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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의상실이라기보다는 귀족가의 살롱처럼 꾸며진 내부 전경에 시에나의 입이 턱 벌어졌다. 라우디아에 비하면 훨씬 풍족한 편인 투리스 자작가의 타운하우스에도 이러한 공간은 없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주는 붉은색 벽지와 태피스트리는 물론이거니와 공간 곳곳에 장식된 그림과 조각상은 뛰어난 예술적 가치를 지닌 듯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정중한 인사에 시에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반백의 머리칼을 멋들어지게 빗어 넘긴 40대 중후반 정도의 신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사라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상담실장 피터 갤로그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딱히 살 것이 있는 건 아닌데 구경하고 싶어서 들렀어요. 괜찮을까요?”
“당연합니다. 얼마든지 둘러보십시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쪽에 전시된 색색의 천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눈 밑에 작은 점이 있는 똑똑한 인상의 청년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영애, 다과를 대접하려 하는데 혹시 어떤 종류의 케이크를 좋아하시나요?”
“세상에, 케이크요?”
구경하러 온 손님에게 차와 케이크를 대접하겠다니. 이것이 제도의 인심일까?
“네. 너무 많아서요.”
어쩐지 청년은 다소 질린 표정이었다.
“저는 아무거나 좋아요. 감사해요.”
거절하자니 종일 먹은 게 없어 배가 고팠다. 그녀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곤 피터에게 다가갔다. 피터가 그에게 몇 마디를 속삭이자 고개를 끄덕이곤 어딘가로 향해 가더니 오래지 않아 쟁반 가득 다과를 가져왔다.
“많이 드십시오.”
보통은 ‘많이’가 아니라 ‘맛있게’라고 하지 않나? 속으로 생각하며 시에나는 그가 가지고 온 차와 케이크들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냐 묻는 순간 떠올렸던 것들이 모조리 거기에 있었다.
‘이게 무슨 호사람? 너무 좋아!’
함박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시에나의 인사에 청년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피터의 곁으로 돌아갔다.
‘어제 카밀라가 사온 케이크랑 맛이 비슷하네. 제도에서 제일 유명한 케이크 가게에서 사온 거라고 했는데.’
그 ‘제도에서 제일 유명한 케이크 가게’가 하룻밤 만에 이 건물 2층으로 이사했다는 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달콤한 디저트들을 먹다 보니 하루의 피로감이 점차 사라졌다. 새콤달콤한 산딸기 무스 케이크를 포크로 듬뿍 떠 입에 넣으며 시에나는 생각했다.
‘내가 영지에서 가져온 드레스와 제도의 유행이 너무 달라. 당장 내일부터 연회인데 어쩌면 좋지. 수선해서 입을 순 없을까.’
자신이 챙겨온 드레스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시에나는 어떻게 손을 봐야 그럭저럭 봐줄만 해질지 열심히 구상했다.
‘수선을 맡길 의상실을 찾는 것도 문제야. 이런 곳은 비용이 만만치 않겠지? 어쩌면 한 벌 맞추는 값에 필적할지도 몰라.’
새삼 다시 한번 내부를 둘러보던 시에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부지런히 무언가를 적고 있던 피터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손님?”
이런 고급스러운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라면 콧대 높을 법도 한데, 피터는 몹시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에 용기를 얻은 시에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타 의상실에서 맞춘 드레스도 수선이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저희는 고객님의 필요를 최우선으로 하여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다소 부족함이 있는 드레스라 할지라도 조금만 손보면 유행을 선도할 멋진 드레스로 거듭날 수 있지요.”
“그렇…겠지요?”
“원하신다면 처음 한 벌은 무료로 리폼해 드릴 수 있습니다.”
“네에?”
시에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재료값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어떻게 그걸 무료로 해준단 말인가.
“드레스 한 벌을 맞추는 데 드는 비용에 비하면 리폼은 저렴한 편에 속합니다. 고객님과의 장기적 신뢰 관계 형성을 위해 그 정도 서비스는 충분히 제공할 수 있습니다.”
시에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피터의 말을 들었다.
“그, 그러면 일단 한 벌, 부탁드리고 싶은데...”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오늘 중으로 사람을 보낼 테니 드레스를 보내주시는 것으로 하고, 그럼 어떤 드레스를 어떻게 수선할지 함께 상의해 볼까요?”
“네, 실장님. 잘 부탁드려요.”
홀린 듯 대답하는 시에나를 보며 피터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잘 돼 가고 있는 것 같죠?”
시에나가 가게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엘리제는 피팅룸에 숨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생전의 엘리제처럼 검은 머리칼과 고동색 눈을 가진 시에나는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답게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다소 수수한 차림새에 화장 또한 하지 않아 눈에 띄지 않지만, 본격적으로 꾸미면 파티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네가 세운 계획인데 당연히 잘 되겠지.”
엘리제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피팅룸까지 따라 들어와선 내내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루카스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왜?”
“곧 당신과 춤도 추고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할 여자가 나타났는데 관심 좀 가져 봐요.”
“알았다.”
보지도 않으면서 알긴 뭘 알아, 속으로 투덜대며 엘리제는 다시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 루카스가 시에나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버리지 않을까 기대한 게 무색했다.
잘 좀 보라는 말에 ‘인상착의는 제대로 확인했다’는 속 터지는 말을 내뱉더니 계속 저러고 있다.
‘할 수 없지. 저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어.’
겪어 보고도 쓸데없이 기대를 한 저 자신이 멍청했다. 그래도 바깥 상황은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피터의 특수능력은 상대의 생각을 듣는 것이다. 만능은 아니라서 목표로 한 대상이 생각을 숨기고자 마음먹으면 듣는 게 불가했다.
실험해 본 바에 의하면 피터는 엘리제가 작정하고 숨긴 생각들은 하나도 읽지 못했고 거짓으로 흘린 생각을 진짜와 분간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통 속내를 그렇게 철저히 숨기고 사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기에 엘리제는 그의 능력을 토대로 이번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시에나는 제3의 빙의자가 아닌 이 세계의 주인공이 맞았다. 지도상의 밝게 빛나는 금빛 점이 이를 증명했다. 원작에서처럼 솔직하고 순박할 것이다.
일단은 시에나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녀가 원하는 드레스의 정보를 구체적으로 모은다. 그리고 그렇게 끌어 모은 정보를 토대로 쿤이 도안을 그린다. 옷의 형태를 한 아이템을 개발해본 적 있는 쿤이기에 무리 없이 즉석에서 스케치할 수 있었다.
그런 연후 정해진 옷감과 도안을 이용하여 재봉사들에게 제작을 맡기는 것이다.
물론 제작에 들어가기 전 엘리제가 한번 더 도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세련된 그녀의 안목이 더해지면 최소한 다른 의상실에서 내놓는 드레스에 뒤쳐지진 않을 것이다.
이 계획의 핵심은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거야!’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그래야만 시에나가 계속해서 ‘사라의 의상실’을 찾지 않겠는가.
“바로 그거예요! 어쩜 이렇게 제 마음을 잘 아시는지!”
시에나의 기뻐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임기응변일 뿐이지만 어떻게든 당장의 고비는 넘기게 됐다. 사라를 찾아오겠다는 메리를 보내준 게 과연 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찾지 못하더라도 닷새 안에 돌아오기로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대강 일이 마무리되어 가는 모습에 엘리제는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너무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더니 허벅지가 당겼다.
“조심해.”
기우뚱 기울어지는 몸을 루카스가 재빨리 잡아 주었다. 오랜 시간 피가 통하지 않았던 다리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말을 듣지 않았다.
“고마워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밖으로 넘어지기라도 했으면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팽개치듯 바로 놓을 거란 예상과 다르게 루카스는 그녀를 뒤에서 안고서 가만히 있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젖혀 그를 쳐다보았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아무 장애물도 없는 곳에서 뒤로 넘어갈 수 있는지 궁금하군.”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거라는 걸 알기에 엘리제는 기분 상해하지 않고 대꾸했다.
“다리가 저리면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이왕 도와준 거 저기 소파에 좀 데려다줘요.”
업히라는 듯 루카스가 등을 가져다 대자 엘리제가 찰싹 때리고서 말했다.
“드레스 입은 여자를 옮길 땐 업지 말고 안아요. 공주님 안기도 몰라요? 여자들이 환장한다고요.”
“넌 공주가 아니다. 이 세계에 공주의 지위를 가진 자는 한 명도 없지.”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어쨌든 엘리제는 루카스를 열심히 가르쳐 어색하지 않은 자세로 안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아, 내려놓을 때 던지지 말아요.”
소파에 다다라 그녀를 내려놓으려던 루카스의 자세가 어정쩡하게 굳었다.
“엉덩이부터 닿게 천천히 내리고 무릎 아래를 받친 팔은 마지막으로 빼요.”
그녀의 말대로 루카스는 엘리제를 소파에 안전하게 내려주었다.
“시에나가 혹시 방금 전의 나처럼 비틀거리면 이렇게 안아 줘요. 엄청 좋아할 테니까. 그러다가 분위기가 되면 키스든 뭐든 저질러 버리고요. 기회는 놓치는 게 아니에요. 알겠죠?”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엘리제가 그에게 조언했다.
“명심하지.”
대답하며 그녀의 무릎 아래에서 팔을 빼려 할 때였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코끝이 스치듯 닿았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엘리제의 표정을 확인하려 한 거였는데, 생각보다 그녀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커다래진 그녀의 연보랏빛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따스한 숨결이 닿고, 달콤한 체향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 몹시도 여러 번 핥고 빨며 맛보았던 그녀의 입술과 혀의 감촉이 생각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기회는 놓치는 게 아니랬다. 분위기가 되면 키스든 뭐든 저질러 버리라던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는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채였다. 놀라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고 구애하듯 그녀의 것에 치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면서도 엘리제는 일단 그의 입맞춤에 응해 주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연습 시간도 아니고 딱히 뭔가 양해를 구한 것도 아니다.
‘내가 한 말을 오해했나? 나한테 저지르라는 게 아닌데.’
떠올려 보아도 그것 외엔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그녀를 탐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안겨 오면서 두르고 있던 팔을 아직 떼지 않았기에, 여전히 그녀의 손은 루카스의 목에 감겨 있었다. 손가락 끝에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닿았다.
시에나가 생전의 엘리제처럼 검은 머리칼에 고동색 눈을 가졌듯 루카스 역시 카인처럼 찬란한 금발과 녹색 눈동자를 가졌다.
전혀 다른 두 사람임에도 어쩐지 그가 생각나 기분이 묘해졌다. 카인의 머리칼과 감촉까지 비슷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머리 흐트러뜨리는 걸 질색했으나, 그래서 더 마구잡이로 헤집어 놓길 즐겼다.
‘카인 리베르토. 넌 일이 이리될 줄 알았을까.’
만약 건강했더라면. 적어도 몇 년만 더 멀쩡히 살 수 있었더라면. 이제껏 루카스와 했던 모든 연습들을 카인과 했을 것이다.
몸치라고 놀려 가며 춤 연습을 하고, 키스를 어떻게 할지 옥신각신하다가 도움이 될 영화를 밤새워 봤을 것이다. 섹스 신 연습 땐 민망함에 도리어 뻔뻔한 농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얄미우면서도 친했고, 지긋지긋하면서도 소중했다. 죽음을 앞두고서 누구 하나 곁에 남은 이 없을 때, 여행 가자는 그의 손을 잡았던 걸 후회해야 할까 후회하지 말아야 할까.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를 냉담히 돌려보내고 홀로 남을 수 있을까. 온갖 패스트푸드를 시켜먹다 고통 속에서 눈을 감는 걸 택할 수 있을까.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언제나 이기적인 선택만 해온 그녀라면, 그놈 따위 잊는 게 어울림을. 지옥에 떨어지든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가든 꼴좋다 비웃는 것으로 끝내야 함을.
그런데도 기어코 한번 더 그를 만나고 싶은 이유를, 지금 당장은 생각하기 싫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