화하고, 루카스의 연기를 돕고, 저와 블레이크의 동선을 조정하여 원작대로 흘러가게 하려면 몸이 몇 개라도 부족했다.
그런데 무슨 파란색 점도 아닌 검은색 점, 즉 엑스트라에 불과한 클랜튼 후작을 위해 시간을 낭비한단 말인가.
남보다 못한 친부가 아니라 몹시 사이좋은 부모였어도 생각해 볼까 말까 한 것을.
“네가 어떻게 그런, 배은망덕한….”
분노에 휩싸인 후작이 부들부들 떨었다.
‘아저씨, 뭘 그렇게 화를 내. 내가 바쁘다잖아. 바쁘면 못 도와줄 수도 있는 거지.’
엘리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봤다.
“설마 복수하는 게냐?”
“복수요? 무슨 복수?”
“네가 거부한 결혼을 억지로 시켰다고 지금 이러는 거냔 말이다.”
엘리제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후작이 멋대로 말을 이었다.
“네가 루카스를 좋아하는 건 안다. 정 녀석을 포기 못 하겠으면 후일 파양하여 네게 보내 주마. 정부로 두면 될 것이 아니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라버니는 클랜튼의 후계자잖아요. 그런 그를 어떻게.”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에게 왜 후작가를 물려준단 말이냐. 몇 달 후 네 동생이 태어나면 그 아이가 우리 클랜튼의….”
“뭐라고요?”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동생?”
설마 지금 후작 부인이 아이를 임신했단 소린가.
‘와, 이러면 큰일인데.’
그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루카스의 입지는 바닥에 처박힌다. 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찬란한 얼굴이 있다. 그리고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원작의 루카스에게도 있던 것들이다. 후계도 되지 못하고 성격까지 이상해진 지금, 그는 반쪽짜리나 마찬가지다.
‘시에나가 그래도 루카스를 선택할 수 있을까?’
원작에선 클랜튼 후작 부부에 대한 내용이 나오질 않아 방심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원작대로 2황자의 반정을 도우면 작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후반부에 이르러서가 아닌가.
“그래. 태어날 아이는 네 동생이다, 엘리제. 그러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루카스는 어쩌라고!”
엘리제는 하마터면 머리를 쥐어뜯을 뻔했다. 제가 후작의 말허리를 두 번이나 뚝 잘라 먹었다는 자각도 없었다.
“…넌 이 상황에도 그놈 걱정뿐이구나.”
그럼 뭘 더 걱정해야 한단 말인가. 루카스가 짊어진 건 이 세계의 안위였다. 그걸 짐작도 못 하는 저 이기적인 아저씨와 더는 얘길 이어 가기 싫었다.
“알았으면 돌아가세요. 내가 굳이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루카스에게 작위를 상속한다는 계약서라도 쓰면 모를까.”
이 일에 관해선 협상이 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내뱉은 말이었다. 어차피 엘리제 외의 직계가 태어나면 당연히 모든 건 그 아이에게 가게 돼 있다. 배 속 아이를 죽일 게 아니라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야 했다.
‘잠깐. 차라리 후작이 이번 일로 물러나게 되면?’
아직 배 속 아이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적을 것이다.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지금 상황에서 후작이 물러나면 루카스가 작위를 물려받을 게 아닌가.
“정녕 이럴 것이냐?”
엘리제는 저를 노려보는 후작을 가만히 마주 응시했다. 제국법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그 일로 인해 후작이 어느 정도의 징계를 받게 될지 알 수 없다. 이왕이면 확실하게 후작을 끌어내릴 구실을 만드는 편이 좋을 것이다.
‘조금 더 도발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엘리제가 후작에게 한 대 맞기까지 하면 법이고 뭐고 일단 블레이크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계산을 마친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왜요? 이러면 안 돼요?”
“뭐?”
“당신도 여태 내가 바라는 거에 관심 없었잖아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그런데 내가 왜 당신을 도와줘야 해요?”
“너….”
“차라리 진실을 모두 까발리면 모를까.”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본래 진실은 밝혀지는 법이잖아요? 제가 본래 정의 구현에 관심이 많아서요. 이대로 묻어 버리려니 영 마음이 불편하네.”
엘리제가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 가는 동안 그의 눈빛은 점차 싸늘하게 변해 갔다.
“결국 네가…. 나와 척을 지겠다는 거구나.”
후작이 그녀에게로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흥분하여 따귀나 날릴 줄 알았던 그가 오히려 침착해진 모습으로 거리를 좁혀 오자 엘리제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부러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유심히 살폈다.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했었다. 일이 이리되리란 걸.”
그의 손에 맺힌 붉은 빛이 뭔지 엘리제는 직감했다.
‘그러고 보니 대단한 마법사랬지.’
겁먹은 겉모습과 달리 엘리제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블레이크가 선물한 호신용 마법 아이템을 여럿 소지하고 있었다.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대공이 널 몹시도 아끼는 것 같더구나. 약점을 드러낸 맹수는 두렵지 않은 법이지.”
“그래서요? 절 납치라도 하시게요?”
경멸 어린 목소리로 엘리제가 물었다.
“납치라니. 보호일 뿐이다. 넌 네 가족을 곤란케 한 대공과 더는 같이 있을 수 없었던 거야.”
헛소리를 지껄이는 후작을 피해 엘리제는 점점 더 뒤로 물러났다. 곧 유리벽에 등이 닿았다.
엘리제는 힐끗 연회장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시에나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든 시나리오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납치보다는 이 편이 더 낫겠지?’
보다 강렬하고 확실한 방법을 택하여 후작을 궁지에 몰아야 한다. 엘리제의 속내도 모르고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소용없다, 엘리제. 어차피,”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엘리제의 비명에 그는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무슨….”
그녀의 비명에 반응하여 귀고리가 번뜩였다. 동시에 엘리제에게 닿아 있던 유리벽이 산산이 깨져 나갔다. 무섭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후작이 다급히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이미 엘리제는 연회장 쪽으로 몸을 던진 후였다.
‘이쯤 되면 작위 반납 안 하곤 못 배기겠지?’
루카스의 꽃길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엘리제는 방긋 미소 지었다. 추락하는 기분은 더러웠지만 다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두렵지 않았다.
경악한 후작이 뒤늦게 수인을 맺었다. 본래 쓰려던 이동 마법을 흩트리고 다른 마법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후작은 거세게 거꾸러졌다. 직후, 유리벽이 깨진 그곳에서 누군가 뛰어내렸다.
‘어…?’
벽을 어찌나 강하게 박차며 뛰어내렸는지 추락하는 그녀를 금세 따라잡았다. 이를 악물고 저를 붙잡는 그를 보며 엘리제는 황당함에 입을 뻐끔거렸다.
‘당신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