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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아니… 대공비!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부인, 친구가 필요한 거라면 내가 알아봐 줄 테니 오늘은 일단 저택에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엘리제는 블레이크를 돌아보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블레이크.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 블레이크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성격 나쁜 카밀라와 가까워져 휘둘리고 상처받을 게 염려되었으나 어차피 그는 엘리제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지켜보다가 문제가 생기면 카밀라를 조용히 치우는 쪽을 택해야 할 듯했다.
“…알겠습니다.”
시무룩해진 채 답하는 대공의 모습에 카밀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맹수에게 사로잡힌 초식동물인 줄 알았던 대공비가 이제 보니 맹수의 목줄을 쥐고 있지 않은가. 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쩔쩔매는 대공은 얼마 전 보았던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럼 우린 가볼까?”
엘리제가 새삼 다시 보여, 카밀라는 시큰둥하던 처음의 태도를 버리고 선뜻 답했다.
“네, 비전하.”
두 남자를 테라스에 그대로 남겨 두고서 엘리제와 카밀라는 연회장으로 나왔다.
“오붓하게 얘기하려면 휴게실이 나으려나.”
렉스가 카밀라를 이용해 무슨 수작을 벌이는지 떠볼 생각에 엘리제는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았다.
“북적거리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일걸요.”
“그래?”
“네. 저 위쪽 방이 밀담하기엔 딱 좋지만, 시종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서요. 얘기만 나누러 가기엔 아깝죠.”
엘리제는 카밀라의 시선을 좇아 연회장 위쪽을 바라보았다. 캄캄해서 뭐가 있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오페라극장의 박스석처럼 연회장을 내려다보며 쉴 수 있는 공간들이 있지 않을까.
“저쪽이 그나마 사람이 적네요. 저기로 가요.”
연회장 사정을 잘 모르는 엘리제는 카밀라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영애는 황태자 전하와 사이가 각별한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 준 분이죠.”
“새로운 세계라. 그게 뭔지 참 궁금하군.”
엘리제의 떠보는 말에 카밀라는 거리낌 없이 답했다.
“파티에 초대할 테니 놀러 오세요. 전하께선 누구든 환영하시거든요.”
“그런가?”
“대신 대공님껜 비밀로 해주시고요.”
블레이크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걸 보면 건전한 파티 같진 않았다.
‘전에 말한 난교파티 얘긴가.’
어쩌면 벌써 시에나까지 끌어들였을지도 모른다.
<타락한 연인>의 본래 시나리오에서도 시에나는 황태자가 선사하는 쾌락에 속절없이 빠져든다. 루카스와 만나면서도 말이다. 그런 그녀를 이해하고, 모든 걸 포옹하는 커다란 사랑으로 제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루카스의 역할이었다.
“설마 대공님이 외출도 못 하게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
“다행이네요. 왠지 구속이 심할 것 같았는데.”
카밀라의 말에 엘리제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이미지시던가?”
“네. 엄청요.”
“이런, 조심하시라고 말씀드려야겠군. 대공께선 사실 너그럽고 자상한 분이시라네.”
“너그럽고 자상….”
카밀라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태자 전하께서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분은 오로지 쾌락을 위해 사시죠. 흥미가 떨어지면 가차 없으실걸요.”
그녀의 솔직한 언행에 엘리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정도로 잘 아는 걸 보면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닌 모양인데?’
잘하면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말이네, 혹시….”
엘리제가 조금 더 렉스에 관해 물으려 할 때였다.
“카밀라!”
다소 들뜬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상기된 얼굴의 시에나가 헐떡거리며 서 있었다. 달려오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루카스도 아직 그녀와 함께였다.
“대공비 전하.”
그녀는 엘리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 공손히 인사했다.
‘얘가 왜 여기로 왔지.’
루카스와의 춤이 끝난 후 영식들에게 둘러싸여 춤을 이어 가야 할 시에나가 왜 여기로 와서 제게 인사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약간의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카밀라가 시에나를 소개했다.
“비전하, 이 애는 제 사촌인 시에나예요. 라우디아 백작가의 장녀죠.”
엘리제는 고개만 한번 까닥여 시에나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후일 여러 가지로 패악을 부릴 걸 생각하면 선을 긋고 친해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이제 빨리 가렴.’
그러나 시에나는 인사가 끝난 후에도 카밀라 곁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과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엘리제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대체 왜 저런담.’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에나와 카밀라, 엘리제와 루카스가 함께 서 있으니 그들 주변에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그들 또래의 영애나 영식들이었다.
엘리제는 도르르 눈을 굴렸다. 어째서인지 아무도 춤을 추러 가지 않았다. 둘러싼 사람들의 숫자만 쓸데없이 늘어났다.
‘뭐야 이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엘리제는 작게 헛기침했다.
“라우디아 영애, 연회에 참석했으니 좀 더 즐겨야 하지 않겠나? 영애에게 춤을 청하고 싶은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괜찮아요. 벌써 한 번 췄는걸요.”
시에나는 눈치 없이 손을 내저었다. 엘리제는 힐긋 카밀라를 쳐다보았다. 이래서야 더는 정보를 캐내기 힘들었다. 아쉽지만 포기해야 할 듯했다.
“아무래도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군. 투리스 영애, 라우디아 영애. 다음에 또 보지.”
그렇게 해서라도 자리를 떠야만 시에나가 원작대로 영식들과 춤을 출 것 같았다.
“아….”
아쉬움 섞인 그녀의 눈빛을 뒤로하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가다니, 어딜?”
루카스가 덥석 엘리제의 팔을 잡았다.
“……?”
“나와 춤을 춰주기로 약속…했잖습니까.”
모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엘리제와 루카스를 쳐다봤다. 계속 가지 않고 곁에 서 있던 게 그 약속 때문이었던 것이다.
다소 당황하긴 했으나, 엘리제는 태연히 웃으며 눈빛으로 말했다.
‘루카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시에나도 곁에 있는데 지금 춤을 청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물론 루카스는 그녀의 눈빛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조르듯 그녀의 팔을 잡아당길 따름이었다.
“비전하.”
엘리제는 반쯤 해탈한 심정이 되었다.
“그래요…. 가요, 가.”
뭔가 상황이 굉장히 엉망이었다. 그렇게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루카스와 반대 방향에서 누군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아왔다.
“부인.”
블레이크였다.
“나와도 아직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언제 대화를 마치고 나왔는지 렉스 또한 블레이크 뒤에 서 있었다.
“블레이크…? 우리 아까 테라스에서….”
“그건 무효입니다. 추다 말았지 않습니까.”
우기는 블레이크 탓에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저, 오라버니.”
그러나 적당히 물러날 줄 알았던 루카스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시에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이 진풍경을 바라보았다. 엘리제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후우, 할 수 없나.’
정말 이러긴 싫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모면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엘리제는 스르르 몸에서 힘을 뺐다. 바닥에 부딪히지 않게 블레이크 쪽으로 몸을 기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절하는 장면을 한두 번 연기해 본 것이 아니기에 그녀는 매우 자연스럽게 쓰러졌다.
“꺅! 비전하!”
누군가의 비명을 흘려들으며 엘리제는 눈까지 감아 버렸다. 뒷일이 어찌 되든 이젠 알 바 아니었다.
‘알아서들 수습하라지.’
***
블레이크에게 안겨 엘리제는 어딘가로 옮겨졌다. 연회장을 빠져나와 계단을 오르는가 싶더니 얼마 후 푹신한 무언가가 등에 닿았다. 구두를 벗기고, 몸을 죈 드레스를 느슨히 하여 편안하게 해주었다.
잠시 후,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몸 안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루카스구나.’
역시 윗세계 요원의 치유력은 최고였다. 마사지라도 받은 듯 몸의 컨디션이 최상으로 회복되었다.
그녀가 괜찮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얼굴을 간질이는 엘리제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모두 넘겨주고 나서야 손을 뗐다.
치유력이 아니었다면 누군지 착각할 만큼 섬세하며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괜찮은 건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쉬게 해 주면 금방 깨어날 겁니다.”
블레이크가 방 안에 있는데도 치유의 힘을 사용하고 머리칼을 정돈해 준 걸까. 눈을 떠 볼 수 없으니 답답했다.
얼마간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표정으로 누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엘리제로선 전혀 알 수 없었다.
“경, 나와 얘기 좀 하지.”
침묵을 깬 건 블레이크였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지독히도 차가웠다.
“알겠습니다.”
루카스는 이불을 끌어다 그녀의 목까지 덮어 주고는 그녀 곁을 떠났다.
잠시 후 달칵, 하는 작은 소음이 들려오더니 방 안이 고요해졌다.
‘나갔나?’
엘리제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방에는 그녀뿐이었다. 엘리제는 맨발로 바닥을 디뎠다. 카펫이 깔려 있어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여긴 어디지?’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꽤 화려하게 꾸며진 장소 같았다.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방 한편이 유독 환한 것을 깨닫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벽 너머 내려다보이는 연회장 전경에 엘리제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카밀라가 얘기했던 위층 쉼터였다.
아래를 훑다보니 누군가와 춤을 추는 시에나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삐끗하긴 했지만, 시나리오대로 장면이 흘러가 천만다행이었다.
‘어떻게든 넘긴 건가.’
그리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문득 무언가 시야에 걸렸다. 내려다보니 중간지대의 반지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응? 뭐지?’
반지를 두드려 활성화한 그녀의 눈이 당혹감에 커다래졌다.
『세계의 균열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길한 문구를 담은 경고 창이 디스플레이 한가운데에 떠오른 것이다. 엘리제는 침착하려 애쓰며 작품소개 탭으로 들어가 스크롤을 내렸다.
『시나리오 완성률: 9퍼센트 / 세계의 균열: 3퍼센트』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균열이 시작됐단 말인가.
사라의 의상실에 사라가 없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루카스의 연기가 문제였나. 어쩌면 방금 연회장에서 저가 시에나를 만난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짚이는 게 너무 많았다.
‘3퍼센트. 3퍼센트라….’
입술을 깨문 채 빨간 글씨를 노려보던 엘리제는 눈을 한번 꾹 감았다가 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예기치 못한 문제들이 생겼다. 그것은 결코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후회하고 우울해한들 좋은 수가 생기진 않는다.
‘어쩌겠어. 이미 이렇게 된 걸. 앞으로 잘하자. 그러면 돼.’
엘리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시길 반복하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까짓 3퍼센트로 대단한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사라는 균열을 수리할 수 있다고 했으니 메리가 그녀를 찾아오면 그마저도 금방 고칠 수 있다.
“괜찮아. 괜찮아.”
그녀의 빠른 판단력과 적응력은 이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호흡을 조절하며 괜찮다고 몇 번 중얼대자 순식간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왕 창을 연 김에 엘리제는 지도탭을 확인했다. 연회장과 지도를 대조해 바라보며 주의해야 할 인물이 더 있는지 확인했다.
빼곡한 검은색 점 사이에 조연을 나타내는 파란색 점이 몇 개 섞여 있었다. 유독 밝게 빛나는 금빛 점은 시에나였고 하나뿐인 회색 점은 렉스였다. 에릭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엘리제는 맵을 조금 움직였다. 그녀가 있는 방을 확인한 순간 점 하나가 이쪽으로 이동해 오는 것이 보였다.
재빨리 창을 종료함과 동시에 달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