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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으면, 빼앗기는 건 순식간이니까.”
그가 알기로 프로이젠의 군주는 단 한 번도 좌절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무너진 적도, 빼앗긴 적도 없었다. 잠깐 빼앗기더라도 얼마 되지 않아 기어코 몇 배로 돌려받았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모르는 시기에 정말로 그가 소중한 것을 빼앗겼던 건지, 아니면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 덕에 철혈의 칭호를 얻은 건지.
어느 쪽이 되었든 존경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클로드는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눈을 빛냈고 그런 그를 잠시간 응시하던 블레이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마차는 타운하우스에 접어들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밤임에도 블레이크는 단번에 엘리제의 침실을 찾아 눈에 담았다. 테라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빛을 보아하니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를 확인하자 그의 얼굴은 대번 환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호신용으로 산 마법 아이템은 오늘 당장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잠을 잘 때나 씻을 때, 식사를 할 때나 산책을 할 때도 늘 착용하길 바랐다.
제도에서 그녀에게 안전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종일 같이 있어 주지 못하는 그를 대신하여 그녀를 지켜줄 안전장치는 많을수록 좋았다.
마차에서 내려 멜릭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블레이크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클로드도 마법 아이템이 든 가방을 소중히 끌어안고 서둘러 그를 쫓았다.
“주군.”
3층 복도에 다다르자 엘리제의 침실 앞을 지키던 바트 루오스가 예를 취했다. 클로드가 의아한 듯 물었다.
“바트? 오늘 비전하의 호위는 앨런 차례 아닌가?”
“앨런에게 급한 일이 생겨 순서를 바꿨습니다.”
그리 답하는 그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비전하를 안전히 모시는 일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호위에 공백이 있으면 안 되니 앞으로는 미리 보고하도록.”
“네, 단장. 송구합니다.”
침묵한 채 두 기사의 대화를 지켜보던 블레이크가 바트에게 물었다.
“별일 없었나?”
“비전하께서 의원을 부르신 일 외에는 특별히….”
“의원이라니, 설마…?”
어찌나 놀랐는지 블레이크는 노크도 잊고 다급히 그녀의 침실 문을 열어 젖혔다. 그 요란함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단번에 이쪽을 향했다. 바트의 말대로 엘리제의 침대 곁엔 가문의 주치의가 서 있었다.
***
촉, 하는 젖은 소리와 함께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엘리제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거듭된 입맞춤으로 그녀의 입술은 붉게 부풀어 있었다. 그건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젖어서 번들거리는 입술이 색정적으로 보였다.
“어때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녀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루카스가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그래. 이제 된 것 같다.”
“다행이네요. 슬슬 힘들었는데.”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체력이 소모될 수 있음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그만큼 루카스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한참이나 입맞춤을 이어 갔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살짝 충혈되기까지 한 녹안은 욕망에 잠식된 듯 보여, 상대가 누구든 착각할 만했다.
“오늘처럼만 해요.”
시에나 역시 그럴 것이다. 엘리제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노력해 보지.”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엘리제가 어깨를 주무르며 긴장으로 뻣뻣해진 몸을 풀었다.
“그럼 대충 급한 부분은 해결했고. 이제 한 가지 일만 더 마무리 지으면 되겠네요.”
사라의 실종으로 당장 내일부터 몹시 바빠질 예정이기에, 엘리제는 오늘 일과의 마지막 순서로 주치의를 불렀다. 블레이크는 물론이거니와 시녀장 케이트까지 그녀를 유리 인형처럼 대하는 걸 보니 내일의 외출이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외출에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블레이크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다만 완벽해서는 안 됐다. 그랬다간 블레이크가 루카스를 돌려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루카스가 그녀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좀 더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루카스, 나 좀 도와줄 수 있죠?”
“뭘 도와 달라는 거지? 설마….”
그의 얼굴이 불안감에 굳어졌다. 엘리제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그의 팔을 잡았다.
“저번처럼 피 토할 만큼은 말고요. 가벼운 위염 정도면 딱 적당할 것 같은데.”
“싫다.”
당연히 군말 없이 들어줄 줄 알았던 그가 거부하자 엘리제는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싫다고요?”
“말했잖나. 또 그런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다고.”
“어, 그럼 곤란한데….”
엘리제는 난처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그러든 말든 루카스는 절대 도와주지 않겠다는 듯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대로 의사를 만나면 안 되는데.”
그래 봤자 귀가 쫑긋거리는 게 엘리제의 눈엔 다 보였다. 그녀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럼 상한 음식을 먹어야겠다!”
“뭐?”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홱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전 몹시도 비실비실하니까 상한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배탈 날 거예요. 굳이 당신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죠.”
“…….”
“자, 그럼 주방에 가서….”
“잠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당연하죠. 며칠이나 앓아눕고 어쩌고 한 탓에 당신을 도울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요.”
언제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 다녀올게요.”
이대로 방을 나가려는 듯 걸음을 떼는 그녀를 그가 덥석 붙들었다.
“…가지 마. 그냥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못 먹을 음식을 먹는 괴로움을 그녀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느니 자신이 도와주는 편이 백번 낫다. 아주 조금만 힘을 쓰면 될 것이다.
“와아, 고마워요!”
환하게 웃으며 엘리제가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역시 우리 요원님이 최고라니까.”
루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는 네 몸을 좀 아낄 필요가 있다. 대체 왜 이렇게 함부로 다루는지 모르겠군.”
“뭐 어때요. 잠깐 쓰고 말 건데.”
“아무리 그래도 당장에 고통스러운 건 사실 아닌가.”
“그깟 게 별거라고. 그리고 이번엔 지난번처럼 아프게 하지 않을 거잖아요. 금방 당신이 고쳐 줄 테고.”
그렇게 해서 루카스는 그녀의 몸에 미약한 위염 증세를 일으켰다. 그 후, 일부러 시녀장 케이트와 메리까지 불러 모아 놓고 의원에게 진찰을 받은 것이다.
블레이크 역시 얘길 들어야 하기에 진찰이 끝나고도 엘리제는 이것저것 쓸데없는 것을 물으며 의원을 붙잡아 두었다.
다행히 블레이크는 오래지 않아 저택으로 돌아왔다. 엘리제의 방에 주치의가 와 있다는 소리에 놀랐는지 그는 노크도 없이 방 안에 뛰어 들어왔다.
의원을 밀치고 침대로 다가온 블레이크는 멀쩡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엘리제를 발견하고 눈을 끔뻑였다.
“오셨어요?”
엘리제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엘리제…? 괜찮습니까?”
“그럼요. 만약을 위해 진찰을 받은 것뿐이에요. 케이트가 하도 걱정을 해서요.”
“그랬…군요.”
블레이크의 시선이 이번에는 의원을 향했다.
만약 그가 있을 때 누군가 그녀를 위해 주치의를 부르려 했다면 허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제도의 의사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심지어 마음 한편으론 두렵기까지 했다. 엘리제가 위독하여 손 쓸 길이 없다는 말을 그날 몇 번이나 들었던가.
대공가의 주치의는 물론 의원들 모두 그의 분노에 도망치다시피 허겁지겁 저택을 떠났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치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묻지도 않은 그녀의 건강 상태를 줄줄 읊었다.
“놀랍게도 비전하께선 거의 쾌차하셨습니다.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아직 조심하시는 편이 좋겠지만, 순조로이 회복하고 계십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확실합니다.”
거의 애원하다시피 하여 루카스를 그녀 곁에 붙들어 뒀으면서도 그는 내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었다. 생명만 근근이 부지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한데 이토록 빠르게 병세가 나아지다니, 주치의 말대로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제 누워만 있을 필요 없대요.”
“네. 오히려 조금씩 움직이시는 편이 회복에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엘리제의 말을 의사가 거들어 주었다. 이에 그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를 위해 의원을 불렀으니 말이다.
“블레이크, 들었죠?”
생긋 웃으며 엘리제는 블레이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감격에 겨운 블레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내민 손을 가만히 쥐었다.
주치의는 지금의 건강에 도움이 될 만한 음식과 약차를 몇 가지 얘기해 준 뒤 먼저 방을 나갔다. 케이트와 메리 역시 방을 나가려다 멈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늦은 시각, 부부 침실의 외부인은 영 눈치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클랜튼 경…?”
케이트의 음성에 루카스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오늘 고마웠어요, 오라버니.”
어서 가라는 뜻이 담긴 엘리제의 인사에 그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쉬십시오.”
아무래도 엘리제를 치유하는 건 내일 해야 할 듯했다. 밤새 불편할 것이 걱정되었으나 의외로 그녀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그는 원래도 감정 없이 삭막한 얼굴을 한층 더 굳히고선 뒤돌아 나갔다.
대기 중이던 클로드가 마법 아이템이 든 가방을 안에 살짝 들여놓고선 문을 닫자, 방 안엔 엘리제와 블레이크만이 남았다.
“블레이크, 저건 뭐예요?”
의아한 표정으로 가방을 가리키는 엘리제에게 그가 답해 주었다.
“경매에 다녀온다 말했지요? 저 가방 안에 오늘 산 마법 아이템이 들어 있습니다.”
“와아, 그래요? 구경해도 되나요?”
미소 짓던 얼굴 그대로 그는 멈칫 굳어 버렸다.
“지금, 말입니까?”
“네. 너무 궁금해서요. 혹시 제가 봐서는 안 되는 것이 들어 있나요?”
엘리제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떠올린 블레이크의 동공이 와르르 흔들렸다.
엘리제가 수갑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외의 것들도 모두 좋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시간을 들여 하나씩 보여 주고 맘에 들어 하는 걸 사용해 보리라 생각했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모두 보여 줄 계획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순 없었다. 결국 그는 가방을 가지고와 오늘 산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자그마해 보이는 가방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상자들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가방도 마법 아이템인가 봐요.”
“그렇습니다. 짐마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무게를 담을 수 있으며 30가지 물품을 넣을 수 있는 마법 가방입니다.”
다이얼을 조작하여 1번부터 30번까지의 아이템을 소환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상자를 당겨 열어 본 엘리제의 얼굴이 웃는 낯 그대로 굳어졌다.
“블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