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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서 내린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웃는 낯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카밀라는 이미 그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저택 사용인들의 이목이 있는데 저래도 되는 걸까 싶어 시에나는 당황한 얼굴로 남자와 카밀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얘, 어서 인사드려. 황태자 전하셔.”
“뭐?”
깜짝 놀란 시에나가 황급히 예를 취했다.
“안녕하세요, 전하. 시에나 라우디아예요.”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렉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카밀라, 이러기야? 귀띔 정도는 해뒀어야지.”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죠. 우리 시에나는 순진해서 귀엽단 말이에요”
“그런 의도라면 성공한 것 같긴 하구나.”
한 걸음 다가선 그가 시에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으니 얼굴을 보여 주렴.”
시에나는 흠칫 놀라 숙였던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주황빛이 감도는 그의 금안이 반짝였다. 관찰하듯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호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아무래도 우린 좀 더 친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화사하게 웃으며 말하는 황태자를 시에나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토록 예쁘게 생긴 남자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그림책 속의 천사나 요정 같았다.
시에나의 어깨를 짚었던 손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졌다. 등줄기를 느릿하게 훑더니 허리를 감싼다. 그 은밀한 손짓에 시에나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카밀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
결국 시에나는 그에게 반쯤 끌어안긴 채 저택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블레이크는 전에 약속했던 대련 얘기를 꺼냈다. 가볍게 몸이나 풀자는 그의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승부를 내지 못한 채 한 시간째 대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제국 내에서 손꼽히게 출중했고 둘 중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블레이크와 루카스 모두 상대를 이길 마음이 없다는 데 있었다.
블레이크는 루카스에게 프로이젠 세 개 기사단을 통솔하는 자리를 제안할 계획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그의 마음이 혹하여 이적하리라 짐작한 것이다. 그리 되려면 아무래도 루카스가 그를 이기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루카스는 도통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틈을 주어도 파고들질 않았다.
서로의 실력이 비등한 상황에 그런 짓을 벌이는 건 블레이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클로드를 포함한 프로이젠 기사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틈을 가까스로 한 번씩 만들어낼 뿐인데, 통하질 않았다. 힐긋 쳐다보는 걸 보면 그곳이 빈틈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한데도 그랬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 대련을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루카스 역시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과거 엘리제에게 약조했었다. 블레이크와 대련을 하게 되면 아슬아슬하게 져주기로.
어차피 진짜 루카스 클랜튼은 2황자 에릭 러셀의 몸을 차지했다. 이를 확인한 마당에 굳이 블레이크를 몰아붙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요원의 힘을 사용하지 않은 채 본래 원작 남자 주인공이 가진 역량만으로 블레이크를 상대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승부를 끝낼 만한 지점이 도통 보이질 않았다. 블레이크가 틈을 내주는 게 보였으나, 이기는 게 목표가 아닌 상황에선 못 본 척 넘길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사정 탓에 아무도 이길 수 없는 대련은 그래서 끝나질 않았다. 지켜보고 있는 기사들이야 둘의 놀라운 무위에 입을 다물지 못했으나 당사자들은 애가 탔다.
지하연무장의 특성상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났음은 확실했다. 온종일 빵 몇 조각과 풀떼기만 먹은 엘리제가 배가 고파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그렇게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연무장 문이 빼꼼 열렸다.
치열한 대련 중에 시선을 돌리면 패하는 게 당연하건만 블레이크와 루카스 모두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연무장에 들어온 건 엘리제였다. 대련이 어찌 되어 가나 궁금하여 보러 온 듯했다.
블레이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계획이고 뭐고 엘리제 앞에서 루카스에게 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는 여태까지와 다르게 온 힘을 다하여 검을 휘둘렀다. 엘리제에게 시선이 팔렸던 루카스도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얼떨결에 힘을 가했다. 선명한 두 개의 검기가 거세게 부딪혀 폭발했다.
콰광-!
한순간 귀가 먹을 정도의 굉음이었다.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은 광풍이 장내를 휩쓸었으나 바트와 클로드의 재빠른 보호 덕에 엘리제는 바람 한 점 맞지 않았다.
사위가 고요해진 후, 엘리제는 저를 감싼 두 기사를 밀어냈다. 각기 반대쪽 벽에 처박힌 블레이크와 루카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동요했으나 어디로 달려가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블레이크!”
엘리제는 곧장 블레이크에게 달려갔다. 몸을 일으키려던 블레이크는 그녀가 저를 부르며 달려오자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는 그녀를 보고 있으려니 미안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가슴이 뿌듯할 정도의 만족감이 차올라, 입꼬리를 단단히 붙들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헤벌쭉 웃어 버리고 말 것이다.
“괜찮습니다, 엘리제.”
부러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블레이크는 저를 안은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걱정 시켜 미안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게 그만.”
“당신이 다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다시는 무리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가련한 척하며 엘리제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는 대공의 모습에 기사들은 입을 턱 벌리고 굳어 버렸다. 저게 정말 ‘그’ 프로이젠 대공이 맞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엘리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행복해하는 동안 루카스는 홀로 몸을 일으켰다.
엘리제의 선택은 당연한 거였다. 블레이크를 향한 그녀의 모든 행동이 성공적인 임무 완수를 위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그런데도 블레이크에게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반사적으로 힘을 끌어 올려 방어하지 않았다면 더 심하게 다친 건 자신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랬다면 엘리제가 제게 와주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뇌리에 맴돌았다.
그도 그녀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블레이크에게 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긴 것도 아니니 약속은 지킨 셈 아닌가. 그러니 그녀가 저를 칭찬해 줬으면 했다. 팔이든 어깨든 토닥여 주며 수고했다 말하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을 때 못지않게 가슴이 뿌듯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아도 엘리제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대련용 스틸레토의 검날에 쩌저적, 금이 갔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순간 수십 조각으로 부서져 바닥에 흩어졌다.
수상한 소음에 루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린 기사들이 경악하든 말든 그는 홀로 연무장을 나갔다. 그의 어깨가 평소보다 처져 있는 걸 눈치챈 건 블레이크를 포함한 몇 명뿐이었다.
***
이틀간에 걸친 황태자 생신 연회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첫째 날은 황실의 혈통과 그들의 초대를 받은 소수의 귀족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둘째 날은 제국 귀족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첫째 날에도 초대받았으나 엘리제는 참석하지 않았다. 렉스는 그렇다 치고 2황자 에릭 러셀을 보기가 영 껄끄러웠다.
어차피 그녀에게 중요한 건 시에나가 등장하는 마지막 연회였다. 굳이 불편한 자리에 참석할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 블레이크는 그녀의 뜻을 존중하여 마지막 연회에만 참석하겠다고 회신했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잘 할 수 있죠?”
루카스가 맨 크라바트의 모양을 예쁘게 잡아 주며 엘리제가 물었다.
“…그래야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힘 좀 내요.”
어젠 입궁하여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더니 오늘도 내내 이 모양이다.
“실수할까 봐 걱정돼요?”
“그런 게 아니다.”
루카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요?”
그녀의 거듭된 질문에도 그는 답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엘리제가 그의 등을 가만히 도닥여 주었다.
“다 잘될 거예요. 이제까지 최선을 다했잖아요. 처음에 비하면 연기 실력도 놀랄 만큼 늘었고요.”
허공을 헤매던 그의 시선이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사실 그녀의 기준에선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게 그거였으나, 연기에는 자신감이 특히 중요한 법이다. 엘리제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어둡기만 하던 그의 녹안에 슬며시 빛이 깃들었다.
“나한테 했던 것만큼만 하면 시에나도 당신에게 반해 버릴 거예요. 잘생겼지, 성격 좋지, 능력 출중하지. 우리 요원님 완벽하네, 완벽해.”
“그 정도는 아니다.”
그리 답하면서도 루카스의 표정은 환해졌다. 물론 다른 이들 눈에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보이겠지만 엘리제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 연회장에서 만나요. 자리 선점 잘하고요.”
네프러스의 부단장인 루카스는 먼저 입궁하여 연회장의 안전을 점검해야 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래.”
방을 나가기 직전,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춰 선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머뭇거리며 묻는다.
“엘리제, 오늘… 시에나 라우디아와 춤을 추는 장면이 끝나면 나는 뭘 하지?”
“글쎄요? 뭘 하고 싶은데요?”
어차피 그 장면 이후엔 시에나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여러 영식의 춤 신청에 정신없이 바빠지기 때문에 루카스는 무엇을 하든 자유였다.
“너에게 춤을 청해도 되나?”
그의 말에 엘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싶어요?”
“기회가 있을 때 좀 더 몸에 익히고 싶다. 춤은 영 어려워서.”
“하긴, 연회에 참석할 일이 몇 번 더 있으니까. 그렇게 해요, 그럼.”
늘 한쪽만 삐딱하게 올라가던 그의 입꼬리가 어쩐 일로 공평하게 올라갔다. 그의 그린 듯한 미소에 엘리제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갈게. 이따 봐.”
목소리와 말투마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부드러웠다. 놀란 엘리제를 뒤로하고 그는 방을 나갔다.
“와…. 나 연기 학원 차려도 성공했겠는데.”
홀로 중얼댄 엘리제는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슬슬 그녀 역시 치장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쁜지, 블레이크는 해가 저물기 직전에야 저택에 돌아왔다. 워낙 잘난 외모인지라 예복을 갖춰 입고 머리 손질만 조금 했음에도 정신을 쏙 빼놓고 쳐다볼 만큼 근사했다.
프로이젠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에 엘리제를 올려준 그가 뒤따라올라 맞은편에 앉았다. 이미 밖은 어둑해져, 환하게 불을 밝힌 황궁이 유독 화려해 보였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블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하는 건 처음이군요.”
“그러게요. 조금 떨리네요. 사교 행사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어서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있지 않습니까.”
엘리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네. 당신만 믿을게요.”
블레이크 역시 그런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블레이크, 저를 위해 이것 좀 맡아 주시겠어요?”
엘리제가 내내 쥐고 있던 것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제 손에 쥐여진 것을 확인하자 블레이크의 동공이 와르르 흔들렸다.
“엘리제, 이건….”
곧바로 그의 시선이 그녀의 그곳을 향했다. 수줍게 웃으며 엘리제가 슬쩍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