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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스타킹에 감싸인 종아리와 허벅지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안쪽, 그녀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한 것의 정체를 블레이크는 바로 알아보았다.
“조심히 가지고 계셔야 해요. 아셨죠?”
‘안 그랬다간 제가 곤란해질 테니까요’라는 속삭임에 블레이크는 하마터면 컨트롤러를 손에서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잡아서 안쪽 주머니에 조심조심 넣어 두고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그걸, 착용했습니까.”
그녀의 말대로 컨트롤러를 잘못 간수했다가는 며칠 전 자신이 겪었던 일을 엘리제가 똑같이 겪게 될 것이다. 그것도 제도의 모든 귀족이 모인 대연회장 한가운데서.
“증표예요.”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제가 드레스 자락을 단정히 정돈하고는 그의 무릎에 살짝 걸터앉았다.
“혹시 오늘 제가 당신 외의 누군가와 대화하거나 춤을 추게 될지라도 나는 당신 거예요.”
“엘리제….”
“당신이 날 기쁘게 해 주었듯 나도 당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어요.”
블레이크는 엘리제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댔다.
연회에 참석하며 스스로 정조대를 착용하고 열쇠를 맡기는 것의 의미를 어찌 모르겠는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연회고 뭐고 지금 당장 돌아가 온밤을 지새워 그녀를 안고 싶었다.
“제가 실수한 건가요?”
그의 침묵에 엘리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얼 착용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녀가 저를 그토록 생각해 주었다는 것이 기뻤다. 황제의 위를 거머쥐어 온 세상을 손에 넣어도 이토록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 한 조각이 그에겐 몇 배나 더 소중했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블레이크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평온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사슴처럼 우아한 그녀의 목 안쪽, 톡톡 빠르게 뛰는 맥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자 엘리제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이 마치 겁 많은 초식동물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등을 다정히 쓸어내리며 그가 말했다.
“엘리제, 나는 설명서를 모두 숙지했습니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몰라 엘리제는 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동자가 커다래진 건, 그가 안주머니에서 컨트롤러를 꺼냈을 때였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가 여러 개의 버튼 중 하나를 눌렀다.
“아…!”
아래쪽으로 무언가 스며드는 느낌에 엘리제는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이 정도라면 긴장을 푸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안쪽 깊은 곳까지 기어들어 와 틈 없이 빠듯하게 들어찬 그것은 젤리같이 말랑하며 뜨끈했다. 그것이 일으킨 미세한 진동에 엘리제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반응하여 몸이 울컥 애액을 쏟았다.
“윽, 블레이크….”
엘리제는 움찔대는 입구를 조이며 다리를 오므리려 애썼다. 구멍만 간신히 막고 있는 정조대 밖으로 밀액이 샐까 봐 걱정됐다. 그리되면 막아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를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리고 말 것이다.
그녀의 불안감을 눈치챘는지 블레이크가 드레스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단단해진 천에 감싸인 그녀의 아래를 손가락으로 스윽 훑었다.
“흘릴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밖으로는 새지 않으니까요.”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과 귓불에 입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싫습니까?”
엘리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불편하지도,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도 아니라서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했다. 본래 성인용 장난감의 용도란 그런 거 아니겠는가.
“불편하면 언제든 얘기하십시오. 멈추거나, 아니면….”
그의 새파란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더 기분 좋게 해줄 테니.”
아찔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엘리제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서열이 낮은 하급 귀족들이 대부분 그렇듯 카밀라와 시에나는 일찍부터 연회장에 와 있었다. 함께 온 자작 내외가 사업 파트너들을 찾아다니며 대화하느라 바빴기에 시에나는 카밀라를 졸졸 따라다녔다.
쾌활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카밀라는 친구가 많았다. 가만히 있어도 또래 영애들이 몰려들어 말을 건넸다.
간혹 카밀라와 함께 있는 시에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으나 인사를 몇 마디 주고받은 후엔 신경 쓰지 않았다. 백작가라고는 해도 중앙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가문의 영애라면 굳이 친해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그녀가 꿈꿔 왔던 드레스를 걸쳤지만, 제도의 사교계는 상상했던 것과 너무도 달랐다. 싸늘하고 냉정했다. 진정한 우정을 꿈꾸는 소녀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를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영식들이 없지 않았지만, 다가와 말을 걸진 않았다. 그들 또한 그녀의 가문을 추측하며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연회가 무르익은 후 가볍게 놀아 봐야겠다 마음먹고 있거나.
시간이 흐를수록 깎여 나가는 자존감에 시에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시에나는 입을 다문 채 카밀라 곁에 서서 그녀와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나저나 아쉽게 되었어요.”
“응? 뭐가 말이에요?”
“‘보물찾기’가 흐지부지돼서요. 그러지 않았다면 새롭게 맺어진 커플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오늘 하루 몹시도 즐거웠을 텐데 말이에요.”
“아아, 맞아요. 그날 파트너를 찾지 못하셨으니, 황태자 전하께선 오늘도 황후 폐하와 함께 입장하시겠죠?”
호기심을 머금은 시선들이 카밀라를 향했다. 이에 화답하듯 카밀라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오늘도 전하는 모두의 것이죠.”
그녀의 농담 섞인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모인 이들 중 카밀라와 황태자가 친밀한 사이임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애인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니 눈치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클랜튼 경도 혼자네요.”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찬란한 금발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네프러스 기사단의 부단장 루카스 클랜튼.
그는 시에나조차 이름을 알 만큼 유명한 미남이요, 기사였다. 흰색 예복을 갖춰 입은 그는 오늘따라 유독 멋있고 근사했다.
영애들은 한참이나 침묵한 채 그를 바라봤다.
“저분은 늘 혼자였죠.”
그러다 누구 하나 입을 열자 너나 할 것 없이 소곤댔다.
“가여운 분.”
“요즘은 거의 프로이젠에 머무신다죠?”
“그런 사정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상한 소문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거예요.”
“클랜튼 후작 내외도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면서요?”
“학대를 방조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아니면 어떻게 사용인들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겠어요.”
시에나는 그들이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후작 내외의 무관심 속에 어린 시절부터 곰팡이 난 빵만 얻어먹으며 자랐다는 것이다. 의붓동생인 엘리제는 사정이 더욱 심해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결혼식 직전까지 갇혀 있었단다.
의붓아들은 그렇다 치고 친딸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후작가의 사용인들이 법정에서 모두 한목소리로 증언했다는 걸 보면 틀림없는 진실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드디어 클랜튼 영애를 볼 수 있겠네요.”
“이젠 클랜튼 영애가 아니라 프로이젠 대공비죠.”
“저는 대공님도 한번도 뵌 적이 없어요.”
“저도요.”
다들 대공이 어떤 남자일지에 대해 떠드는 중에 카밀라가 중얼거렸다.
“최악의 남편이지.”
작은 목소리였으나 바로 곁에 있던 시에나는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소린가 되물으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모두 반사적으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은 걸 보면 황가의 일원이 입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시선이 집중될 존재라면 누구일지 뻔했다.
건장한 체격에 검푸른 예복을 걸친 프로이젠의 젊은 군주, 블레이크 프로이젠. 그리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장내에 들어선 이는 대공비 엘리제 프로이젠일 것이다.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대공은 놀랄 만큼 잘생겼으나, 시에나는 그보다는 대공비에게 시선이 갔다.
땋아서 틀어 올린 그녀의 머리 위엔 비의 신분을 상징하는 은빛 관이 반짝이고 있었다. 자주색 드레스에 휘감긴 몸은 가녀렸으나 꼿꼿한 자세와 우아한 걸음걸이로 인해 연약해 보이지 않았다.
엘리제 프로이젠은 처음부터 고귀하게 태어난 이 같았다. 눈빛과 미소에 타인을 압도하는 힘이 서려 있었다. 매혹적이고 신비로웠다.
그녀가 제 또래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눈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다는 건 뒤늦게 깨달았을 정도다. 그만큼 시에나는 엘리제 프로이젠에게 홀렸다.
“카밀라.”
멍하니 엘리제를 바라보며 시에나가 제 사촌을 불렀다.
“제도에 있는 동안 내가 저분과 친해질 수 있을까?”
“어려울걸. 넘어야 할 산이 아주 험준해서.”
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카밀라의 답변은 지극히 냉소적이었다.
“넘어야 할 산?”
“저 겉보기만 멀쩡한 대공 전하께서 지독한 애처가거든. 누가 아내에게 접근하려 들면 맹수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을지도 몰라.”
시에나는 숨죽여 웃었다.
“농담이지?”
“그랬으면 좋겠다.”
직후 시종장의 외침과 함께 황가 일원들이 입장하였기에 시에나와 카밀라는 더는 대화를 이어 갈 수 없었다.
사교 행사에 참석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는 2황자까지 모습을 드러낸 탓에 모두들 소곤대느라 바빴으나 시에나의 시선은 여전히 엘리제에게 못 박혀 있었다.
단상에 오른 황후가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한 황제를 대신하여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할 동안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녀는 넋을 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엘리제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연보라색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미소가 어쩐지 저를 향한 것 같았다. 착각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
주인공의 등장에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황후는 오늘의 주인공인 첫째 아들을 위해 몇몇 이들과 인사만 나누고서 자리를 떴다.
엘리제도 황후와 인사를 나눈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후일 황후궁에 초대하겠다는 약속까지 하고서야 황후는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대공비가 마음에 드셨나 보군. 내 어머니께서.”
웃는 낯으로 다가온 황태자에게 블레이크와 엘리제는 예를 취했다.
“적적하신 모양이니 가끔 입궁하여 어머니의 말 상대가 되어 주면 좋겠어.”
블레이크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엘리제의 의사가 중요한 일이기에 뭐라 참견하지 못했다.
“폐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그리해야지요.”
마법을 꾸준히 배우려면 입궁할 핑곗거리가 필요했기에 엘리제는 그리하겠다 약조했다. 황태자가 그녀에게 뭐라 더 말을 걸려고 입을 열 때였다.
“형님.”
2황자 에릭 러셀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황태자의 주황빛 감도는 금안이 스륵 미끄러져 동생을 향했다.
“형님께서 첫 춤을 추시길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
그는 지긋이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래진 눈동자에 탐욕이 그득했다.
‘뭘 봐, 이 악마 놈아.’
태연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마주 바라보며 엘리제는 눈빛으로 말했다. 관심 끄고 빨리 꺼지라고. 물론 눈빛으로 건네는 그녀의 말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었으나, 엘리제와 달리 안팎으로 온건치 못한 이가 한 걸음 나서며 황태자의 시야를 차단했다.
“용건이 없으시면 이제 아내와 함께 연회를 즐기고 싶습니다만.”
“용건이 없는 건 아니네, 대공. 내가 첫 춤의 영광을 그대의….”
“황궁에 개가 있는 건 몰랐군요. 어디서 개소리가.”
황태자의 말허리를 단호하게 자르고서 블레이크는 무섭도록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한마디만 더 했다간 황태자고 뭐고 걷어차 버릴 기세였다.
“역시 다리를 부러뜨렸어야.”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몹시도 낮았으나 가까이 서 있던 렉스까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