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보기
-61-





얼마 전에 한번 느껴 보았던 식욕과도 흡사한 욕망이었다. 머금으면, 그녀가 흘리는 향내를 잠시나마 제 것으로 삼아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답하고서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요. 천재네, 천재야.”







그러나 엘리제는 그런 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만큼만 하면 춤은 별문제 없겠어요. 연습한 대로만 해요.”







이미 그녀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약지의 반지를 톡톡 두드려 대본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그다음은 데이트 장면인데, 끝부분에 키스신이 있네요. 저번에 보니까 꽤 하던데, 이건 연습 안 해도 괜찮죠?”



“아니.”







루카스는 잘라 말했다.







“자신 없다. 기억도 안 나고.”



“어…. 그래요?”



“응. 연습이 필요해.”







뭔가 심장 어름에 불편감이 들었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모든 건 흉내요 연습이 아닌가.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기 위해선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긴 지난번 마차에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당신이 리드해야 하는 거니까 점검이 필요하긴 하겠네요.”







그가 그렇다면 정말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해도 되겠어요?”







그를 올려다보며 엘리제가 짓궂게 웃었다.







“새삼스러운 말이군. 네가 아니면 누구와 하지?”



“나랑 키스 몇 번 하고 나면 아주 중독될 텐데?”



“사람의 타액에는 중독 성분이 없다.”



“…하여간 농담이 안 통해.”







춤 연습이 끝난 후로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마주 서 있었기에 두 사람의 거리는 한 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헤매며 방황하는 그의 손을 그녀가 톡톡 두드렸다.







“그때처럼 멱살 잡으면 안 돼요.”



“그럼 어딜 잡지?”



“어깨나 등, 허리 정도에 살며시 올려놓는 정도가 좋겠네요. 뒷머리도 잡지 마요. 기껏 신경 써 꾸몄는데 헝클어지면 기분 상하니까.”



“알겠다. 주의하지.”







고민하던 그가 그녀의 등에 손바닥을 댔다.







“이렇게?”



“네, 좋아요. 각도 잘 맞추고.”







그녀의 말대로 고개를 기울인 그가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때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잘 하고 있어요. 부딪혀 아프지 않게. 지금처럼 부드럽게.”







루카스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녀가 닿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어딘가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새어 나오는 따스한 숨결이 그의 가슴을 조여들게 했다. 하지만 벅벅 긁어 해결될 것이 아님은 그조차도 잘 알았다.







“엘리제.”



“네?”



“다른 건 어떨지 모르겠지만, 입 맞추는 행위는 기분이 좋은 것 같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을 때, 루카스가 눈을 감고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생각했던 대로 그녀의 입술은 몹시도 부드러웠다. 촉촉하면서도 말랑하며 따스한 그것은 마땅히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진귀한 과실 같았다. 이를 새워 깨물면 톡 터져선 입 안에 사르르 스며들 것 같았다.







“…….”







하지만 그러면 큰일 아닌가.







그가 가만히 있자 엘리제도 가만히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입술만 맞대고 있을 셈인가 싶어 엘리제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도 곧바로 눈을 떴다.







결국 엘리제가 먼저 입술을 떼고서 물었다.







“첫 데이트 때 지금처럼 뽀뽀만 할 거예요?”







얼어붙은 채 답하지 않는 루카스를 보며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문상에도 ‘입 맞춘다’라고만 되어 있으니 그래도 상관없긴 한데. 원하는 대로 해요. 분위기 봐서 괜찮겠다 싶으면 진도를 더 나가고요.”







그제야 루카스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분위기? 그건 어떻게 파악하지?”



“뽀뽀했더니 입을 꾹 다물고 틈을 안 주면 거기서 끝내는 편이 나아요. 그런데 맞닿은 상태에서 상대가 입술을 벌리면, 진도 나가야죠. 더 해달라는 거거든요.”



“그렇군. 그럼 방금 넌 더 해달라는 거였군.”







분명 엘리제의 입술 사이에서 미약하게나마 숨결이 새어 나왔다.







“오, 맞아요. 눈치 빠른데요?”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엘리제가 그의 팔을 토닥였다.







“지난번처럼 혀까지 넣을 줄 알았지.”







그녀의 말에 루카스는 프로이젠 본성 앞, 마차 안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입맞춤을 떠올렸다. 짧은 전생 그리고 요원으로서의 삶을 통틀어 첫키스였다.







“그때는 네가 도와줬지 않나.”



“이번에도 도와줘요?”







루카스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일단 이번 한 번은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



“알겠어요. 몇 번 해보다 보면 금방 배우겠지.”



“맞아. 연습만이 답이다.”







엘리제의 등에 올렸던 손을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서 루카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숨 막히면 말해.”



“별걸 다 걱정하네.”







답하는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맞닿은 그의 몸이 어째 평소보다 뜨겁다고 생각하며 엘리제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











블레이크가 오늘 열리는 경매에 참여한 것은 엘리제를 위함이었다. 찾던 조건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호신용 마법 아이템이 이번 경매 목록에 예정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그녀를 안전히 보호하기 위해서는 호위 기사만으로 부족함을 그는 이번 일로 다시 한번 깨달았다.







‘되도록 내가 곁을 비우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으니.’







엘리제는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몇 번째든 좋으니 그녀의 애인이 되고 싶어 할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어 여태까지는 별문제 없었으나 이번 황태자 생신 연회 이후론 달라질 게 분명했다.







그녀가 그와의 신의를 지키고자 거절한다 할지라도, 지난번 황자에게 그랬듯 마음이 약해져 틈을 보이면 주제 모르고 달려들 짐승이 있을 터. 그러니 황태자가 준 팔찌와는 달리 알아차릴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호신용 마법 아이템이 필요했다.







‘그것’이 프로이젠 대공 손에 들어갔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기에 블레이크는 클로드만 대동한 채 비밀리에 경매에 참여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날 경매에 오른 아이템의 3분의 1가량을 혼자 쓸어 담은 상태가 되었다.







이번 경매엔 유독 마법 아이템이 많이 풀렸다. 그가 목표로 한 마법 아이템처럼 호신용 도구도 많았으나 주로 구매한 건 다른 용도의 마법 아이템들이었다. 수갑이 마음에 든다며 챙겨온 엘리제를 위해서였다.







그녀가 어떤 것을 좋아할지 몰라 나오는 족족 사 버렸다. 취향껏 선택하게 하면 될 것이다.







한편, 클로드는 그런 블레이크 곁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자신의 주군이 왜 저런 것들을 쓸어 담는지 그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호신용 물품들도 몇 개 있었지만 그 외엔 모두 성행위에 사용하는 보조 도구들이 아닌가.







철저히 변장한 채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온 제도에 프로이젠 대공의 성적 취향이 소문났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최 측에서 오늘의 VIP 손님인 블레이크를 위해 마법 가방을 선물로 증정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오늘 산 물건들을 눈에 띄지 않게 가져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것 역시 손님을 위한 저희의 특별 선물입니다.”







경매의 시연을 맡았던 가면 쓴 마법사가 들고 있던 상자를 열어 보였다.







“이건 뭐지?”







그것은 얼핏 보기에 남녀의 속옷처럼 보였다. 특별한 점이라면 상자 바닥이 비쳐 보일 정도로 얇고, 뭔가 은은한 광택이 표면을 타고 흐른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야한 속옷 정도인 줄 알았던 그것의 정체는 생각보다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은 커플 정조대입니다.”







잔뜩 목소리를 낮춘 마법사의 말에 블레이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필요 없을 것 같군.”



“혹시 정조대가 갖는 선입견 때문이라면 생각을 달리 해보시지요. 과거에는 파트너의 외도나 강간을 예방하기 위한 물품이었으나 지금은 엄연히 그 용도가 다릅니다.”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생각해 보십시오. 상호 동의하에 이 커플 정조대를 착용하는 순간, 아무리 성욕이 차올라도 해소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밤이 오기까지 어떻게든 참아야 하는 거지요. 자위조차 불가한 채로 말입니다. 그렇게 한계까지 참았다가 터뜨리는 순간의 쾌감을 무엇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가면 쓴 마법사는 그야말로 열변을 토했다.







“커플 정조대는 흔치 않지요. 게다가 이 아이템은 착용자를 욕망의 한계까지 몰아갈 다양한 기능이 탑재돼 있는 최신형입니다.”



“…….”



“파트너께선 분명 이것을 착용한 손님을 사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만.”







블레이크가 손을 들어 마법사의 입을 다물게 했다. 내버려 두었다가는 끝도 없이 떠들어 댈 것 같았다.







“알겠으니 더는 얘기할 필요 없다.”



“…그러시면.”



“굳이 성의를 무시할 필요는 없겠지.”







블레이크는 매우 자연스럽게 마법사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 클로드에게 건넸다. 클로드는 멍한 상태로 그에게 건네받은 상자를 마법 가방에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고객님들의 피드백을 받아 더 다양한 커스터마이징 제품을 개발할 예정이니 혹 필요하시면 상자 안에 적힌 주소로 방문해 주십시오.”







아무래도 고객 유치 차원에서 소수의 고객들에게 배포 중인 아이템인 듯했다.







“참고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는 환히 웃으며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용건을 마친 마법사의 안내에 따라 블레이크와 클로드는 경매장을 나섰다.







그들은 한참을 침묵한 채 걸었다. 경매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지지 않은 새까만 마차였다.







귀한 것을 들고 있는 만큼 클로드도 블레이크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저, 주군.”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마차가 출발한 직후였다.







“뭐지?”







블레이크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클로드는 말을 잇기 위해 모든 용기를 끌어 모아야 했다.







“주군과 비전하께선 귀족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서로에게 각별해 보이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마법 도구들이 필요한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장이라 할지라도 한낱 기사에 불과한 그가 주군에게 할 법한 질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블레이크의 진노를 살 수도 있는 도 넘은 참견이었다. 그런데도 클로드가 용기를 낸 것은 어디까지나 대공 부부를 위함이었다. 그들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이를 아는지 블레이크는 화내지 않았다.







“경은 아직 배우자가 없지.”



“네.”



“그렇다면 검을 예로 들어 말해 볼까.”







오히려 자신의 충성스러운 기사를 위해 예까지 들어 가며 답을 들려주었다.







“오늘 충분한 시간 훈련하였다 하여 내일 검을 손에서 놓을 수 있나?”



“그건, 당연히 안 되는 일입니다. 하루라도 검을 손에서 놓으면 다음 날은 몇 배로 노력해도 따라잡기 힘드니까요.”



“그렇지. 그와 마찬가지네. 오늘 얻은 알량한 애정이 내일도 조건 없이 이어지리라 믿는 건 머저리들이나 할 법한 착각이지.”







클로드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어찌해야 오늘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관찰하고 노력해야 해. 벽을 넘기 위해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며 해답을 찾듯이.”







그리 말하는 블레이크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