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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황태자라면 어찌 대응했을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 그 몸을 차지한 건 악마였고, 살의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환장하는 존재였다.
렉스의 동공이 황홀감에 물들자, 블레이크는 당연히 질색했다. 미친 놈 보듯 하며 성큼 물러섰다.
“전하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으니 어서 자리를 피해 드리는 편이 낫겠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렉스가 어어, 소리를 냈으나 엘리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블레이크와 함께 돌아섰다.
보아하니 첫 춤을 신청하려 한 모양인데 어림없는 소리였다. 안에서 야릇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 때문에 지금 엘리제의 몸은 평소보다 훨씬 예민한 상태였다. 춤을 추며 수작질을 할 게 뻔한 렉스는 당연히 피해야 했다.
걸음을 옮기며 블레이크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별것 아닌 스킨십에도 엘리제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들렸다.
“아직 견딜 만합니까?”
아니라고 답하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럼요. 괜찮아요.”
엘리제는 그를 올려다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괜찮지 않다고 했다가는 바로 연회장을 빠져나가 어딘가에 처박힐 분위기였다. 어떻게든 꿋꿋이 버텨야 했다. 애초에 루카스와의 약속을 염두에 두고 정조대를 착용한 것인데 곧장 돌아가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블레이크와 함께 연회장을 가로지르며 엘리제는 빠르게 장내를 훑었다. 시에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우연인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나를 보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엘리제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말고는 딱히 그녀 쪽을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의아했지만 일단은 미소를 머금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 안에는 음식을 먹으며 쉴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블레이크가 엘리제를 데려간 곳도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 연회 초반이었기에 그들 외엔 휴식 중인 이들이 없었다.
블레이크는 장갑을 벗지 않고도 집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들을 한 접시 가지고 왔다.
“점심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며 하나씩 천천히 엘리제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경악스러운 행태에 많은 수의 귀족들이 이쪽을 힐끗댔다. 살짝 과장하여 말하자면 거의 대부분인 것 같았다.
치즈가 올라간 비스킷을 오물거리며 엘리제는 생각했다.
‘남의 일에 신경 좀 꺼라.’
지금은 자청하여 시중을 드는 귀여운 남편과 함께 <타락한 연인>의 한 장면을 구경할 때였다.
다행히 황태자와 보랏빛 머리칼의 영애가 첫 춤을 추기 시작하자 이쪽에 쏠려 있던 이목 중 상당수가 흩어졌다.
‘슬슬 루카스도 움직여야겠네.’
시에나는 아까부터 혼자였다. 같이 온 일행은 어쨌는지 따로 떨어져 벽에 붙어 서 있었다.
마침 이쪽을 쳐다보던 루카스와 눈이 마주치자 엘리제는 얼른 고개를 까닥였다. 미리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다음 춤곡은 알르망드. 지금이야말로 시에나에게 춤을 청할 기회였다.
루카스의 시선이 시에나를 향했다. 결연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모습이 꽤 박력 있었다.
‘그래. 바로 저거지.’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이 아니어서인지 반지는 진동하지 않았다.
사실 이번 연회 장면에 대공 부부의 분량은 없다. 참석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란 소리였다. 그래도 엘리제는 루카스와 시에나의 첫 만남을 직접 지켜보고 싶었다.
루카스와 몇 마디를 주고받던 시에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성공했나 본데?’
첫 번째 춤곡이 끝나길 기다리며 둘은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눴다. 거리가 꽤 되기에 여기까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엘리제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었다.
‘어째서 제게 춤을 청하셨나요?’
‘영애께서 제 청을 받아들인 것과 같은 이유겠지요.’
이때 둘의 얼굴에는 똑같이 웃음기가 없었다.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는 이 없어 이방인처럼 홀로 서 있던 시에나. 오랫동안 사랑했던 이를 잃고 실의에 빠진 루카스. 이 거대하고도 화려한 연회장에서 웃지 못하는 건 둘뿐이었다.
외양이 겹쳐서일까. 혹은 상황이 그래서일까. 엘리제의 머릿속에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오랜 무명시절을 거쳐 갓 데뷔하였을 때였다.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다는 선상 파티에 운 좋게 초대받았다. 기대를 품고 참석하였으나 차가운 시선과 비웃음만이 날아들었다. 태연하게 웃고 싶어도 도무지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아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홀로 삭이고 있을 때, 똑같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누군가 다가와 춤을 청했다. 그녀보다 한 해 일찍 데뷔했던 카인 리베르토, 바로 그였다.
아무도 없는 어둑한 갑판 위에서, 작게 흘러나오는 연주에 맞춰 그들은 춤을 췄다. 빌려 입은 물빛 드레스는 어울리지도 않고 우스꽝스러웠으나 그는 몇 번이나 아름답다고 말해 주었다.
‘하여간 보는 눈도 없는 놈.’
악마 놈이 카인인 척하며 그때의 기억을 말했을 때 얼마나 우스웠던가. 그녀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흑역사였다.
엘리제가 <타락한 연인>의 여자 주인공 시에나로 캐스팅됐을 때, 이미지가 너무 맞지 않는다며 떠드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엘리제에게도 지금의 시에나와 같은 그런 날들이 있었다. 능숙하게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매끄럽게 웃지도 못했다. 별것 아닌 말에도 상처받아 엉엉 울었다.
그래서 배역을 받아들였다.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특히 카인과 함께라면, 지나간 날들에 대해 웃고 떠들며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을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이지.’
돌이켜 생각해 봤자 우습기만 할 따름이다.
드디어 첫 번째 춤곡이 끝났다. 역시나 두 번째는 알르망드였다.
시에나와 루카스는 홀의 가장자리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춤에 그리 능숙해 보이지 않았다. 경험 없는 영애들이 대부분 그렇듯 모든 동작을 완벽히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히 루카스는 그런 그녀에게 잘 맞춰 주었다.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네.’
뿌듯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묘하게 아렸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엘리제는 도르르 눈을 굴렸다. 퍽퍽한 것을 계속 받아먹은 탓인지도 모른다. 뭔가 마실 것이 필요했다.
“엘리제.”
블레이크의 부름에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어둡게 가라앉은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가슴을 짚고 있던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우리도 춤을 출까요.”
이미 곡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다. 멀뚱멀뚱 쳐다보자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부러워하는 것 같기에.”
그의 눈빛이 어둑한 걸 보니 아무래도 뭔가를 오해한 듯했다. 춤을 춰도 될 만한 상태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으나 엘리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에 블레이크는 그녀를 가장 가까운 테라스로 데리고 나갔다. 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 그래도 연주곡은 충분히 잘 들렸다.
어둑한 테라스에서 그들은 가깝게 마주 섰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고,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시작을 알리는 말도 필요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춤곡에 녹아들었다.
“움직일 만합니까.”
그의 질문에 엘리제는 ‘으음’ 하고 생각하는 척했다.
“안에서 움직이는 걸 멈춰 주면 더 잘 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직이 웃으며 그가 안쪽 주머니에서 컨트롤러를 꺼냈다.
“굳이 지금보다 잘 출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며 누른 버튼에 엘리제는 깜짝 놀라 그에게 매달렸다. 진동이 한층 거세졌을 뿐 아니라 안을 들쑤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제게 안겨 오는 그녀를 당겨 안으며 그가 손을 미끄러뜨렸다.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길에 엘리제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뭉텅뭉텅 춤동작이 생략됐다. 그런데도 그는 흡족하게 웃었다. 아래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엘리제는 연신 몸을 비틀며 헐떡였다.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유독 더 아름답습니다.”
“흐윽, 블레이크….”
“힘들면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역시나 바라는 건 그거였나 보다.
‘아…. 안 되는데. 루카스 춤 연습 도와주기로 했는데.’
요 며칠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던 그를 연회장에 홀로 버려 두고 갈 순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대로는….’
이놈의 사악한 도구는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스르륵 멈추고, 다시 또 몸을 달구어대길 반복했다. 차라리 시원하게 가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질 못하니 애가 탔다. 블레이크가 그날 유독 힘들어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엘리제….”
블레이크는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는 그녀를 초조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힐끔 테라스 입구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꾹 깨문다.
‘응…?’
의아한 마음에 엘리제가 그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리는 순간, 갑자기 안쪽의 진동이 멈췄다.
동시에 테라스 문이 벌컥 열렸다.
보통 문을 닫고 커튼까지 쳐 놓으면 들어오지 않는 게 예의였다.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고 멋대로 굴 만한 이가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 있었네!”
양쪽으로 시원하게 열어 젖힌 문 앞에는 예상대로 황태자가 서 있었다. 첫 춤을 추었던 영애를 곁에 동반한 채였다.
“우리 카밀라가 대공비와 친해지고 싶대서.”
“네에? 제가 언제요!”
얼마나 급했으면 옆의 영애와 말도 맞추지 않았을까.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블레이크가 어금니를 꾹 문 채로 중얼거렸다. 엘리제도 비슷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렇게 찰거머리처럼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줍어하지 말고. 내가 소개해 줄게.”
황태자는 질색하는 기색이 역력한 보랏빛 머리칼의 영애를 기어코 데리고 왔다.
“대공비, 이쪽은 카밀라 투리스야. 나와 아주 친한 사이지.”
엘리제의 미간에 살풋 금이 갔다. 카밀라 투리스라면 시에나의 사촌이 아닌가. 시에나에게 손을 대기 위해 이쪽을 포섭한 거라면 꽤 괜찮은 수작질이라 볼 수 있었다. 지금의 시에나는 백지와 같은 상태라 어느 색으로든 쉽게 물들 테니 말이다.
엘리제의 시선이 저를 향하자 카밀라는 쭈뼛거리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비전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반갑네, 투리스 영애. 나와 친해지고 싶다고?”
“네? 아, 저 그게….”
왜인지 카밀라는 블레이크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제는 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덥석 그녀의 손을 잡았다.
“친구가 생겨 좋군.”
카밀라는 생글생글 웃는 엘리제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친구가 없어서 곤란하던 차였거든. 남자들은 그들끼리 시간을 보내라 하고 우린 오붓하게 우정을 키워 보는 게 어떤가.”
렉스의 웃는 낯에 쩌억, 금이 갔다. 블레이크 역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엘리제와 카밀라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